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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6일
말씀: 삼상 22:1-2
제목: 아둘람 공동체
저번 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날 우리사회를 보면 울분과 분노에 찬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를 바에 없겠습니다마는 옛날에는 드러나지 않았고 요즘은 드러나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부쩍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원통함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인을 이런 점에서도 생각 할수 있겠지요. 나라가 어려워지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골이 깊어가면서 마음에 상실감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상실감이 분노로 변하고 울분으로 변하고 해서 최근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묻지 마’범죄, 이것이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 보니까 이런 적은 교회에서 우리가 할 일이 금방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초대교회는 지금상황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의 어려움과 울분이 터져 나오는 삶속에서 해독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교회도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런 울분과 상실감에 쳐 해있는 이웃을 향해 해독의 역할 따뜻한 햇살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풀어나갔느냐를 다윗의 아둘람의 삶을 통해 교회 상을 정립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둘람의 공동체 구성원들을 보면 울분과 분노 그리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구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고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 아둘람 굴속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왜 아둘람공동체로 모여들었습니까? 환란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와 원통한자가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배경을 이렇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 의해 계속되는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사울이 몰아치니까 도망가다 도망가다 적진인 블레셋인 가드지역으로 피신해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블레셋 부하들이 ‘다윗을 믿으면 안 된다 안 된다’ 계속 그러니까 거기서도 위험을 느끼고 미친척하고 도망 나온 곳이 바로 아둘람 굴속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400여명이 모였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니까 환란당하고 억울하고 울분이 많고 상처투성이들의 사람이었다는 말이지요. 사실 그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잘 산다면 구지 이렇게 피신할 필요도 없겠지요.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동굴이라고 했습니다. 환경적으로 굉장히 여락한 곳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상처받은 사람들이 눈만 뜨면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이 상처라는 것이 자기에게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상처가 많다는 것을 인식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훗날 다윗이 다스리는 통일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여기서 배출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문제가 많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아둘람의 공동체가 이렇게 다윗왕국을 건설하는데 핵심이 되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입니까?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미래를 소망하고 믿음으로 하나되는 응집력이 강한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아둘람의 공동체와 오늘 교회공동체의 공통적인 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상처받고 억울하고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둘람에는 치유가 일어나고 새롭게 창조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교회는 안 일어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치료되고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교회가 자꾸 세속화되고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적으로 흐르고 세상적인 기준이 교회의 기준이 되고 세상적인 소망이 교회에서 동일한 소망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속화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일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곁으로의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것은 교회가 복음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교회를 조롱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또 사랑으로 무쇠 같은 마음을 녹이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교회가 세속화 된 부분이 있다면 과감히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성도들이 지금 세속화 되어 세상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더 구체적으로 내가 지금 세속화에 물들어 있는가? 그러면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이 세속화를 얼마나 깨끗이 정리하고 씻어내고 청산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 19:20절에 나와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사악한 사울왕이 사람을 보내서 다윗을 잡아와라 그래서 전령들이 다윗을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울의 전령들이 어떻게 바뀌어 졌는가 하니까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뫼’그러니까 이 말은 이들이 성령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이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볼 때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그들이 사울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적용)(신천지는 출입을 금합니다. 만일 출입시 법적조치를 취하겠습니다)--방금내용으로 적용한다면..
우리가 라마 나욧 공동체처럼 그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잘못된 지령을 받아가지고 이교회를 무너트리려고 이단이 침투해 왔다 할지라도 이 교회의 너무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예배의 영광을 누리고 그 심령이 변화가 되어서 내가 잘 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안 일어나고 자꾸 이단의 영향을 받으니까 출입금지, 법적초치 이런 푯말을 걸어놓는 것은 충분이 이해하지만 그러나 누가 그들을 구원하느냐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없고 그 공동체를 보고는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감동을 느끼지 못하니까 겨우 한다는 것이 이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가 이단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이 무기력한 현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이 이끄는 라마 나욧이 부러운 것 아닙니까? 다윗이 라마 나욧의 공동체의 영적 파워를 경험하고 누렸던 이 영향력이 오늘 본문처럼 아둘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데 영향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라마 라욧공동체가 되어서 여기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여기서 치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여기서 회복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역사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으로 여러분들이 직장으로 사업장으로 파송되어 가지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며 이끌어야할 주역들입니다. 이 교회에서 누렸던 공동체의 기쁨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내 아픔과 상처와 죄성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녹아지고 강건하게 되어 세상에 당당히 나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날마다 기도하며 회개해야합니다. 얼마나 많은 죄성을 가지고 문제있는사람들이 몰려오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회개의 영으로 그들을 이끌고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가 되려면 엄청난 기도와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우리교회가 정말 영적 회복과 치유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을 원한다면 우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 야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의 영향력 아래 있느냐가 간권입니다. 아담은 에덴이라는 아름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고 예수님은 광야라는 험악한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이겨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력의 문제란 말입니다. 본문도 사울왕의 악한 영에 놓여있던 신하들, 그런가 하면 다윗의 공동체의 영향력아래 있던 아둘람의 공동체 사람들, 그들 중에 사울의 신하들은 환경은 굉장히 좋지요. 궁궐에서 지내고 호위호식하고 그런데 이렇게 환경적으로 좋은 곳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패망의 수치의 길로 넘어졌고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는 환경이 그렇게 열악하지만 이들이 다윗왕국을 세우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한 나라를 세우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환경이 아니라 누구의 영향력아래 놓여 있는가?
사실 다윗만큼 어려움을 겪고 고통과 수치와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다윗의 어려움은 한가지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을 구해준 것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구해주었는데 사울이 다윗을 괴롭히며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모순이지요. 그런데 현재도 오늘날 삶 속에서 이런 엄청난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를 살리려다가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세상은 이 못된 사울왕이 어디서든 존재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김삼환목사님이 부교역자로 있을 때 이 분이 몇 번 쫓겨났답니다. 왜 쫓겨났느냐하면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잘해서랍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못하면 교인들에게 찍히고 잘 하면 담임목사에게 찍힌다는 이 현실적 논리가 교회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정도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악하고 불의한 일이 많겠습니까? 이런 악한 세상에서 이런 악한 환경에서는 상처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목회를 잘 해도 상처받고 못해도 상처받고 일을 잘하면 상사에게 눈치 보이고 못하면 무능하다고 쫓겨나고 이런 것이 현실입니다.
시편62편 5절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
이 시편은 압살롬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궁중에서 도망 나오면서 쓴 시입니다.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다윗의 아들 아닙니까? 자기 아들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참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노래합니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다윗이 그 절망 구덩이 속에서도 일어날 용기가 생기고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것은 그 악한 사울이 기다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못된 압살롬이 회개하기를 기다려서가 아니고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회복되는 능력이더라는 것입니다.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위로하심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거기에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환경에 영향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향력을 보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주 관심사를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바꿔야합니다. 다윗이 울분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삼상17:26 ‘ 다윗이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의 울분을 아시겠습니까? ‘너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네 까짓 것이 무엇인데 하나님을 조롱하느냐는 것입니다. 울분이 얼마나 무서우냐하면 그렇게 착한 여학생이 5공세력의 압제 앞에 울분이 쏟으니까 옥상에서 신나를 뿌리고 자결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울분은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해 울분이 쏟아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골리앗 앞에는 울분이 있고 사울 앞에서는 울분이 없는 것입니까? 이것을 두고 다윗을 믿음의 사람이라고도 합니다마는 다윗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울분이고 사울에게는 용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 열정도 있고 동시에 상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상처를 받습니까? 저나 여러분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관심이 있고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그러니까 거기에 아파하고 상처가 생기고 염려하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의 주신 말씀에 순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상처가 되시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온통 우리의 관심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이익에 여러 가지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아파본 적이 있습니까? 오스왈드 챔버스라는 분이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을 우리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데 이 책에 보면 ‘아픈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이 말씀을 읽으니까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제가 아픔을 많이 느끼면서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이런 표현을 자주 씁니다. ‘내 심장을 때어 개에게 주어도 냄새가 나서 먹지 않을 것이다’그 만큼 아파하면서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무엇 때문인지, 부흥이 안 되어서, 아니면 성도들이 속을 썩여서, 아니면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런지, 무엇 때문에 아픈 것인 줄 모르고 아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래서 100%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파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이 이 땅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아픔이라면 그것이 상처가 되더라도 나를 사용해 주십시오. 하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본질적인 문제 현실을 넘어 그 나라를 위한 문제를 가슴에 품고 나기지 않으면 이 세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욕심과 이기심과 이익과 불의와 더럽고 추악함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편안을 얻고 유익을 얻고 안식을 하려니까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으로 우리가 걸어가야하는데 그 길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가는 여정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며 돌보시며 인도해 내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뜻에 내 마음이 머물면 사람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영향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영향력 안에 흔들리 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너무 사소한 것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나라의 회복의 본질적인 곳에 우리의 마음이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적어도 사울이 주는 상처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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