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세계신문-한중사랑교회 공동기획 '코리안드림 20년' 본 기획특집은 동포세계신문과 한중사랑교회(서영희 목사)가 공동기획으로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생활을 열심히 하여 코리안드림을 이룬 중국동포를 발굴하여 소개한다.
한국에 온 중국동포들의 삶을 들어본다[제1화]
흑룡강성 오상에서 온 <이정진-정연옥 부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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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2일 한중사랑교회 쉼터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이정진씨와 정연옥 부부가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내 아내는 생활력 강한 '억척' 조선족여성이죠”
10년간 건설현장에서 보온일 해온 잉꼬 부부
여행 한번 못가보고 일만 해
이정진(57세)씨는 흑룡강성 오상 출신이고, 정연옥(56세)씨는 길림성 길림 출신으로 22살 나이에 이정진씨와 1978년 중매결혼하여 오상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정진씨는 트럭 운전을 하였고 농사는 주로 정연옥씨가 맡아서 했다. 슬하에는 딸(현재 34, 한국 거주), 아들(현재 31, 중국 거주)이 있다.
부부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수교전 1991년. 당시 정연옥씨는 한국에 가자고 주장했고, 이정진씨는 그냥 이대로 살자며 말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만해도 한국에 대해서 조선족동포들이 갖는 인식은 '자본주의 나라로 사람 잡아먹는 곳' 쯤으로 생각들 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이 아니면 러시아에라도 가서 장사를 해야 가정이 핀다며 주장한 아내 정연옥씨는 해외진출파였다면 딴세상에 가서 뭘 한다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이정진씨는 안주파였다.
결국 아내의 말을 듣고 1991년 한국에 같이 나왔다. 그래도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저의 부모님 고향이 경상북도 안동이었다는 점도 한국을 선택하게 되었고, 마침 개방이 되었죠. 부딪혀 보자, 그래도 말이 통하고 우리 민족인데 한국이 낫지 않겠냐” 정씨의 말이다.
마침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 수교가 됐으니 다시 비자를 받고 들어오라는 한국정부의 말을 믿고 부부는 1년만에 중국으로 귀국했지만 재입국길이 열리지 않았다.
1년간의 짧은 한국생활이었지만, 한국이 중국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게 된 정연옥씨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야겠다 다짐했다. 1997년 마침내 꺼내든 카드는 밀항이었다. 이미 밀항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비용은 중국돈 8만원. 적지 않은 비용이다. 하지만 남편도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한국 가기 위해서는 밀항이라도…
아내는 짐을 싸 할빈역으로 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중국공안이 어떻게 알고 정씨를 체포해 감옥에 넣은 것이다. 누군가의 신고로 정씨가 밀항으로 한국에 간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정씨는 브로커와 공안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 생각했다. 11일동안 할빈 감옥에 있으면서 퉁퉁부른 옥수수강냉이로 끼니를 이어야 하는 옥고를 치뤘다. 억울하였고, 들어간 돈을 돌려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변호사까지 동원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보니 남는 것은 빚뿐이었다. 중국돈 10만원, 한국돈으로 치면 2천만원으로 당시 조선족동포에게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고 2년후 1999년 마침내 정연옥씨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중국돈 5만원이 들어갔다. 정상적으로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브로커를 통해 비자를 사는 격이었다.
산업연수생으로 정씨를 초청해 준 곳은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방직공장이었다. 한국에 왔다는 기쁨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월급은 쥐꼬리 만하고 일은 고댔다. 함께 온 동료들은 야밤에 어디론가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그래도 정연옥씨는 인내했다.
“그때 정말 한국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죠, 그러나 연수생활은 정말 힘들었어요. 밤이면 옥상에 올라가 기도하고, 집생각도 나고 식구들 자식들 생각도 나고, 시어머니가 해준 장국도 생각나고, 하룻밤을 눈물 없이 보낸 날이 없었어요. 가는 날부터 감기에 걸려 몸도 아팠구요.”
도전히 연수생활을 하면서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양산 방직공장 생활 6개월만에 야밤도주했다.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수지 건설현장 함바식당에서 일을 하였다. 한국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함바식당에서 1년, 그 다음 서울 용산의 여관방에서 3개월 일을 하였다. 2001년 남편 이정진씨 역시 중국돈 7만원을 들여 공무비자로 한국에 왔다.
"남편과 함께 하니 좋아요"
한국 오기 전 정씨가 “한국에 가더라도 나혼자 가지 않는다. 우리 같이 가야 한다”고 남편에게 말한 약속은 지켜졌다. 이후 부부는 가리봉동 쪽방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4만원, 아주 작은 방이다. 그래도 헤어졌다 3년만에 만난 부부였다.
가리봉 쪽방생활 3개월만에 일산 장항동으로 갔다.
“일산에는 한국인 최상호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 장로님은 94년도에 중국에 온 적 있어요, 그때 안내자 역할을 잘 해주어 남편하고는 형님 아우 하는 관계로 친분을 쌓았지요. 우리가 한국에 와있다고 하니까 장로님 집에 큰 콘테이너 두 개를 이어 만든 숙소가 있는데 이곳을 무료로 사용해도 좋다고 하시더군요.”
일산에서 1년 생활 후 일자리를 찾는게 여의치 않아 서울로 왔다. 2003년부터는 구로동에 1300만원 전세로 옥탑방을 얻어 2007년까지 생활 하고, 딸이 들어와 방 두 칸짜리로 이사했다. 지난 7월 20일엔 구로동 2층방 전세 3천300만원을 주고 이사했다. 부부가 한국 온지 10년만에 이룬 전세방 생활이다.
정연옥 이정진 부부는 건설현장에서 보온일을 10년간 꾸준히 해와 이분야 전문가팀으로 소문이 나 있다. 보온일은 하는데 어려움이 없냐는 질문에 정씨는 “저는 원래 고소공포증이 심했어요, 높은데만 올라가도 머리가 팽 돌고 어지럼증이 생겼죠. 그런데 이를 악물고 했죠.”
지금은 병점 오산 세마대 10층 빌딩에서 보온 처리 작업을 한다. 이보다도 더 높은 건물에 올라가 보온 작업을 하였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 하니 좋아요.”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남편은 보온 자재를 옮겨주는 일을 주로 하고, 정연진씨는 보온재료를 감싸주는 일을 하는데 어느 정도 손재주가 있는지 보는 이마다 잘한다는 칭찬이 뒤따른다고 한다.
“보온일에는 부부팀이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중에서도 우리 부부팀이 잘한다는 입소문이 퍼져 있지요.”
건설현장에서 부부가 보온일을 10년 가까이 했다면 상당히 돈을 벌었을 것같다. 어떨까?
그래도 수중에 모아둔 돈이 없다는 것이 이 부부의 말이다. 부부가 한국에 오기 위해 진 빚을 갚고, 자녀 뒷바라지를 하고나니 모아둔 돈이 없다. 그래도 두 부부가 한달에 버는 수익은 약 500만원 좌우.
지난 10년간 한국생활을 하면서 부부는 한번도 여행을 못가보고,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 적도 없었다고 한다. 오로지 새벽 5시에 일어나 일터에 나가 저녁늦게 들어오는 일상생활에 묻혀 있다. 하루도 쉬지 않는다.
"일요일엔 꼭 교회 가요"
그래도 이 부부에게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다. 일요일만큼은 한중사랑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정진씨는 의료봉사 안내를, 정연옥씨는 지역장과 교구장을 맡고 있다.
정연옥씨는 2006년 2월 불법체류 신분으로 구로시장을 남편과 함께 가다가 법무부단속반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고, 2007년 2월 조카 초청으로 방문취업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경험도 있었다. 이렇게 정연옥씨는 한국에 오기 위해서, 또 한국에 와서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숱한 어려운 일을 겪었다. 앞으로 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부부는 “신앙의 힘으로 견디고 이겨내며 생활해왔어요. 신앙이 없었다면 상당히 쫓기고 힘들었겠죠.”라며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에 온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에 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한국에 대해 고맙지요, 제 남편은 한국가면 큰일 나는 줄로 알던 양반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 온 것을 고맙게 생각해요.” 정연옥씨의 말이다.
구술정리=김경록 기자
@동포세계신문 제275호 2012년 8월 21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