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인 주교 이천환과 대한성공회
이경래|대한성공회 사제
격동의 역사를 거쳐 자리잡은 대한성공회
정동은 조선이 개항되고 나서 서양공관들이 포진되어 있는 우리나라 근대외교의 요람이다. 그러나 격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많은 외국 대사관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없어졌지만, 유일하게 지금까지 줄곧 그 자리를 지켜온 곳이 있다. 바로 영국대사관이다. 그리고 그 대사관 바로 옆에 성공회 대성당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관, 수녀원을 비롯해 세실빌딩(성공회회관)이 있다.
서로 다른 두 기관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동에 자리한 까닭에 사람들은 성공회와 영국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일반인들은 성공회와 영국교회 혹은 국교회 등이 어떤 뜻인지 모르고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성공회(聖公會)란 명칭은 영국교회(Anglican Church)를 한자문화권에서 부르는 명칭이며, 국교회(國敎會)란 종교개혁 시기 천주교(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하여 영국의 국교가 되었다는 데 착안하여 붙은 명칭이다.
오늘날 영국은 지난날의 그리스도교 이웃교단에 대한 차별정책인 국교회 제도를 폐기하고 천주교를 비롯해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구세군 등 다른 교단과도 잘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영국을 비롯해 소위 영연방국가들에선 성공회 신자들이 많다. 종교개혁과 유럽 내 민족의식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성공회의 선교는 토착화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전쟁과 핍박을 이겨내며 한국에서 선교한 구세실 주교
‘조선성공회’는 1890년 초대 조선교구장 코프Charles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주교가 제물포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했다. 조선성공회는 1940년 9월29일을 기념하여 ‘선교창립50주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주변여건이 받쳐주지 않았다.
1932년 만주사변 이래로 황국신민화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상황, 특히 1939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대한 항의성명으로 일본제국의 반영(反英)시위로 인해 성공회는 점차 고난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외환관리법 위반, 단파라디오 소지 등을 이유로 영국선교사들을 체포와 집 안을 수색하면서 그들을 지속적으로 핍박하였다. 결국, 당시 교구장이었던 구세실 Alfred Cecil Cooper주교를 비롯한 영국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신학교와 병원, 사회사업기관들도 강제로 문을 닫게 되자 좌절한 신자들도 상당수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이 암흑같은 시기 조선성공회는 그 명맥만 간신히 유지할 뿐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이듬해 구세실주교를 비롯한 영국인 선교사들도 귀환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이북에 있던 50여개 교회와 연락이 두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신도는 반 이상으로 줄어 교회의 재정난을 겪었다. 고난 속에서 구세실 주교는 다시금 허리끈을 조이고 교회재건을 추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다시 일어서려는 우리민족과 교회를 또 한 번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인, 영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희생되었다.
구세실주교는 인민군에 체포되어 일단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추운 겨울 압록강 중류지방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을 걸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 헌트신부와 마리아 클라라 수녀는 결국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구세실주교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1953년 포로송환 결정에 따라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그해 4월 22일 런던에 도착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1953년 11월 14일 구세실주교는 불사조처럼 또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교회 자립을 위한 첫걸음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극심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냈던 구세실주교는 더 이상 교구장직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오뚝이처럼 강인한 체력으로 온갖 어려움을 헤쳐온 구세실주교의 쇠약함은 마치 해가 지지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의 황혼을 보는 듯 하였다.
1955년 3월 아프리카 선교사로 활동했던 선교사 주교 존 데일리John Daly(한국명: 김요한)가 대한성공회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선교사 주교답게 김요한 주교는 대한성공회가 더 이상 영국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회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도록 자립심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왜냐하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영국성공회는 더 이상 대한성공회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주교主敎, bishiop들이 예수 그리스도 12사도의 후계자로서 사목을 책임진다는 사도전승 使道傳承, apostolic succession에 따라 각 교구와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를 형성하는 성공회의 특성상 머지않아 세워질 ‘한국인 교회’를 위해 영국인 선교사들은 세 명의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해외유학을 보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천환(李天煥, 1922-2010)이었다.
1953년 사제로 서품받고 경북 상주에서 사목하던 이천환 신부는 1957년 영국에 가서 1959년까지 캔터베리 성 어거스틴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귀국 후, 성미가엘 신학원(성공회대학교의 前身)을 재건해 성직자양성을 비롯해 청주교회에서는 ‘성요한전도학원’을 설립해 평신도교육에도 힘썼다.
1965년 5월 27일. 대한성공회는 75년간 이방인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첫 한국인 이천환 주교를 중심으로 자립하기 시작했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는 이천환 주교를 첫 교구장으로 해서 자립하고, 대전교구는 영국주교가 맡으면서 점차 한국인 주교에게 자리를 넘겨 주었다.
이천환 주교는 한국교회의 완전한 자립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지만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단 9명의 한국인 성직자와 5,000명 남짓한 신자들만 있을 뿐,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기본자산도 기금도 없는 서울교구를 자립교구로 만들어가야 하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천환 주교의 길은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더욱이 오랫동안 영국인 주교의 지도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서울교구에서 젊은 한국인 주교를 맞이하는 것은 참으로 낯설고 쉽지않은 변화였다. 특히, 해방과 전쟁 중에 평양을 중심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주한 신자들과 강화와 인천 출신 신자들이 주로 있던 정동 서울대성당 구성원들로서는 이들과 지리적 연고도 없는 이천환 주교에게 선뜻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택한 이천환, 빛을 향해 나아가다.
이천환 주교가 서울교구 교구장으로 재직하던 시기(1965-1983)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 4.19혁명으로 민주주의의 꿈을 실현하는 듯했지만, 5.16군사정변으로 군인들의 철권통치 하에 희망이 좌절되고 민주주의의 꿈을 위해 다시 기나긴 항거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동시에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잘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조이고 매진했던 노력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천환주교의 사상과 저서에 녹아들었다. 이천환 주교는 자신의 모든 저서 제목에 ‘십자가’라는 단어를 늘 붙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나간 세 권의 책 제목들이 모두 십자가를 기제(基題)로 하면서도 한국 상황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 관형적으로 표현을 했다. 한국적 및 토착화적 기독교가 강조되어야 할 때에는 『한국땅의 십자가』(1975)를, 우리사회가 어두워지고 정의와 질서가 요구될 때에는 『정의의 십자가』(1982)를, 국내외적으로 평화와 안녕의 분위기 조성되는 듯 할 때에는 『평화의 십자가』(1986)를 책 표지로 나타내었다. 이 마지막 책은 『통일의 십자가』(1991)로 표현하고 싶다. 이젠 동서나 남북의 이데올로기 냉전과 그 분열이 종식되고 있고, 그 구체적 결과로 통일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일’이란 단어는 이 세계, 그 어느 다른 민족들보다도 우리 한국민족의 깊은 갈망이고 숙원이다. 그만큼 이데올로기와 남북의 분열로 해서 극심한 고통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한국민족에게는 ‘통일의 십자가’이어야 한다. <‘통일의 십자가’ 서문에서>
1965년 40대 나이로 최초의 한국인 주교자리에 오른 이천환을 둘러싼 환경은 녹록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희망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현대 교회역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결과, 천주교는 더이상 다른 교단을 배척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화해와 일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천주교에서 최초의 한국인 추기경으로 40대의 젊은 김수환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정동에 있는 대한성공회 이천환 주교와 명동에 있는 한국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간 화해와 일치라는 시대적 조류에 호응해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신교와 구교 간 일치운동을 펼쳤고, 점차 그 범위를 한국기독교협의회(KNCC)에 가입한 타교단으로 넓혀갔다. 1977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가 부활절을 맞아 간행한 『공동번역 성경』는 이 일치운동의 산물이다. 이러한 화합은 신·구교를 통틀어 현대 세계교회 역사상 한국 그리스도교가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 간의 화해와 일치는 교회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정의로운 목소리를 냈다. 세실극장에서는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연극을 통해서, 세실레스토랑에선 재야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교회는 약자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당시 정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분실(現 사랑의 열매 건물)로부터 노골적인 압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천환 주교는 약자들과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시대적 소임에 충실했다.
1983년 이천환주교는 18년 6개월 간 봉직한 서울교구장직을 내려놓고 정든 정동을 떠났다. 그는 은퇴 후 1997년 25년간 헌신했던 연세대학교 이사장직에서도 물러났다. 구한말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광혜원(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의 전신)과 연희전문학교가 1957년 합쳐진 연세대학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8:32)라는 그리스도교 건학이념의 기초 위에 설립된 학교이다. 또한 선교사들의 유지에 따라 특정한 교파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일치가 구현되는 교육기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교회일치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이천환 주교가 오랫동안 이사장직을 수행하면서 중용의 정신으로 연세대학교를 우리나라 주요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천환 주교는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길(道)”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걸은 인생길은 우리현대사가 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빛(光)”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의 길이자, 영원의 길이기도 하였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우리의 과거를 되새기는 동시에 미래의 희망을 꿈꿔본다. 오래전 이천환 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2020년 출간, <정동사람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