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누가복음 15 : 20-24
제목: 상식을 뛰어 넘는 사랑으로
일시: 2015. 5. 10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주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세리와 죄인들과 가까이 지내셨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러 주님께 가까이 왔을 때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드셨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괜한 시기와 질투를 부리고 수군거린다. 유대 랍비가 불경하게 그들과 말을 섞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주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3가지 비유를 든다. 모두 잃은 것을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의 비유이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잃은 둘째 아들의 비유이다.
II.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스토리에서 둘째 아들은 어떤 녀석인가? 한마디로 싹수가 노란 친구이다. 그가 무슨 일을 계획했고 실행했는가? 누가복음 15장 12-13절 짧은 두절에 그가 누군지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아비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하면서 유산을 달라고 한다. “유산”이란 남은 것을 주는 것이다. 엄격히 아버지가 다 쓰고 “아들아 줄 것이 없구나”해도 할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미리 땡겨서 달라고 한다. 아직 다 쓰지도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무슨 일이 있는가?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이미 아들은 그 전부터 자기 생각이 있었고 계획이 있었다. 몇일 안되어 자기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아비가 피곤하게 자기를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생각과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먼나라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다 탕진해 버린 것이다. 아직 그만한 그릇도 되지 않은 아들이 그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 허비만 할 뿐이었다.
마침내 이 둘째 아들의 인생에 반전이 오게 된다. 그가 정신이 번쩍 들게 되는 때는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때이다. “다 없앤 후” (14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뿐 아니라, 주변 상황도 전혀 그를 돕고 있지 않다. “...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재산을 다 탕진해도 경제가 괜찮으면 인심이라도 좋을텐데 흉년까지 드니 “비로소” 신경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사람은 부족에 처해보고 척박한 현실을 경험할 때 감각이 살아나고 철이 든다. 그렇게 말리던 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친구들이 있고 어디서나 그 부잣집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던 고향집이 생각이 난다.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가 생각이 난다. 내가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비로소”는 매력적인 단어이다. 냉정한 사회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봐야 비로소 “아버지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우리를 양육하셨을까”를 알게 되는 것이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어봐야 비로소 집에서 부모님이 해 주시는 음식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 가득 찬 음식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좋을 때는 알랑거리던 친구들이 형편이 나빠지고 어려워지자 180도 돌아서 배반하고 떠나봐야 비로소 나에게 진정한 충고를 하시고 싫은 말도 하시는 부모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부모님을 안다고 한다. 알기는 알지만 다는 아니다. 우리가 “아빠, 엄마 나도 다 알아요”라고 말을 해도 부모님들은 우리가 다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알기는 뭐를 아는가! 그래서 종종 우리의 부모님들은 “너도 시집가서 꼭 니 같은 자식 하나 놔 봐라”고 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도 고생해 봐라가 아니라, “이 철없는 것아 어찌 부모의 마음을 그리 모르느냐! 너도 내 입장이 되어 보면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메시지이다. 지금은 자녀의 입장이지만 부모의 입장이 되면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생겨보라. 그때야 비로소 밤낮 못 가리는 아기 때문에 서로 교대로 나를 보셨을 부모님이 생각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호출을 하거나 공부가 떨어지느니 친구들과 잘 못 사귀느니 이런 소리를 들어볼 때, 나의 학교생활에 마음 졸이셨을 부모님이 보인다. 후에 결혼을 하게 된다. 어찌 그 결혼식장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 결혼 허락해서 감사하고 결혼비용 많이 들었을텐데 감사하네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 부모님을 아는가? 내 결혼식이 아니요 내 아이들을 결혼시키는 그 예식장 안에서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아이의 팔을 잡고 전날 예행연습을 한 대로 결혼행진을 해보고 당일 사위에게 딸을 Give away 할 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목사님이 주례사를 하고 친구들이 축가를 부르고 친구들은 들러리로 와서 좋다고 신부가 예쁘니 부케는 누가 받아야 된다느니 재잘거리고 가족들 사진을 찍어봐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폐백을 드릴 때 신랑가족들은 새 가족 왔다고 절들을 받는데, 신부가족들은 다 퇴장하고 딸램이는 사위와 신혼여행 가방은 챙기고 사라져 봐야 집에 돌아와 늘 쓰던 딸의 방이 텅 비었다는 것을 볼 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III. 이런 몹쓸 아들에 대해 아비는 어떠한가? 여전히 아들 사랑하는 바보 아빠이다. 이 안타까운 아비의 모습을 보라.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후부터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환영할 게 뭐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마침내 아들이 돌아오자 쥐염나무 열매 냄새와 돼지냄새, 씻지도 못해 더럽게 그지없을 이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 아비의 사랑은 위대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서 종들에게 명령했을 것이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한다.
야단을 맞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뭐 잘한 거 있다고 그와 같은 융숭한 대접을 받는가!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은 잘 생겨도 아들 못생겨도 아들, 성공해도 아들 실패해도 아들, 끊을 수 없는 부자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돌아올 때는 사실 어떠한 결단을 하고 오는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각오했다. 생각이 그래도 어디 그렇게 되는가! 그래서 아비와 아들의 이 관계는 웬수의 관계이다. 만일 고용된 품꾼이면 거래를 끝내고 관계를 갖지 않으면 된다. 보기 싫으면 더 이상 안보면 된다. 그러나 아비에게 있어 아들은 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웬수덩어리 아닌가! 웬수는 뭐가 웬수인가? 끊을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자녀는 자녀이기에 평생 웬수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잘나면 잘 봐주고 못나면 내쳐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봐 줄 수 밖에 없고 싫으나 좋으나 품을 수 밖에 없는 웬수이다.
이 몹쓸 아들에 대한 아비의 사랑은 상식의 선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잘못 했으면 혼나고 허랑방탕했으면 응당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져야지, 자기 생각과 고집대로 했으니 자신이 해결해야지”라고 생각이 상식이다. 하지만 아비는 상식을 깨뜨렸다. 그 사랑은 일반 상식을 깨뜨리는 아비의 사랑이다. 놀라운 사랑이다. 그러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인 것이다.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 부모님이다. 아비는 잘하고 못하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도 기억치 않고 재산을 다 어떻게 썼느냐도 묻지 않으시고 너 이 꼴이 뭐냐고 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아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아비의 사랑이고 아비의 관점이다.
아버님이 지난 달 방문하셨을 때가 4월 첫 주 고난주간이었다. 목요일 도착하셨는데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금요일 새벽말씀을 전하셨다. 새벽에 함께 올라가면서 혼잣 말씀으로 하시는 한마디가 아직도 마음에 무척 남는다. “고생 많이 했어” 그리고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이 몇 번을 말씀하신다. 고생 많이 했어... 제가 들으라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입으로 자연스럽게 나왔을 뿐이다. 그것은 권혁봉목사님이 권순태목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아비가 아들에게 대한 애정과 마음의 표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칭찬과 격려와 부러움등으로 멋지다 훌륭하다... 등으로 말할 수 있지만 아버님은 아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였다. 어제도 엘리베이터 고장 나서 고생하지 않느냐고 걱정하신다.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의 아비가 하나님을 의미하는 줄 잘 알고 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이 아비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를 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의 공로도 안보시고 오직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Born-again 되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는 것이다. 세상의 논리가 여기에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말하는 계약과 거래의 balance 가 깨어지는 곳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체험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이 세상 속에서 균형을 깨뜨리곤 한다. 5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10리를 가라고 하신다.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신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갖기 위해서는 버리라고 하신다.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으뜸이 되기 위해서 낮아지라고 하신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고 우리 생각의 균형을 깨뜨릴 때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거기에는 파워가 발생한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안해도 되는데 희생하고 낮아져보라. 상식을 뛰어넘고 세상이 생각하는 발란스를 깨어보라.
균형을 깨뜨리니 아주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Give and Take라는 포뮬라에 익숙해져 있다. 기부 앤 테이크하려고 한다. 주고 나서는 늘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균형을 깨라. 그렇게 하는 이가 우리의 부모님이다. 그들은 그저 주고 마는 것이다. 균형을 깨보라.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V.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이날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Vater im Himmel을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상식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신다. 그분들은 우리가 어떠하든 give and take 사랑이 아니라 발란스를 깨어지는 사랑을 하신다. 평생 웬수인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과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의 파워가 우리의 주변에 퍼져 나가기를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