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삽을 사용하는 동물
최 중한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했고, 농부는 삽을 사용하여 생명을 유지한다? 나는 벼를 심었던 논을 성토하여 밭으로 만들었다. 비가 내리니 밭은 섬과 웅덩이로 변했다. 웅덩이에 잠긴 작물은 모두 익사했다. 초보 농사꾼, 나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왔어도 추수할 것이 없었다. 봄이 되자 평생 농사를 업으로 살아온 이웃 농부 김 씨에게 금년엔 무슨 작물을 재배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김 씨는 장비를 동원하여 배수로를 내지 않으면 어떤 작물을 심어도 자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장비 대신 삽으로 배수로를 파야겠다고 말했다. 옆에 같이 있던 최씨가 비웃었다.
”삽질하신다고요? 요새 세상에 누가 삽질해요?, 외국인 노동자들도 삽질한다고 하면 일 안 와요. 농사는 낭만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나에게 농사는 낭만이 아니니 나대지 말라는 최 씨 말에 뼈가 있었다. 농사는 땡볕과 비바람에 노출되어 온 몸으로 버티는 야생의 고된 업(業)이다. 노동으로 뼈가 녹은 그들 앞에서 땀의 고단함을 얕보는 자로 보였나보다. 기계는 자연과 함께 쉬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농사를 선택한 이유는 육체노동 뒤에 따르는 비움의 가벼움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삽질이란 단어가 군대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럴듯한 경험의 지인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인사계는 사고뭉치 선임병에게 막 전입해 온 신병 여러 명을 딸려 주며 쓰레기 묻을 구덩이를 파라고 지시했다. 온종일 땀 흘려 팠더니 트집을 잡으며 메우고 그 옆에 다시 파라고 했다. 팠던 구덩이를 모두 메꾸라고 지시하더니 어느 날 공병대 굴삭기 한 대가 나타나 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마쳤다고 했다. 기계문명을 만든 인간 승리를 예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구 없는 인간의 나약한 육체를 폄하하는 말인지 아리송했다.
니는 삽으로 배수로 파기에 도전했다. 배수로는 한반도 지형에 맞게 동고서저로 물 빠짐에 주의하며 조각했다. 공사 기간은 열흘로 예정했다. 사각의 밭, 북쪽 둑에 붙여 줄을 띄우고 삽질을 시작했다. 삽은 손잡이, 삽자루, 삽날이 한 몸으로 된 땅을 파는 도구이다. 배수로 작업은 삽날을 흙에 깊이 넣고 흙을 퍼 멀리 던지는 작업이었다. 삽질도 씨름과 같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익혀야 한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으로 삽 상단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전방을 향하도록 삽자루 중간을 잡았다. 삽질은 체중 이동을 동반한 리듬을 익혀야 한다. 삽날을 땅에 대고 오른발로 삽날 위를 밟아 삽날을 땅 속 깊숙이 넣는다. 무릎의 굴절 각도를 조절하여 삽에 실리는 힘의 크기를 달리하도록 체중을 이동하여야 한다. 체중의 가감에 따른 삽날의 가속도 크기에 의해 들어가는 깊이가 결정된다.
흙의 성질을 잘 파악하지 못하여 힘 조절에 실패하면 발바닥에 불이 나고 몸을 다칠 수도 있다. 삽날이 들어가는 도중 단단한 물체가 예상되면 서서히 강한 힘을 가해야 한다. 이 모든 종합적인 동작은 머리가 판단한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졌다고 사소하지 않은 것은 모두 피나는 학습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계단이나 길을 걸을 때, 눈으로 발 디딜 곳을 정하고 높낮이를 본다. 머리는 내 체중과 높낮이에 따른 중력을 고려하여 착지 시 몸이 받을 충격의 크기를 예측한다. 충격을 무리 없이 견딜 수 있도록 발목, 무릎 관절 각도를 정하고 대근육, 소근육, 이완과 수축에 관여하는 각종 근육에 신축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 발을 이동시키는 복잡한 과정이 순식간에 사뿐히 이루어진다. 수없이 많은 반복으로 머리가 아닌 몸이 익힌 결과이다.
만약에 이 많은 과정을 머리가 단계별로 생각하고 행한다면 수학에 소질이 없는 사람은 한 발짝 떼는데 몇 시간이 걸릴 수 도 있고 아예 한 발도 떼지 못하는 불공평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와 같이 몸이 유연하지 못해 어른처럼 넘어질 때마다 뼈가 부러진다면 성인이 되어 멀쩡한 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배울 때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는 법부터 배우라며 격려하는 것이다. 눈을 뜨고 삽질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땅속까지 볼 수 없으므로 감으로 익혀야 한다. 칼로 무를 자르듯 사각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삽날이 끝까지 들어가면 성공한 것이다. 가끔 삽날이 들어가는 도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에 충격이 느껴지면 흙 속에 단단한 물체를 만난 것이다. 이때는 삽날을 땅에 대고 체중은 왼발에 두고 오른발로 서서히 체중을 옮기며 삽날을 전후좌우로 움직이면서 돌을 피해 삽날을 밀어 넣는다.
흙을 퍼 올릴 때는 발의 무게중심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옮기며 삽날 위에 있던 오른발을 떼어 두 발로 땅을 디딘다.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두 손으로 손잡이와 삽자루를 단단히 잡고 허리를 펴면서 들어 올리며 동시에 삽을 허리 뒤로 뺐다가 허리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던진다. 단순하게 보이는 삽질도 업(業)이라 팔, 다리, 허리뿐 아니라 뇌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복잡한 동작으로 지난한 작업이다. 이 모든 동작이 리듬을 타고 하나의 동작으로 몸이 익힐 때까지 반복 연습해야 힘이 덜 든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며 산다. 배움은 새로움을 익히는 것으로 학습이라고도 한다. 한자로도 학습은 (學)배우는 (習)습관이다. 지식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암기하고, 두뇌로 이해하면 된다. 이해하는 데까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두뇌에서 할 일이다. 매번 두뇌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동작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끊기니 몸에 붙여야 한다.
배움은 몸에 붙이는 습관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습관이 몸에 배려면 육체적 노동의 반복을 통해 완성된다. 농부의 배움도 삽을 몸에 붙이는 행위를 통하여 완성된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한다. 농부는 매일 요란하게 발소리만 내지 말고 작물의 소리를 듣고, 잎의 색깔을 보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해야한다. 매일 자연의 소리를 듣고 몸이 반응해야 농사의 업도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며 나는 다시 삽질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