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은 두려운 일 입니까? 늙어도 죽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두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살아있을 때 가지려고만 하고, 이기려고만 하고, 즐기려고만 했다면 죽음은 두려운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죽음은 크나큰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욕심부리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인생을 물흐르듯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죽음은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내일 일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늘 성실히 준비하면 내일 행복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내일 뒤에 내일, 그 내일 뒤에 내일, 그 뒤에 내일은 죽음입니다.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내일을 준비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도 내일은, 오늘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사는 것입니다. 나날이 신체도 변하고 생각도 변해가니 매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에 가면 목어(木魚)라는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지요. 그래서 목어가 깨어있음의 상징이랍니다. 그러나 눈을 감지 않는다고 다 깨어있는 것은 아니지요. 쌍꺼풀 수술이 잘못되면 눈을 뜬 채 잘수도 있으니까요. 깨어있다는 것은 성실하게, 착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깨어있는 우리는 오늘, 우리 안에 심어진 선성(善性)으로 착한 삶을 살아갑니다. 선함과 아름다움과 사랑과 친절과 도움으로 애쓰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오늘 성실히 준비하면 내일이 아름답듯이, 내일 내가 죽는다면 오늘 준비한 그 성실함이 아름다운 천국을 열어줄 것입니다. 혹, 내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나는 내일 천국을 앞당겨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성실히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든지 열리는 세상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그 다음 날도 크게 다를 것없는 내일의 하나이며, 내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도, 떠나온 나도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할 뿐입니다. 하루하루 내일을 준비하며 성실히 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종말이란 미래에 있을 멸망이 아닙니다. 종말이란 우리를 겁나게 하고 조급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을 마지막처럼 잘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이 용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오늘이 사랑한다 말하며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종말과 죽음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잿빛 11월, 죽음을 묵상하는 달, 우리의 삶이 부질없는 욕심과 집착과 미움의 굴레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언젠가 나를 찾아올 죽음이 친구처럼 편하고 반갑도록 잘 준비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란 성직자와 수도자와 구분한 모든 교우로서,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사명을 완수하는 교우를 뜻합니다.
교회헌장 제4장 평신도 38항에서 “평신도는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마태 5,3-9 참조) 생명력을 얻는 바로 그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여야 한다.” 즉,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 라고 그 소명을 확실히 했으니, 진정 평신도는 복음을 살고 전하며,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고 확장시켜 가는데 정진해야함이 요청됩니다.
이와같은 평신도의 위상에서, 벌써 한달 이상을 살고있는 신앙의 해! 과연 어느 선상에서 살고있는 건가요?
교황님께서 신앙의 위기가 느껴지는 오늘날, ‘신앙의 해’ 를 선포하시며 “그리스도 예수님과 만나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사는 것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체험합시다.” 라고 제안하셨죠? 물론 그동안 저희의 삶, 나름대로 지향하며 살아왔기에 ‘신앙의 해’ 를 진작부터 살아온 셈였고, 이제 그 활성화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성화 성취를 위해 저희는 어떤 실천의 삶을 펴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말씀 완독을 목표로 당일 배정표에 따라 기도 안에서 읽고, 말씀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도록 하며, 구역·반 소공동체모임을 근본으로 소속 모임 등에서 말씀으로 사는 삶을 나눕니다.
미사전례 등에 전심으로 참여하며, 미사끝 공지사항 중이나 적합한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사회교리’ 를 항목별로나 문답형태로 주보에 게재하여 함께 새겨보고,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도 저녁미사 30분전 강독이나 적합한 시간에 공부합니다. 특히 교황님께서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 다음으로 문헌과 교리서를 가까이 하라고 그것도 전대사의 특은까지 선포하시면서 권장하신만큼, 문헌과 교리서 전체를 개인적으로 필사하거나 본당공동체가 함께 분담하여 오자가 없는 한권의 책으로 완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외이웃들을 직접 돕거나 최소한 신심활동단체의 명예회원이 되어 후원하고, 끼당 몇푼이라도 수시로 저금통에 모아, 봉헌하여 함께 돕도록 합니다.
그 외에도 ‘신앙의 해’ 에 개인 자신이나 공동체에서 적합한 실천을 통해, 진정 그리스도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삶 한가운데 예수님을 모시며, 신앙의 아름다움을 확실히 체험하여, 앞으로 더 더욱 활력있는 신앙의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오늘은 마흔 다섯 번째 맞이하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1968년 개최된 추계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전국평협 인준과 함께 대림 첫 주일을‘평신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날을 택한 이유는 이 시기가 이승훈 베드로가 1783년 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던 때와 맞먹기 때문입니다. 1970년 세 번째 평신도의 날부터는 그리스도왕 대축일 전주일로 바꾸고 명칭도‘평신도 주일’이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해를 살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인 동시에‘가톨릭교회 교리서’반포 20주년이 된 날부터 내년 연중 마지막 주일인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신앙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교구에서도 10월 14일 모든 본당에서 개막미사를 봉헌하고 사제연수를 실시하였습니다.
우리도 나의 신앙을 돌아보고 확신하며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 노력해야겠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내 곳곳에서 사도직에 참여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이 복음정신으로 살며 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외교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그때에‘사람의 아들이’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 13,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곳에서 그때를 위해 깨어 있는 삶을 살며 나부터 복음화되는 새로운 복음화에 우리 모두 온 힘을 기울입시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축복한 작은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교회 전례력상으로 마지막 시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날과 그 시간 곧 종말의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종말이라는 말은 듣기에 썩 유쾌한 단어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에서 나의 존재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상실 곧 죽음은 세상 누구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입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 들어도 마지막 날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불편한 마음이 앞섭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당신 자녀로 하여금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 들게 하시고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종말(終末)’은 분명 마지막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성경적으로는 ‘끝’이 아니라 ‘완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함의 속성을 지닌 종말을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멸망에 더 가까운 ‘시한부 종말론’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것이다.”(루카 13,26)
무서운 일들이 있고 난 후 세상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새롭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하느님의 창조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이미 수차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던 휴거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은,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의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못된 가르침에 이끌려 아버지 하느님 외에는 아드님조차도 모르시는 그날과 그 시간을 되뇌며,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실한 삶을 포기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5,18)
믿는 이들에게 마지막 때는 결코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듯 아주 자연스럽게 완성의 계절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무서워 떨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부정하던 이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악과 부조리가 정리되는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 곁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파레토(Pareto)의 법칙’을 아십니까?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1848-1923)가 주장한 학설인데, 그 내용인즉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즐겨 입는 옷의 80%는 옷장에 걸린 옷의 20%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20%의 운전자가 전체 교통위반의 8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하죠. 그뿐입니까? 20%의 고객이 백화점 매출의 80%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과의 80%는 근무시간 중 집중력을 발휘한 20%의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하는군요. 공감이 가십니까?
신기하게도 이 법칙은 곤충의 세계에서도 적용된다고 합니다. 일개미들이 다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중 20% 정도의 개미들만 일하고 나머지는 빈둥거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놈들 봐라?’하고 그 20%만 따로 떼어 놓으면, 재밌게도 그 20%의 개미 중 또 20%만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놀고 있다고 하네요. 자, 이제 여기서 개미를 빼고 사람을 대입해 보도록 합시다. 어떻습니까? 고개가 끄덕여지십니까? 100명 중 일하는 사람은 20명, 그 20명을 따로 떼어 놓으면 그중에 일하는 사람은 4명…⋯. 조금은 씁쓸해지지 않으십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보이는 듯합니다. 본당 신자 수는 몇천 명에 달하지만, 그중에 봉사하시는 분들은 과연 20%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두세 개의 직책을 맡아 봉사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일 터인데, 한 사람이 손 역할도하고, 발 역할도 한다면 과연 그몸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주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일찍이 평신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신자들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의 일선에 서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인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리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특별히 교회에 속해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로 교회라는 더욱 분명한 의식을 지녀야 한다”(1946년 2월 20일, 새추기경들에게한담화中).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 교회는 성직자들만의 교회도, 수도자들만의 교회도, 20%의 봉사자들만의 교회도 아닌 우리 모두의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날과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깨어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서 자신의 몫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적어도 파레토의 법칙이 우리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 내야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29-30)
창조된 모든 것 안에는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끝을 향해 가고 있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 시작된 모든 것 안에는 끝이 있으며 그 끝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영원하지 않다. 60년이 지나고 70년이 지나면 한 세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했어도 자기 끝이 보이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유한한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오늘 예수님은 종말에 관해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 없어질지라도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방법이요, 죽어서도 죽지 않고 천국의 삶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 뜻밖에 없다.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젊음도 건강도 재물도 명예도 죽음 앞에서 인간을 지켜 줄 수 없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카 12,15).
누구든 영원히 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느님의 뜻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준비하는 가장 최고의 지혜다.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열심히 오늘을 산 결과는 반드시 내일의 영원한 우리 운명을 만든다.
아무리 힘들고 갈등스러운 순간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을 다하는 복된 우리 신앙의 모습이기를 기도한다.
“행위는 존재에 따른다.”(Agereseguitur Esse)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제가 있습니다. 좋은 행위는좋은 존재에서 나오고, 나쁜 행위는
나쁜 존재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 17 참조)는 주님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에 평신도의 존재(Esse)는 무엇일까 하고 묻습니다. 평신도는 영원토록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에서부터 기
억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부르시어 ‘지금 여기에’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때가 차면 하느님의 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졌고 또 그럭저럭 한평생을 살다가 허무로 돌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에도 또 이 세상을 살면서도 또 이 세
상을 떠나서도 하느님 품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평신도와 대칭적인 관계에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와 성사 집행에 봉사하며 현세를 살아갑니다. 평신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성직자와는 달리 “현세 질서 안에서 복음의 빛과 교회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써 구체적
으로 직접 행동해야 하는”(평신도 사도직 교령 7)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현세 질서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성직자들이 다가갈 수 없는 분야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기에 평신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각기 재능과 지
식에 따라서 교회의 정신대로 그리스도의 원리를 밝혀주고 옹호해야” (동교령) 합니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하느님 나라를 구성하는 신비체의 한 몸입니다. 각자가 받은 사명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 그 열매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며 그 열매를 맺는 과정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평신도가 없는 하느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성직자들만으로는 하느님 나라
를 확장할 힘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왕성한 평신도 활동이 한국 가톨릭 교회를 태동시켰고, 성장시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 성실하게 평신도 활동을 하시는 분들께 격려를 보내도록 합시다. 우리도 모두 평신도가 지녀야 할 긍
지와 사명 그리고 의무를 자각하도록 합시다.
찬미예수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마흔다섯 번째 맞이하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님께서 평신도에게 바라시는 평신도 사도직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1986년 한국주교회의에서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 중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앙인들로서,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성직자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친교를 맺으며 기쁨과 희망과 평화를 향해 주님의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 해가 끝나가는 이 시기 즈음이면 우리 모두는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아쉬움에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또 다가오는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까하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의 상황, 이웃의 삶까지 돌아보면서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살았는지 더 넓게 더 깊게 돌이켜 보게 됩니다.
개개인은 “하느님이 나의 삶의 주인임을 제대로 인식하며 살았는가?” 교회는 “과연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말씀 따라 순종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신앙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며 구원과 희망의 밝은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말라 3, 19-20)
올 한 해 우리는 하느님을 내 삶의 주님으로 모시기 위해,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말씀으로 하나 되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성경공부모임에 참여도 하고, 성경 말씀을 통독도 하고, 각자가 혹은 가족이나 본당이 성경을 필사하고, 성경 말씀으로 가훈도 정했습니다. 10월 14일에 있었던 교구 말씀축제에 제출된 천여 권의 성경필사본과 전각으로 새긴 말씀, 붓으로 그림으로 체험수기까지…. 말씀과 함께 했던 많은 시간과 정성과 흔적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교구의 모든 신자가 보지 못하고 여건이 여의치 않아 하루만 전시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인 말씀과 가까워졌고 깊은 친교를 맺었고 말씀으로 길들여진 신앙으로 “온전히 하나 됨”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음이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지 실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 “신앙의 해”를 지내게 됩니다. 교회가 신앙의 해를 제정한 목적은 이미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 이들이 스스로 신앙을 재발견하여 그리스도와 만나는 기쁨과 새로운 열정을 북돋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뜻 깊은 1년 동안 우리는 모두 우선적으로 각자의 신앙을 깊이 성찰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수년째 우리가 겪고 있듯이 오늘날의 세상은 신앙을 지켜나가고 실천하게 어려운 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물질만능주의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하느님의 가치보다는 세상의 가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짐으로써 세상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가 더 이상 세상을 이끄는 이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이미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신앙과 삶은 나누어진 것이며 신앙은 단지 취미나 선호의 문제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전해주는 신앙의 유산과 지혜를 배우고 익혀 아름다운 신앙의 여정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먼저 말씀과 더욱 가깝게 더욱 깊은 친교를 맺고 주일미사를 포함해 전례에 충실히 참여하고 성사생활에 소홀하지 않아야 하며 매일의 일상에서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러한 모든 신앙생활이 좀 더 깊이 있게 이루어지고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열성적으로 배우려는 자세와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교구가 추천하는 신앙의 해 추천도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신뢰하게 해줄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이 단지 나 혼자만의 선택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증거와 구원을 향한 노력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어디서나 하느님을 알리고 사랑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 쏟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례로 교회와 한 몸이 된 우리는 각자가 선교사입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다원화되어 간다 해도 절대로 변해서도 잊어서도 안 됩니다. 경기침체나 경제적 악순환뿐만 아니라 돈이면 무엇이든지 해결된다고 여기는 물질적인 세상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합니다. 본당 공동체가 힘을 모아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의 장을 마련하고 교회가 준비한 행사에 이웃을 초대하고, 지역사회봉사의 장에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삶을 이웃과 지역에서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사명입니다
교회가 제정한 신앙의 해는 우리가 신앙을 성찰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소중한 유산들을 배우고 익히는 복되고 은혜로운 때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명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갑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세상이 끝날 때의 모습을 궁금해하고 ‘그날이 언제 올까?’라는 질문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그러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등장하는 매체와 뉴스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 복음은 정작 중요한 것은 생략한 것처럼 보입니다. 잔뜩 궁금증만 만들어 놓고 그에 대한 답은 주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말씀은 오늘 복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라는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논리 안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허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종말이 오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들이죠. 그러다 보니 허무주의,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식의 절망감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그에 대한 반사이익을 통해 그들의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 종말에 대한 준비의 자세는 본질적으로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그날이 언제
오든 어떤 방식으로 오든 상관없이 조심하고 깨어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그에 대해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신앙의 자부심과 믿음을 놓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겠지요. 하느님의 자
하심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초대해 주셨고 우리는 응답했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으로 하느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 신앙에 대해 긍지를 잃지 않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을 만납니다. 이런 순간들을 보내며 하느님께 더욱 매달리고 가까이 가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원망으로 믿음을 놓아 버리는 이들의 모습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의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건네는 한마디의 말 속에 사랑이 담겨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잠깐, 잠깐 하다가 놓쳐 버리는 그 순간이 바로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종말의 때임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초 등학교 4학년 때 급훈이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되자.”였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학교 정
규 수업 외에도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해 다양한 공부와 취미활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취미나 특기를 계발
해서 각자 나름대로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선생님께서는 바라셨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한 것을 보면 선생님의 철학과 지도 방식이 특별했고 그를 통해 많은 것을 체험하고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삶의 주변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향해 힘차게 자신의 삶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저는 대구주보를 보시는 모든 평신도 여러분께 주체적인 사람이 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체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신도는 성품과 교회에서 인정된 수도 신분에 속하는 이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세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여,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1편 897항)
신앙생활의 주체는 본당 주임신부나 전교수녀들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통해 받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
을 십분 발휘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분의 의무이고 권리이기 때
문입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삶에서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교회는 사회의 활력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들
은 자신들이 교회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 즉 공동체의 으뜸인 교황과 그와 일치해 있는 주교들의 인도를 받는
지상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사실을 항상 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라고 교황 비오 12세께서 연설하셨다
고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새 시대, 새 복음화”를 이끌 사람들은 바로 평신도 여러분, 여러분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 맞은쪽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한테 가르치신 내용입니다.(마르 13,3 참조) 마르코복음 13장 24-25절에 소개하는 하늘의 재앙은 구약성경의 본문을 반영합니다.(이사 13,10; 34,4; 에제 32,7–8; 요엘 2,10; 4,15; 아모 8,9 참조) 일반적으로 이런 본문은 역사 안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말하기 위해 은유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이 구절에서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2베드 3,10-12 참조) 마르코복음 13장 20-23절에 소개된 해석에 따르면, 24-25절에 언급된 재난은 예루살렘의 파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일어날 모든 시기의 일반적 특징을 말합니다.(전쟁, 지진, 기근 등) 하느님은 그런 환난의 날수를 줄여주셨습니다.(마르 13,20)
이 환난 뒤에 ‘사람의 아들’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기 위해 구름에 싸여 내려오십니다.(26절; 참조: 마태 13,37–43; 25,31; 2테살 1,7; 묵시 1,7) ‘사람의 아들이 구름 안에서 힘과 영광에 싸여 온다.’는 묘사는 다니엘서 7장 13–14절을 암시합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마르코복음에서 당신 자신을 계속해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2,10.28; 9,9.12.31; 10,33; 14,21.41) 그러므로 지금 올리브 산 위에서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네 제자는 장차 심판을 위해 올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과 같은 분임을 압니다.
27절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확실히 부활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최후심판에 대해 가진 온갖 두려움을 없애줍니다.(1테살 4,16-17 참조) 마르코는 믿지 않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데 이 본문이 믿는 이들한테 종말에 대해 미리 경계하고 가르쳐서 그들을 강하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이미, 믿지 않는 이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영원한 벌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했습니다.(마르 3,29; 8,36.38; 9,43–48 참조)
그날은 갑자기 다가오지만 표징이 있습니다.(13,28-29)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종말에 대해 제자들이 한 질문 두 가지, 종말의 시기와 표징에 대해 응답하십니다.(13,5-23 참조) “이러한 일들”(29절)은 5–23절에서 언급된 모든 내용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종말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보이고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재림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파괴 후에 즉시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32절)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35절)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를 모르는 사람 중에 ‘아들’이 포함된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2,3)라고 하는데 왜 아들도 그 날짜와 시간을 모를까요?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본질은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아들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따라 그분은 신적인 전지전능을 완전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류하십니다. 그것을 단지 그분의 구속활동을 위해 필요할 때만 사용하십니다. 그분의 재림에 대해 정확한 날짜를 계시하는 것이 아들의 일은 아닙니다. 사실상 그렇게 하셨다면 영적으로 우리한테도 위험했을 것입니다. 집주인이 자기 종들한테 언제 돌아오는지 정확하게 말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서 지키는 것은 충실한 문지기의 의무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7)
모든 시대의 독자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자신을 ‘이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도록 초대받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오실 것이며 종말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은 또한 믿는 모든 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빛 안에서 세상의 사건과 흐름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은 죽음도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한테 심판의 날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과 만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