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15년 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조카 4명과 보았는데 조세 파디야의 <로보캅>을 선택한 이유는 마침 극장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맞았고 <12세 관람가>였기 때문이다. 그 극장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남자가 사랑할 때>를 아깝게 놓쳤다. 예전에 폴 버호벤의 <로보캅>을 본 어렴풋한 기억이 있긴 하다. 폴 버호벤은 내가 약간은 좋아하는 감독이다.
총소리가 앞에서도 들리고 뒤에서도 들리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15년 전에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일까?
화질도 좋아지고 의자도 좋아진 것 같다. 15년 전에도 가슴 성형을 예쁘게 해준다는 광고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자막을 안 보았는데 내 영어 듣기 실력은 미국 중학생에 훨씬 못 미친다. 중학생인 한 조카에 따르면 골리앗처럼 생기고 질럿의 말투로 말하는 로봇이 나온다. 그 로봇의 대사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이 때문에 영화를 오독한 부분이 있다면 굳이 지적해 주셔도 된다. 영화를 제대로 보고 이 글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질럿 이야기를 한 조카는 영화에서 힌디어, 페르시아어, 중국어를 들었다고 우겼는데 설마 그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맞다면 이야기해 주셔도 된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보았는데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적어도 좌파적인 영화를 싫어하지 않는 내 입맛에는 맞았다.
나는 거금을 들여서 만든 헐리우드 영화 중에서 이렇게 좌파적인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이 영화가 그런 면에서는 좀 특별하기 때문일까?
좌파적 선명성의 측면에서 이 영화를 뛰어넘는 헐리우드 영화를 알고 계신다면 굳이 공유해 주셔도 된다.
미국 지배 이데올로기도 많이 반성했다. 그들은 흑인을 노예로 부린 것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그들은 인디언(미국 원주민)을 학살한 것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성에 약간 부족한 면도 있는데 여전히 미국-베트남 전쟁과 미국-이라크 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데올로기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영화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재킷>이 기억난다. 하지만 이 영화를 헐리우드 영화로 분류하기에는 좀 그렇다.
로보캅이 처음 로보캅이 된 이후에 흥분해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로봇 공장이 갑자기 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베트남을 떠올리는 모자와 옷을 입은 농부들이 일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을 보고 <풀 메탈 재킷>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감독의 의도인가, 나의 오바인가?
어쨌든 이 영화에서는 “imperialism(형용사형이었나?)”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한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조카의 기억에 따르면 자막에는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두 조카의 기억력이 완벽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설마 번역할 때 난도질 당한 것일까?
아랍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로봇들이 진압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아랍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점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미국-이스라엘 동맹과 맞서 싸우는 아랍인들의 설움, 분노, 좌절이 막강한 미국 로봇들의 힘에 맞서는 그들에 투영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특히 칼 한 자루 들고 있는 어린아이를 로봇이 끝장내는 장면은 화염병 하나 들고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는 아랍 어린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바타>에서 막강한 지구인에게 설움을 당하는 외계인 종족은 인디언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로보캅>에서는 베트남,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면에서 <로보캅>이 <아바타>보다 약간 더 과격한 영화라고 볼 여지도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지적했듯이 미국 지배 이데올로기는 흑인과 인디언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했지만 여전히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이 일으킨 전쟁들에 대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작 <로보캅>을 만든 폴 버호벤의 <스타쉽 트루퍼스>를 보고도 베트남 전쟁을 떠올렸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외계인(?)이 동굴 속에 숨어서 지구인과 맞서 싸웠던 것 같다. 그리고 외계인이 “나는 두렵다”는 식의 말을 텔레파시로 남겼던 것 같다.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죽여버리는 로봇에게는 감정이 없다. 그래서 많은 상원의원들이 로봇이 미국 내의 악당들을 제압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반대한다.
미국은 늘 그래왔다. 자국민의 인권 보호에는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 부분도 많지만 그들에게 찍힌 외국인들에게는 아무 거리낌없이 핵폭탄, 네이팜탄, 고엽제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써 왔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가 사라지는 사회를 위해 싸운다고 이야기한다. 친절한 금자씨가 미국한테 “너나 잘하세요”라고 한 마디 하면서 빅엿을 날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외국에서 로봇이 치안을 담당하는 것”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미국 내에서 로봇이 치안을 담당하는 것”에는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자국에서는 나름대로 민주적이지만 외국에서는 제국주의적 정책을 거리낌 없이 쓰는 미국 정부에 대한 감독의 비판이라고 해석한다면 나의 오바인가?
이 영화에서 로봇의 목적은 치안 담당이라기보다는 자본 증식이다. 로봇 공장 사장은 그것을 위해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한다. 또는 조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통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물론 표현은 좀 달랐다) 페르시아어 이야기를 한 조카는 즉시 <네모바지 스폰지밥>에 나오는 집게 사장을 떠올렸다. 나 역시 그 만화가 노골적으로 자본가들을 조롱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조카의 연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한 전투 전문가는 로보캅을 Tin Man(깡통 사나이, 양철 나뭇꾼)이라고 놀린다. 그리고 빅터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래를 상당히 길게 들을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마법사의 속임수를 한 마리 개 토토가 커튼을 걷어버림으로써 폭로한다. 감독이 “내가 그 개가 되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번에도 오바한 것일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최강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한 방송인의 말이 나온다. 감독이 “일부심”, “병맛”과 같은 단어를 알 리가 없지만 그것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의미로 그 장면을 넣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적어도 이것은 나의 오바가 아니다.
이 장면은 파랑 스타킹 위에 빨강 빤쓰 입고 성조기를 자랑스럽게 들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조롱하는 슈퍼맨(리처드 도너였나?)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부자들은 왜 이런 체제 비판적인 영화에 그 많은 돈을 댔을까? 여기에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논리가 개입한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ragedy_of_the_commons
체제 비판 영화를 통해 돈을 벌어들인다면 그 이득은 영화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그를 통해 체제 비판 감성이 더 퍼진다면 자본가 계급 전체에게 손해가 된다. 이 때 지배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공유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적어도 지배 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다.
공유 목초지에서 자기가 키우는 가축이 실컷 먹도록 한다면 그 이득은 자신에게 돌아가는데 손해는 모든 마을 주민들이 분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망치는 영화의 손해는 모든 자본가들이 분담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가가 그런 영화에 투자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내 짐작대로 감독이 체제를 열심히 비판하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운동권 물을 먹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고 체제 비판 감성이나 이성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일까? 그냥 감독 혼자서 벽에 대고 외치는 꼴이 아닐까?
평범한 대중은 이 영화를 어떻게 소화할까?
<네모바지 스폰지밥>은 자본가를 조롱하고, 정신분석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담고 있고, 파업을 하는 장면도 나오고, 농민 봉기의 모티프도 나오고, 존 드벨로의 <토마토 공격대(Attack Of The Killer Tomatoes, 1978)>와 프리츠 랑의 <엠(M, 1931)>과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3, Mad Max: Beyond Thunderdome, 1985)>를 패러디한 장면이 나온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로보캅>을 같이 본 대학생 조카는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 스폰지밥은 유치한 애들 만화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그 조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했던 말에 동의할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유치하다고 생각할 만한 만화라고 말이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은 10 살이 안 된 아이들과 지식인만 좋아할 수 있는 만화인 것 같다. <로보캅>도 그런 영화가 아닐까? <트랜스포머>를 아주 좋아해서 유치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우기는 지식인들만 좋아하는 영화 말이다.
결국 <로보캅>을 좋아하는 대중은 내가 여기에서 썰을 푼 좌파적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로보캅>을 좋아하는 지식인은 대중이 관심이 없다는 점에 관심이 없고...
어쩌면 <로보캅>에 투자한 부자들은 사정이 이렇다고 믿기 때문에 공유지의 비극과는 상관 없이 안심하고 이 영화에 투자했는지도 모른다.
대중의 마음을 좌파 쪽으로 움직이기에는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과 같은 사실주의가 제격인 것 같다. 물론 <랜드 앤 프리덤>과 같은 옛날 이야기보다는 현재 이야기를 비판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으로 다루어야 더 큰 효과를 얻을 것 같다.
<로보캅>만큼 좌파적이면서도 현재의 문제를 사실주의적으로 다룬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미 만들어졌는데 나만 모르는 것일까?
만약 그런 영화가 나온다면 공유지의 비극 가설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또 한 명의 중학생 조카가 이야기했듯이 가족애도 다룬다. 또한 로보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공 지능 문제도 빠질 수 없다.
자유 의지 문제도 이야기한다. 절반은 로봇(또는 컴퓨터)인 로보캅은 전투 상황일 때 자신의 의지로 전투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전투 상황일 때 결정을 하는 것은 사실 로보캅의 뇌에 장착된 컴퓨터 칩이다. 로보캅을 만든(?) 박사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전투 상황일 때 로보캅이 느끼는 자유 의지는 환상일 뿐이다. 컴퓨터가 하는 정보 처리일 뿐이다.
이 문제를 심리학이나 철학적으로 더 진전시킨다면 “과연 당신이 느끼는 자유 의지는 환상이 아닌가? 그것도 당신 뇌에서 물리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정보 처리의 결과일 뿐인 것은 아닌가?”라는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초점은 “<로보캅>은 좌파 영화인가?”이다. 따라서 “당신의 정치적 신념은 과연 당신의 자유 의지인가? 그것도 자본가가 통제하는 미디어의 결과일 뿐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파토가 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인지 나의 오바인지 여부를 따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작품을 감독이 만들었을지라도 해석이야 누구나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 텍스트가 완성되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읽는 방식까지 감독이 강요할 수는 없다.
적어도 <로보캅>은 내가 여기서 썰을 푼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헐리우드 영화 감독치고는 나름대로 괜찮아 보인다. 그런 텍스트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disclaimer: 이 글은 3일 동안의 수면 부족과 1,000km의 운전과 1.6리터의 맥주의 혼합물이다. 따라서 나의 자유 의지와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