MBN 휴면다큐 사노라면, 방송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
음주운전자(나는 누이 이야기를 쓸 때는 반사적으로 ‘음주운전자’를 강조한다. 음주운전은 절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의 뺑소니 사고로 여동생이 세상을 떠난 때가 1999년이다. 누이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3년 동안 뇌종양을 앓아오던 형이 세상을 떠났다. 장남이었던 형의 나이는 마흔다섯이었다.
수원에서 살았던 여동생은 여수시립공원묘지로, 부천 역곡에서 살았던 형은 순천시립공원묘지로 오게 되었다. MBN 휴면다큐 사노라면 658회에서 나왔던 시골집은 순천시 별량면 덕산마을이다. 형이나 누이가 묻혀 있는 곳과 먼 거리는 아니지만, 승용차 없이는 쉬 갈 수 없는 깊은 산중 묘지다.
형이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는 몇 해 더 부천 역곡에서 형네 가족과 나와 동생과 함께 생활하였다. 서울과 경계지역인 역곡에서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아온다. 30년 넘도록 서울과 역곡에서 자식들과 함께 살아왔던 어머니는, 두 자식을 먼저 보낸 후 다시 고향 시골집으로 내려와 홀로 지내게 되었다. 젊디젊은 두 자식을 잃어버린 도시 생활이 더는 싫었을 뿐만 아니라, 형과 누이가 묻혀 있는 곳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어 하셨는지 모른다.
시골로 내려온 어머니는 틈만 나면 형과 누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당시 70대 노인이, 시내 들머리에서 묘지까지 13~14km쯤 구불구불 오르막이 이어지는, 발씨 서툰 그곳까지 걸음 하는 일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몇 해 전 내가 배낭을 메고 순천 시내에서 형이 있는 곳까지 묵주기도를 하며 걸어서 가봤지만 무더운 여름이어서 더욱 힘겨운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씩 뒤번지는 슬픔을 어쩌지 못해 형과 누이를 찾아가 슬픔을 토해내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봄이면 굽이진 길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분분하게 떨어지는 벚꽃잎들이 어머니에게는 얼마나 슬픈 서정을 일으켰으랴. 묘지에서 허정거리며 내려오다 보면, 지나가는 택시나 승용차가 어머니를 태워주기도 하였다. 택시 안에서도 흐느끼는 어머니를 보며, 운전자는 다시는 찾아다니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즈음, 모 건설사가 시공하는 버스 터미널 현장 소장으로 있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우연히 비문 이야기가 나왔고, 마침 돌을 다루는 거래처가 있다며 두 개의 추모비를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그 추모비를 시골집까지 싣고 내려와 마당에다 설치하였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형과 누이 산소를 찾아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먼 곳까지 안 다녀도, 어머니는 마당의 추모비를 어루만지며 슬픔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지금도 시골집 마당을 들어서면 두 개의 추모비가 맨 먼저 보인다. 사람들은 이 추모비를 유해가 묻힌 묘비로 오해하기도 한다. 집안에 무슨 저런 걸 두었느냐며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형과 누이의 추모비는 시비(詩碑)나 다름없다. 세상 떠난 누군가를 추억하며 그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보내는 일은, 다름 아닌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이다. 사실 나는 형이나 누이의 유해를 추모비가 있는 곳으로 모셔오고 싶다.
형과 누이의 묘소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깊은 산속이어서 찾아갈 때마다 묵직한 쓸쓸함이 몰려온다. 더구나 자주 찾지 못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무거울 뿐이다. 멀리 떨어진 산중은 남겨진 이들에게 시간과 거리의 벽을 더해 어쩌면 또 다른 이별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영면한다는 위안을 가져도, 떠난 이와의 물리적 거리는 결국 그리움을 더욱 짙게 하였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유해를 봉안당이나 멀리 떨어진 묘지에만 모셔야 할까. 세상은 종종 이별과 애도의 방식을 고정관념의 틀로 가두어버린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형식이 얽맬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세상 떠난 이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먼 곳에서 그리워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일상 속 가까운 자리에서 그들의 존재를 느낀다면 그 또한 위안이 될 것이다. 소중한 사람의 흔적을 일상에서 품고 사는 일은 마치 그들과 여전히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전해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여길 때, 우리는 그리움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의 유해를 정원이나 집 안에 모신다면, 그것은 남겨진 이들에게 심리적인 지지대가 되어줄 수도 있다. 물리적인 위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더 가까이 느끼며 삶의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결국, 애도의 방식은 누군가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각자 마음이 가장 위로받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