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학구열이 아니라 오직 살 빼기 일념으로 선릉에 갔습니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삶을 거의 일년을 했더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이젠 하루에 1,2시간은 꼭 걷기로 했습니다.
불행히도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사진이 좀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가다 보면 날이 좋은 날도 있겠죠.
강남 개발로 선릉은 정말 고층 빌딩 한복판에 있는데, 대낮에 등산복에 배낭메고 테헤란로를 걸어가기가 좀 그렇더군요
입장료가 1000원인데 한달 1만원권 정기권도 있습니다. 의외로 양복입은 분들도 제법 들어오시더군요
바로 앞에 들어간 분은 정기권 내고 들어 가시던데
선릉은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합친 것이죠
먼저 성종릉에 갔습니다. 첨엔 걱정이 됬어요 능에서 사진 찍으려면 능에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게 할 것 같지는 않고, 담당 분들에게 명함 내밀고 부탁하자니 날씨가 도와주지 않고, 하늘이 청명해 보이지만 좀 탁하고 희미했습니다.
담을 위해 그냥 갔는데 알고 보니 정상까지 관람로는 내 놨더군요.
성종능의 정상입니다. 능의 조각이야 다 같죠. 누구는 다르다고 하는데, 세밀하게 보면 다 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본양식이 너무 똑같아서 ... 정말 아쉽습니다. 사치와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서인 건 맞는데, 후대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 투자 좀 해서 왕릉이 제각각 멋을 내고 있다면 엄청난 관광자원이자 시대를 반영하는 증언들이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조각수준은 성종능이 최고인 듯 합니다. 역시 이때가 전성기라는 것이 허언은 아닌 듯 합니다. 굳이 평가하자면 태조부터 문종까지는 의외로 크고 웅장하면서 투박한 맛이 있고, 16세기 능들은 조각이 화려하고 균형감이 있습니다. 그 이후는 작아지고 소략해지고, 괜찮은 것들은 그저 아기자기하게 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굳이 나누어 보자면 그렇습니다.
무인상의 뒷태입니다. 참 세밀하게 조각했죠. 이분은 한국의 변화상을 그야말로 지켜보고 계시군요
사진으로는 잘 안보이는데, 성종능의 모든 석조물에도 반드시 모두 무늬를 넣었습니다. 화강암에 이렇게 문양을 모두 새기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릉과 도시라..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도시화 산업화로 전통적인 조경이 망가졌다고 불평을 하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이곳에 왕의 영혼이 있다면 저 벌판이 여전히 뽕밭과 채소밭으로 남아 있기를 바랄까요
오늘날 우리가 자연보호와 환경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투자하는 것도 경제력과 생활환경이 어느 정도는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과거 못살던 시절, 우리 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던 초기, 환경문제를 지적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분들이 꽤 있었고, 어떤 분은 나무 위에 올라가 살고, 원시의 삶을 실현한 분도 있지만, 대중적 지지와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정말 무지하고, 물랐기 때문일까요
에고 혼자 와도 이런 습관을 못버립니다.
성종능 건너편에 정현왕후의 능이 있습니다. 나무 땜에 사진 중간 가지 사이로 보아야 석상이 보입니다만 문득 보니 성종능보다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네요
전에 박물관 대학 수강생들을 인솔해서 동구릉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 분들이 열정이 넘쳐서 이것저것 보다가 질문을 해 대기 시작했습니다. 왕릉과 왕비릉이 어느 것은 붙어 있고, 어느 것은 떨어져 있다. 혹시 이거 생전의 부부사이를 고려해서 이런 것 아니냐? 왕릉과 왕비능이 조금씩 각도가 다르다. 이거 왜 이러냐, 저 왕비릉은 왕릉보다 높다. 이래도 되느냐
그런 식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안된다고 했죠. 그건 현대인들이 잘 하는 중요한 착각 중의 하나다. 옛날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다 의미를 부여하고, 예법을 따지고,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에 물든 우리보다 훨씬 정밀하고 차분하고 인간적이다.....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현대와는 생활환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법도와 예법을 엄격히 따져도 적어도 왕릉의 해석에는 이런 것이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산을 깎고, 바위를 옮기는 작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죠.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무상노동으로 사역하는 군인과 백성을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가 오거나 우기가 와도 큰일이고, 그래서 능의 고도가 조금 높다거나 왕릉과 왕비능을 떼거나 붙이거나 각도가 틀려지거나 하는 건 오히려 용납합니다. 적어도 이런 부분에 불가능과 어려움을 못느끼하는 현대인들이 더 따지고, 과잉해석을 하는거죠.
정현왕후 능입니다.
성종은 세 번 결혼했죠. 첫번 째는 한명희의 딸 공혜왕후는 일찍 사망했는데, 능이 파주삼릉에 있습니다. 두번째 부인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서삼릉의 회묘에 있죠. 회묘도 상당히 잘 만든 무덤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종의 모친인 정현왕후가 옆에 묻혔네요.
정현왕후 능은 능의 조각은 성종능보다 조금 단촐한데, 무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더 세밀합니다. 문인석 관모의 끈과 매듭도 정말 정교하게 조각했습니다. 제가 모든 능을 다 보지는 않았고, 정밀하게 관찰한 것은 아니라 확신은 못하겠습니다만 짐작컨데 거의 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성종릉의 문인상과 비교해 보십시오
정현왕후 능의 담장입니다. 궁궐 양식으로 기와를 넣어 쌓았죠. 왕과 관련된 곳의 담장은 다 이렇게 합니다.
중종의 능인 정릉으로 왔습니다. 여긴 전경이 더 화려하네요
정릉으로 가는 길. 우측 높은 길은 영혼이 다닌다는 신도입니다. 다니지 말라는 표지가 있는데, 글쎄 요즘도 그래야 하나요. 뭐 보존을 위해서라면 할말 없지만...
중종의 능입니다. 여긴 올라갈 길이 없어서.. 중종의 능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도굴 당했던 능입니다.
혹시 능으로 올라가는 길이 저 끝에 있나 해서 가보았습니다. 근데, 선릉이 그리 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산책로를 정말 절묘하게 만들어 놓아서 다 돌려면 제법 많이 걷습니다. 끝까지 갔더니 담장만 나오더군요.
허탈한 기분에 돌아서 나오는데 재실이 있었습니다. 광각으로 갈아꼈더니 역시 그 위력이
이건 광각의 위력 아닙니다. 가능하면 왜곡되지 않게 최대한 좁혀서 찍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