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선무원종공신 한백록장군 14대 종손 한희민씨.(정재억님을 뒤이어 강촌문화마당 현 대표이시다)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 건립
김성휘 작사, 김학송 작곡, 나훈아 노래
1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으는
꽃피고 새가우는 논밭에 묻혀서
씨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싶네
2 해가지면 뻐꾹새가 구슬프게 우는 밤
희미한 등불 밑에 모여 앉아서
다정한 친구들과 정을 나누고
흙냄새 마시며 내일 위해 일하며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싶네
강촌에 살고싶네의 유래
강촌문화마당은 노랫말에 나오는 강촌의 지명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가요협회를 통해 2002년 4월 24일 작사자 설갈 김성휘 선생을 직접만나 노래 제목 강촌이 실제 이곳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임을 입증했다.
설강 김성휘 선생은 1965년경 춘천에서 서울로 가던 저녁 무렵 산중턱에 달랑 걸려있는 듯한 강촌역이 너무 아름다워 배를 타고 건너가 허름한 여인숙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머물며 가사를 지었다. 이미 어두워진 산 숲에서 뻐꾸기 우는소리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강가에 우거진 버드나무 사이로 새들이 하염없이 물위를 나는 장면이 어우러지며 노랫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노랫말 2절은 강촌에 도착한 날 저녁 여인숙의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작사하고 1절은 이튿날 아침 강변의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1969년 작곡가 김학송 선생(현 미국 캘피포니아 거주)이 곡을 붙이면서 운율에 맞게 1절의 "날고"를 "날으는"으로, 2절의 "흙내"를 "흙냄새"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노래로 만든 뒤 가수 나훈아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국민 가요로 자리매김했다
춘천시와 강촌문화마당 합작, 강촌삼거리에 세워
국민가수 나훈아가 불러 널리 알려진 ‘강촌에 살고싶네, 노래비가 남산면 강촌리에 건립됐다.
춘천시와 강촌문화마당(회장=정재억)은 지난 2005년 7 월 16일 오후 6시 남산면 강촌리 삼거리자전거도로 출발지에서 ‘강촌에 살고싶네’ 노래비 제막식을 가졌다.
노래비는 춘천시와 강촌문화마당이 각각 3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조각했으며 음향시설을 갖춰 버튼을 누르면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어 새로운 명소로 탄생했다.
노래비 제막식에는 류종수 시장, 허천 국회의원, 정재억 강촌문화마당 회장, 김성휘 선생 유족, 김주열·박근배·김용주 시의원, 주민 등이 참석했다.
강촌문화마당은 노래비 제막식에 맞춰 이 일대에 가로등과 벤치 등을 설치해 공원으로 조성했으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란 노랫말에 따라 앞으로 공원 인근 개울가에 수향 버들을 심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휴식공간 제공 등 새로운 강촌의 명소로 가꿔나갈 계획입니다.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가로 4미터, 높이 3.5미터
http://cafe.naver.com/huh1000.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9
김학송 노래 검색 사이트
http://search.daum.net/search?t__nil_searchbox=btn&w=tot&sType=tot&q=%B1%E8%C7%D0%BC%DB+%B3%EB%B7%A1
kbs home > 1tv > 연예오락 > 가요무대 > 방송보기
http://www.kbs.co.kr/1tv/enter/gayo/vod/vod.html
필자.
청춘공화국 강촌의 장면이다.
그러나....청춘공화국의 젊은 청춘들이 광복절이란 개념을 알기나 할런지...
고향의 항일의병이나 독립투쟁에 목숨과 재산을 아낌없이 국가를 위해 던진 선열들의 정신을 알기나 할런지...
8.15일....제 70주년 광복절 기념일이다...
춘천시 남산면사무소 근처 남산도서관내에 있는 춘천의병장 습재 이소응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안내는 한백록장군 14대종손 한희민님께서 해주셨다.
습재 이소응 선생
1861(철종 12)∼1928.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의신(宜愼), 직신(直愼). 호는 습재(習齋). 강원도 춘천 출신.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인품이 고매하여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내용
1895년의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시해와 단발령의 강제로 배일감정이 폭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0일(음력 을미년 12월 16일)에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의 지방유생과 1,000여 명의 농민들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척사위정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규정하고, 엄한 군율 밑에서 부대를 통솔하였다. 먼저 정부에서 개화관료인 조인승(曺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임명하자 단발하고 부임한 그를 참형에 처하여 그 기세를 올렸다.
2월 8일에는 이겸제(李謙濟)가 인솔한 친위대 3개 중대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고 흩어졌으나 다시 모여 부대가 정비되었다. 그 뒤 포천·영평·양광 등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또 일부 병력은 그 뒤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강릉에 이르렀고 경기도 여주·이천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신우균(申羽均)·김구현(金龜鉉)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전략 전술 및 무기의 열세로 점차 전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문제도 곤란해져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와 협상하였으나 실패하자 2월 17일 부득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부대로 이적하였고 부대는 종형 진응(晉應)이 지휘하였다. 진응 다음에는 그의 아우 경응(景應)이 대장에 추대되어 지휘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소응 [李昭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백록장군 14대 종손인 한희민님이 운영하는 강촌설렁탕.불고기 식당이다.뒷편은 주거용 오피스텔을 지었고 현재 분양중이다.
오피스텔은 부경부동산으로 연락하면 된다.010-566-5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