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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보배
고후4:7~11 / 최일환 목사
♥ 고후4: 7~11 ]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강의할 때마다 귀가 따갑도록 강조하셨던 두 가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목사는 세 가지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책방, 둘째는 골방, 셋째는 사랑방입니다. 책방은 서재를 말하고, 골방은 기도 방을 말하고, 사랑방은 부부화합 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갖추지 못한 목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목사가 아니라 영혼을 죽이는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30년이 다되게 목회를 했는데 그 교수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목사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비단 목회자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늘 자신이 누구인가를 성찰하며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사람이 되어야 올바른 성도, 올바른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이것을 제대로 모르면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잘못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기에 때로 교만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절망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굽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평가 받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내 이력이나 경력을 통해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관점에 따라 다르고 누가 평가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에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거울인 성경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은 목자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포도나무라 하시고 우리는 그에 붙어 있는 가지라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렁이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보면 우리 성도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질그릇이고 그 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표현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서신 초반에 자신이 사도권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임을 강조하고 우리는 그저 질그릇에 불과 한 존재라고 교훈합니다. 특히 자신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 강조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는 복된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왜 우리 성도가 질그릇인가요?
1) 연약하다는 뜻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 졌기에 깨어지기 쉽습니다. 한번 놓치면 깨어집니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잘 깨어지지 않게도 만들 수 있으나 옛날 질그릇은 한번 부딪치거나 떨어지면 박살이 납니다. 그래서 사온지 얼마 안 된 그릇도 버릴 때가 많습니다. 여기 물컵도 도자기입니다.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번 놓아볼까요? 깨어집니다. 우리 성도들도 깨어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육체의 힘이 매우 강한 것 같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에 쩔쩔 매고 넘어집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 같으나 정말 허약합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과 의지가 대단한 것 같으나 그러나 쉽게 깨어집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2) 볼품이 없다는 뜻입니다. 질그릇은 흔한 그릇입니다. 모양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볼품이 없고 그러기에 가치가 없습니다. 요즘은 흙으로 도자기 그릇도 예쁘게 만들고 하지만 옛날 질그릇은 투박하고 볼품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면 너무 볼품이 없는 그릇입니다.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어 화장하고 성형수술하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실체는 어떤가요? 쓸 만한가요? 아름다운가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나요? 그래도 우리는 흙입니다. 머잖아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외모에 신경 쓰지 마세요. 외모보다 속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비록 질그릇이지만 우리 속에 보배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3)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질그릇처럼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이래 뵈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아멘? 못생겼다고 힘들어 하지 마세요. 키가 작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큰일 한 사람들은 다 작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만드셨기에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도 하나님의 빚으신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비록 외모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기에 무가치하게 보이나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세요. /이래 뵈도/ 하나님 작품이랍니다./ 보세요. 천연기념물은 많아서 천연기념물인가요? 희귀해서 천연기념물인가요? 희귀해서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사람 천지입니다. 그래서 흔하게 생각하고 무가치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똑같은 것 같으나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성격도 생김새도, 능력도 다 다릅니다.
이미 천국에 간 제 친구 목사 이종돈 목사가 일란성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암으로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 문상 온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이는 기절초풍했답니다. 왜냐고요? 소천 했다고 해서 문상을 왔는데 조객들을 맞이하는 상주 석에 죽은 목사가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똑같이 생긴 형입니다. 일란성 쌍둥이라 똑같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러나 사모님에게 물어보니 다르답니다. 성격도 좀 다르고 여러 면에서 다르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세상에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니 매우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존재를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라는 존재는 천연기념물입니다. 비록 질그릇이지만 하나님 작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왜 복음이 보배인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이라 했는데 왜 하필 ‘그릇’일까요? 그릇은 속에 담긴 것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불려 집니다. 술이 담겨있으면 술병, 물이 담겨 있으면 물 병,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담긴 것에 따라 이름도 달라지고 가치도 달라집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질그릇이지만 우리 속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보배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에게 그 엄청난 보배가 담겨 있으니 우리는 세상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배가 뭘까요?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곧 진리의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이나 그러나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 진리의 복음이 담겨 있기에 고귀한 질그릇인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우리 심령 속에 담겨져 있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능력도 소유한 자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성도는 겉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 한사람 심령을 보아야 합니다.
왜 예수 복음이 보배일까요?
1)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다시 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심히 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심히 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9절 이하를 보세요. 우리가 누구냐?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런 능력이 어디서 오느냐?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나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나 하나님이 복음을 주신 후 우리에게는 엄청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보배 중에 보배인 것입니다.
2)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는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이 보배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1947년 2월에 사해 서쪽 여리고 남방 1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동굴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양치기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절벽에 위치한 자연 동굴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 소년은 두려움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돌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이 굴에서 십여 개의 옹기단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속에는 양피지에 글이 쓰인 두루 마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해사본 성경입니다.
주전2세기경에 베껴진 성경사본으로서 이사야서, 시편 등이 들어 있는 두루마리였습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성경연구 사료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처음 발견한 목동 소년은 고물상에게 두루 마리 한개 당 4만 원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도 횡재를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는 이 보물을 고물상으로부터 한 개에 25만 달러, 약 3억 원씩 주고 사 들였습니다. 그 질그릇 항아리는 값싼 토기였지만 그 속에 보물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질그릇이지만 우리의 가치는 겉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담겨져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배인 예수님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죠? 예수님이 어떤 가치를 가진 보배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보배를 담은 자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왜요, 예수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3)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이 보배인가요? 이 복음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다 변하게 됩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변한다면 성경은 후편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인 복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가치가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변하면 가치가 없습니다.
왜 금값이 비쌉니까? 금이 세상에 돌멩이처럼 많으면 아마도 금을 아무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귀하다고 다 귀한 것은 아닙니다. 희귀하기도 해야 하지만 세월이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금, 다이아몬드, 그리고 보석들은 희귀하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보배인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3. 왜 복음을 갖고 있으면 공격을 받나요?
왜 세상은 우리 기독교를 공경하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세상이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복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거짓말로 여기는 세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무지로 인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편이 아닙니다. 그러니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결국 교회를 미워하고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요15:18~19절을 보세요.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이 자기편이 아니고 우리가 자기편이 아니기에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세상의 죄악을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빛입니다. 그러기에 빛이 세상에 오면 어두움 세력의 정체가 들어납니다. 그러니 숨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숨고 도망을 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정죄하고 대적합니다. 교묘한 전략으로 정죄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복음을 공격합니다. 잘한 점이나 덕이 되는 일은 들어내지 않고 조그마한 허물과 실수가 있으면 들추어내고 공격합니다. 결국 사단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과 9절을 보세요.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 성도는 복음을 갖고 있으면 공격을 당합니다. 그래서 순교하기도 합니다. 이슬람국가 IS에 의해 죽은 일본인도 기독교인이고 지난번 이집트 콥트교 순교한 20여명 성도들도 기독교인입니다. 복음을 담고 있으면 이처럼 순교도 당하고 고난도 겪고 어려움도 당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는 사탄의 공격에 완전히 싸이지를 아니합니다. 성도는 신앙 때문에 때로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고 때로 곤고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더디다고 느낄 때 답답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속단은 금물입니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일로 결과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복으로 끝나는 경우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망해서 이제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더 좋은 사업장을 주시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내가 병을 얻어 절망했는데 그 병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오히려 신앙이 눈 뜨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역전 시키시는데 명수입니다. 모세를 보세요. 나일 강 하수에서 죽었다 싶었는데 공주의 아들이 되었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됐다 싶은데 살인자로 쫓기죠? 광야에서 인생이 끝났다 싶었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죠? 요셉도 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노예로 끌려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길이 축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길에서 속단은 금물입니다. 성도는 세상이 아무리 공격을 해도 결국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 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세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버림받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자녀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회사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답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혹 넘어질지언정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Knock down 과 Knock out 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Knock down 되었다는 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Down당했다 라는 말은 다시 일어나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Knock out은 완전히 쓰러진 것입니다. 더 이상 일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에게 Knock down은 있어도 Knock out은 없습니다. 왜죠? 우리는 결코 완전히 쓰러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인은 “망했다”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담겨진 예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권위를 부여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속에 보배가 있음을 믿습니까? 정말 우리 속에 금이나 보석 보배가 있다면 우리는 힘이 날 것입니다. 또 돈을 십 만원씩만 담아서 나누어 준다면 피곤한 줄 모르고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소유하였는데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겉모양으로는 질그릇이나 우리 속에 담겨진 보배는 세상 그 무엇보다 존귀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예수 자랑하며 살게 되고 복음 전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살게 될 것입니다.
11절을 보세요.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죽음에 넘겨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전파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복을 주셨고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가좋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