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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가이야기
범준스님
2004년 출가.
2010년~2018년 미얀마, 프랑스, 태국 등 명상센터에서 수행.
현, 동국대학교 미래융합교육원 플럼빌리지 + 자비명상 강사
2004년 9월의 어느 날, 익산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자명사’ 간판이 보였다. 무엇에 이끌리듯 버스에서 내려 간판이 있는 곳으로부터 자명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늦여름 오후 시골의 푸르른 논밭 사잇길을 지나고 드문드문 있는 마을 농가를 지나니 언덕길이 나왔다. 언덕 초입에 있는 자명사 표지석을 확인하고는 오직 절에 가보려는 일념으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자 다시 평평한 길이 나왔고 멀리 왼쪽 산 아래에 사찰 기와가 보였다. 길을 걸어가다 중간쯤부터 연꽃의 향기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길 왼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연못 가운데 백련이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연못을 끼고 왼쪽 오르막길을 올라 사찰 앞마당에 들어섰다. 작고 하얀 돌들이 바닥에 깔린 앞마당에는 돌빛과 같이 색깔이 바랜 먹물 옷을 입고 있는 두 비구니 스님이 풀을 뽑고 계셨다. 이것이 은사스님과 나와의 첫 만남이다. 스무살짜리 대학생이었던 내 눈에 비친 그 장면은 참으로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으로 기억되어 있다. 아마도 전생의 인연이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모양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대학생이었던 내가 절 마당에 들어서자 은사스님의 도반스님은 “쟤 중 되러 왔다. 중 되러 왔어.”라고 은사스님께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눈에 보자마자 미래에 출가할 것을 알아보신 그 스님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사실 그때 당시는 출가하려고 절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불교가 좋았고, 절이 좋았다. 부산에 있는 가족을 떠나 먼 타지인 익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정신적인 방황을 겪고 있었다.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우울감과 공허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당시 유일한 낙이 불교 공부와 주변 사찰 순례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절 간판만 보이면 내려서 찾아갔다. 자명사도 그러던 와중에 인연이 된 것이었다.
“학생, 차 한잔 하고 가요.”
자명사 주지 소임을 살고 계시던 은사스님은 친절하게 차를 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주로 수행자로서 선방에서 10년간 정진한 이야기, 또 해외에 나가 명상센터에서 수행을 하면서 만행 다니셨던 이야기들이었다. 중노릇만 잘하면 자신이 발원한 대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은사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출가 생활이 생각보다 흥미롭고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다 마시자 스님은 저녁 공양도 하고 가라며 나를 붙잡으셨다. 한창 배고플 나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명사 아래 연못에서 직접 따신 연밥을 갈아서 손수 부침개를 해주셨는데 후라이팬에 천천히 부치셔서 그런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연밥 부침개를 다 먹자 연잎을 잘게 잘라서 밀가루에 담가 부친 부침개로 마무리하였다. 둘 다 생전 처음 먹어본 맛이었다.
저녁 공양이 끝나자 스님과 함께 법당으로 올라가 예불을 하고, 백팔배를 했다. 법당은 아담했지만 신라 천년고찰의 터 그대로였다. 방황하던 마음이 잠잠해지고 경건해졌다. 은사스님은 절에 있던 과자 두 박스를 주시며, 다음에도 또 오라고 하셨다. 오랜만에 경험한 행복하고 충만한 하루였다.
그 이후로 나는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마다 자명사를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구멍이 숭숭 난 듯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이 신기하게도 절에 가면 편안해졌다.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저녁 공양을 하고, 저녁예불과 백팔배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 주말 일과였다. 스님께서는 초발심자경문 중 원효대사께서 쓰신 발심수행장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
“부제불제불이 장엄적멸궁은 어다겁해에 사욕고행이요.
(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중생중생이 윤회화택문은 어무량세에 탐욕불사니라.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慾不捨)”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장엄하신 것은 수없이 많은 겁의 바다에서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하신 까닭이요. 모든 중생들이 불타는 집 속을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해석해주시는데 어찌나 신심이 나던지 아직까지도 이 글귀를 마음속에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다.
하루는 스님께서 불교 서적 중에 한경혜씨가 쓴 ‘오체투지’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빌려주셨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한경혜씨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루도 빠짐없이 천배를 삼십년간 해왔다. 그중에 만배 백일기도를 세 번 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만배 백일기도를 하려면 하루 서너 시간 자는 것 빼고는 절만 해야지 가능하다. 정말 인간의 정신력으로 육체를 극복하는 일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만배 백일기도로 인해 한경혜씨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구경각을 체험하게 된다. 절수행만으로 구경각, 무아삼매를 체험하다니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나는 아직 겨우 백팔배도 헉헉거리면서 하는 단계에 불과했는데 책을 보고 자극을 받아 천배 기도에 도전했다. 천배 기도를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절을 하고 학교 수업에 가야 했는데 근처 법당을 찾기가 멀어, 기숙사 침대에서 절을 했다. 그렇게 삼일 동안 천배를 했는데, 생전 처음 해보는 도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팔배도 잘 못하는 사람이 천배라니 당시로서는 꽤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 천배 기도를 하고 학교 수업을 들으러 이 건물 저 건물을 이동하는데 다리가 계속 후들거렸다. 그래도 삼일 동안 삼천배를 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전화로 은사스님께 말씀드리니 깜짝 놀라시며 처음부터 무리하게 기도를 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백팔배부터 꾸준히 기도를 한 다음에 점차 늘려가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그래도 삼일 천배기도가 업장 소멸에 도움을 주었나보다. 기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가를 하게 되도록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으니 말이다.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은 속세와의 인연이 짧고, 구도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 고가 많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사춘기를 맞기 전까지 해맑고 총명했던 내게 본격적으로 고가 따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부모님께서 조금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그때부터 집안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마도 그 집의 풍수라던지 에너지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 살면서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고. 힘들었던 기억만 잔뜩 남아있다. 이사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두천에 사시던 외삼촌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는데, 외숙모가 재산을 다 빼돌려서 도망간 후였다. 치료받을 돈이 없으니 이모네와 우리 가족이 반반씩 병원비를 부담해야만 했다. 이미 무리한 대출금 갚기도 어려운 형편에 설상가상이 되자 부모님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당시 부산항에서 크레인 기술자로 일하고 계셨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과로로 쓰러져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는 임파선 결핵에 걸려서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가족들이 이렇게 고통받는 상황에서 고등학생이었던 난 새벽부터 학교에 등교 해서 밤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저질 체력인데 몸이 적응을 못해서 알레르기 비염에 빈혈을 달고 살았다. 왜 안 좋은 일들은 한꺼번에 오는 것일까. 철없는 고등학생이 겪기에는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아팠다. 그때부터 난 가슴을 차단시켜 차라리 느끼지 않는 것을 선택해왔는지도 모른다. 가슴과의 연결을 차단하고, 세상을 느끼는 것을 거부하자 불현듯 우울증, 불안장애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이십 년 동안의 수행의 길에서 끊임없이 나를 경책하는 역행보살이 될 줄은 말이다.
당시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는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읽어보라고 이 책을 사다 주셨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던 때라 가끔씩은 주체하기 어려운 화가 올라왔다. 화의 에너지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억누르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호흡이 어려워졌다. 그러던 찰나에 이 책을 만나서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화의 에너지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제시한 틱낫한 스님의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은 나에게 한마디로 큰 충격이었다.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내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서 살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자수성가로 여러 고생을 하시며 살아오신 부모님께서는 항상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범대에 들어가렴. 임용고시를 쳐서 교사가 되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라고 하시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강조해오셨다. 그래서 그때까지 나에게 삶이란 미래의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은 내 인생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행위와 같이 무언가 다른 대상에 집중한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나의 몸과 마음에 집중해본 적은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오로지 씹는 데 집중하고, 걸을 때는 발걸음에 집중하고, 앉아있을 때는 호흡에 집중하라.” 아! 이러한 삶의 방식이 있었구나. 정말 단순하지만 진리를 담고 있는 이 방식을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듯 기뻐서 날아갈 듯했다. 하지만 실천은 녹록치 않았다. 호흡에도 발걸음에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망상 속에서 살아오다가 하루아침에 수행한다고 잘될 리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평상시 좋지 못한 자세로 인해 척추측만이 있었고 호흡의 경락이 많이 막힌 상태였다. 경락이 막히고 신경이 눌리면 몸의 감각이 떨어진다.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은 나이에 호흡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수행하기 어려운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정상인들의 몸만 되었어도 지금쯤 도인이 되었을텐데... 왜 나는 최고난위도의 몸을 가지고 수행을 해야만 하는가.’하고 말이다. 하여간 이러한 역행보살들 덕분에 고등학생이라는 나이에 위빠사나 수행을 알게 되었고, 수행하는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틱낫한 스님은 이때부터 나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난 지금도 틱낫한 스님 덕분에 출가했다.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실질적으로 출가를 하게 만드신 분은 은사스님이시지만, 그 전부터 수행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신 분은 틱낫한 스님이셨다. 이러한 인연으로 훗날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 노래를 부르며 포교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천배 삼일 기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도저히 불교공부를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범대 국어교육 공부는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동국대 불교학과로 전과하고 싶었다. 스님께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고 의논하기 위해 자명사를 찾아갔다.
“차라리 출가해라. 출가하면 동국대 불교학과 공부도 무료로 다 시켜준다.”
“스님, 지금 당장 출가할 마음은 없습니다. 동국대 불교학과 공부를 우선 해보고, 직장도 다녀보고 이십대 후반쯤에 출가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출가할 거면 빨리하는 것이 낫다. 우선 절에서 백일기도 하면서 생각해 보아라.”
이렇게 해서 급속도로 출가의 인연이 앞당겨졌다.
우선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주말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절대 허락하시지 않을 것을 말이다. 역시 출가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노발대발하셨다.
“절에서 백일기도하면서 출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니가 뭐가 부족해서 출가를 하려고 하니?”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지금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수행자로 살면서 마음공부를 하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주일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자.”
나의 고집에 부모님께서는 지금 말로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셨는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하셨다. 사실상 부모님께서는 일주일 동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내 마음을 돌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행복은 부모님께서 주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마음공부와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익산에 올라와서 은사스님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스님께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길 제안하셨다.
“네가 일주일 기다려서 부모님이 계속 반대하시면 출가 안 할거냐? 어차피 일주일이란 시간은 의미가 없다. 내일 모레 당장 대구에 있는 암자로 가거라. 거기 마침 너와 함께 기도할 행자님이 왔다고 한다. 너보다 일곱 살 많은 언니란다.”
생각해보니 스님의 말씀이 맞았다. 나의 부모님은 절대로 출가에 찬성하실 분들이 아니었다. 내 길을 가려면 부모님 뜻을 거스리는 것은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리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이대로 살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부모님께 그리고 동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부치고, 기숙사 짐을 정리해서 자명사로 왔다. 편지가 도착했을 쯤에는 이미 대구의 산 속 깊은 암자에서 기도를 하고 있겠지.
벌써 그로부터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출가로 인한 가족들의 마음의 상처도 다 치유되어 언제든지 편안하게 연락할 수 있는 관계로 지내고 있다. 스무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시절 인연이 도래하자 급속도로 하게 된 출가. 지금도 그때로 돌아가라면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몸이 건강했다면,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없었다면 고귀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 때 묻지 않고 맑게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이생에 감사하며, 장애가 말끔히 사라져 수행이 진보하는 그날까지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 <불교와 문학> 2023년 가을호 中
첫댓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성불하세요._()_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all my heart that the holy and merciful Buddha's skin and mercy light will be reflected.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