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4. 대림절 네 번째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1장 18~25절
예수님은 임마누엘
■ 강아지가 고양이 소리를 낸다거나, 고양이가 강아지 소리를 낸다면, 이는 희한한 일입니다.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자하고 소가 서로 얼굴을 비비며 사이좋게 지낸다면 이 또한 희한한 일입니다.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나무는 밑에서 위로 자라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다고 해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외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예외의 범위를 넓게 잡아도 전혀 인정할 수 없는 예외도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들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마땅치 않은 대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기적이라 말하기도 부족하고, 천지개벽이라 표현하기도 부족한 ‘우주적 대사건’입니다. 사실은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만, 분명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 2천년 전 일이신데, 사실은 사람이 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 2천년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바로 앞에 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이것의 의미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 우주 전체를 포함해 지구상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만큼 대사건은 없습니다. 우주를 포함해 모든 물질을 만드시고,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어떤 부족함도 아쉬움도 없는 분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도대체 하나님께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주를 통틀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사람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실 만큼 사랑한 사람이 죄를 짓고 망가졌는데, 이것이 너무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화나고 속상하셔서 아프신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서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빗어 낳은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눈, 코, 입, 그리고 오장육부, 모든 신체와 마음과 정신과 영혼 모두 다 하나님이 친히 빗고 낳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망가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무너지셨고 아프셨습니다. 망가진 자식을 두고 보는 부모는 없으니, 이에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을 위해 사람이 되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말씀하시듯 “때가 차매”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 그렇다면 왜 사람이 되시기로 하신 것일까요?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정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구약의 제사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늘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제사가 예배와는 다른 것이 곡식이나 동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동물이 바쳐지는 이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에 위배하는 삶은 죄가 되는데, 이를 속죄해야 죄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피가 필요했습니다. 피에는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일이 직접 피를 흘릴 수는 없기에 동물의 피를 대신해서 속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일건일회(一件一回)에 해당할 뿐이었습니다. 죄 하나당 속죄 제물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제사는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루에도 몇 번씩 죄를 짓는 것이 다반사이니 이를 감당하기가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계 앞에 사람은 더욱 무력함을 느꼈고, 하나님은 더욱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결심을 하셨는데, 오래전에 계획하신 것으로 사람이 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직접 속죄 제물이 되셔야 죄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불가불 사람이 되셨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되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신 이 사랑은 단순히 이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대신 속죄하셨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놓치고 있던 우리에게 그 의미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현시(現示)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 계신 적이 없으십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곧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상관하지 않으신다고 불평도 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 계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오해일 뿐입니다. 바로 이 오해, 이 건방짐을 한 방에 무너트리신 일이 사람으로 오심이었습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는 이유나 핑계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임마누엘>, 이것은 속죄 제물로 오신 이유와 함께 우리에게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말라며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두려움은 불청객입니다. 원하지 않지만, 마구잡이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이 두려움만 없다면 인생은 제법 행복할 수 있는데, 두려움은 일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궁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두려움은 끝입니다! 모든 문제의 절대 종결자이신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신다? 와우, 이처럼 완벽한 인생의 해결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이 사실은 현실이 됩니다. 24시간, 365일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은 여러분에게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의 현시가 성탄절입니다.
■ 성탄절을 가장 처음 만난 분은 마리아였고, 요셉이었습니다. 이 두 분은 임마누엘을 가장 먼저 믿음으로 그리고 눈으로 만났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자신들 몸에, 삶에 계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을 잉태했으니 인간적으로 당황했겠다 싶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겠다 싶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임마누엘을 가장 깊게 경험했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인생이 임마누엘을 경험하고 신앙하는 순간부터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행복 그 자체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복의 시작이자 끝이시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원천이자 결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사는 한 행복은 당연히 내 몫이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멀리서 찾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행복의 원천지이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불편해하거나 불안해해서는 안 됩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니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스토커나 엿보는 분으로 치부(置簿)합니다. 혹자는 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불안해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자신의 죄를 적어 넣는 치부책(置簿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불신앙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놓쳐버리는 불신앙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누릴 수 있는 거룩하고 좋은 기회를 발로 차는 꼴입니다.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보이고, 부끄러움을 들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얼른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곁에 계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은 행복입니다.
■ 당장 내일이 성탄절입니다. 지상 최대의 축제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니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너무도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날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감사와 기쁨을 드려야 할 날입니다.
이에 오늘의 메시지는 <임마누엘>의 고백으로 시작해서, <임마누엘>의 고백으로 마무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으로 마무리하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셨다시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두려울 일이 아니라 신나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당당히 드러내며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보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여러분은 그 누구도 두렵지 않고, 부럽지 않은 <임마누엘>의 사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