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 공지영 / 해냄
소설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긴 문장이다.
해리성 인격 장애
각기 다른 정체감을 지닌 인격이 한 사람 안에 둘 이상 존재하여 행동을 지배하는 증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이 의식 위로 올라와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억상실증이 하나 이상의 인격에 나타나며, 인격이 수동적일수록 기억상실증이 심해진다. 과거에는 '다중 인격 장애'로 불렸으나 지금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解離性正體性障碍 )라고 부른다. 인격이 여러개라는 것보다는 정체감이 불안정하다는 것에 중점을 두는게 이 증상을 설명하는데 더 알맞기 때문이다. - 세상의 모든 백과사전에서 발췌 정리
책을 받고 '해리'가 뭐지? 해리 포터, 바다의 거리를 칭하는 단위 등이 떠오르며 나름 어떤 소설일지 상상해 봤다. 제목이 주는 "힘"이기도 하고, 제목을 통해 작가(또는 출판사)의 "의도"에 다가서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 의도는 항상 "선(善)"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누구를 무엇을 중심으로 하는 "선"함인가는 말하지 말자. "해리"라는 제목 덕분에 익히 알고 있는 다중 인격 장애라고 "해리"를 이해하고 시작하니 소설의 읽는 동안 어떻게 질환이 표현되는지 신경쓰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기자로 활동하는 '이나'이지만 전체적인 진행으로 볼 때, 그가 쫓고 있는 - 중학생때 한 반이기도 했고, 집에도 자주 놀러 왔으니 - 통상 친구라고 부르는 "이해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돈을 쫒는 사회, 사람의 대표격으로 "해리"가 움직인다. 남성에게 잘 통하는 "성"을 무기로 하고, "축은지심"으로 포장하여 무대에 선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는 한 명 한 명의 삶을 파괴한다. 그 한명이 엮인 가정과 사회도 파괴된다. 거짓으로 치장된 사회와 개인에 대한 고발이다.
이를 한 개인의 "악행(惡行)"이라고 볼까? 한 개인의 일탈은 건전한 사회, 건전한 공동체라면 충분히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건전한 공동체라면 각 구성원에 대한 "상호 관찰", "호흡"과 더불어 개인과 그 공동체에 고스라니 쌓인 "역사"가 순간 순간이 발현되어 구성원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말라 죽거나 건실한 열매를 맺는 차이는 그 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 꾸며진 말로, 보여주는 표면만 바라보는 식의 삶을 사는 SNS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장애(Disorder)이 아닐까? 그 뿌리와 뿌리 내림, 토양과 공기 그리고 끊임없이 주어지는 사랑의 힘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Order(순리, 질서, 자연의 명령)를 거스린 Disorder(질환, 장애, 불복종)는 필연이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해리"가 악의 축인가? 위험한 가족 환경에서 자라, "돈"에 대한 욕망를 가졌다. 가진 것은 없고 몸이 전부이다. 한때 뚱뚱하고 매력이 없었던 그는 신장이 망가진다고 해도 남자들이 좋아하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이어트 약을 과용할 수 있다고 했다. 몸을 망가뜨리면서 가지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저 돈, 부(富)인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개인의 힘만이 아닌 이를 방조한 조직이 가진 "욕망"이다. 그 집단으로 작가는 카톨릭과 (진보)정치인 집단을 지목(指目)한다.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라면 그가 몸담고 있는 배경이 소설에 나오는 악의 배경과 동일함을 알 것이다. 이야기에서 보여지듯이 악(惡)은 선(善)으로 치장된 환경에서 자라는 것일까. 소설의 매 장이 시작될때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장면이 인용된다. 그곳은 신이 마련해준 장소였고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해리가 백신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가진 인간으로 살 수 있었을까? 계부의 출현으로 정신이 혼잡했던 이나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백신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서울로 전학가지 않았다면 그녀도 깊은 수렁에 빠졌을까? 개인의 일탈은 조직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다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해리에게는 카톨릭이라는 조직과 공무원들의 지원아래 악을 호흡하듯 저질렀으나 그녀의 죽음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해리와 같은 한 개인을 도구로 삼아 조직의 힘을 등에 업고 욕망을 채우는 사람이 있다. 드러나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듯 보인다. 그들은 지능적이다. 그들을 대할때 자세는 이래야 한다고 한다.
1권 246. "불쌍히 여기는 마음... 절대로 갖지 마시고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이런 인간들은 대게 끈질기고 뻔뻔하고 부지런하기까지해요. 필요하면 엄청 비참한 지경이 된 듯 불쌍하게 굴 거에요. 이들은 가면을 쓴 코스프레엔 달인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 부류가 있어요. 흔히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게 이들의 토양이에요. 이게 이 사람들 먹이에요. 그래서 상식을 가지고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해내기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하면 절대 안 돼요.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의심해야 해요. 그래서 싸움이 정말 힘들어요."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고 했던가. 우리는 나의 눈으로 타인을 본다. 소설은 마치 가장 엄숙하고 잘 조직되었으며 개개인의 욕망을 버린 사람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카톨릭과 진보 지식인(정치인)의 부정과 부패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사람에 관한 문제이다. 그 단체나 조직이 부패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또는 그 이상의 구성원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한 둘을 제외하고는 전부 썩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 단체나 조직의 정신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지어진 단체나 조직이 그 정신과 뜻을 단지 대표하는 조직일뿐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변하는가? 변할 수 있는가에 대답은 쉽게 내리지 못한다. 소설에서는 변하지 않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신부의 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확답을 얻지 못한다. 한 개인에게 특정 지어진 특성이 변하지 않는데, 만약 변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전에 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고 소설은 말한다.
1권.277 "약속해줘. 최소한 명백하게 악을 목격하게 된다면 모른 척하지 말아줘. 멱살을 잡지 못해도 소리쳐줘! 여기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그냥 원래 다들 이래요. 나쁘게 생각하면 한도 없어요. 이러지 말자고."
사람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는 오래된 숙제이다. 그것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와 동일한 말이다. 본시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와 상관없이 누구든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혼자만의 힘으로? "NO,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에 다닐때 나는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간 적이 있다. 부모님께는 친구 집에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저녁에 돌아오니 내가 어디를 누구화 함께 다녀왔는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조그만 동네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든 나를 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원래 그 나이의 학생들은 다 그렇지! 하는 마음도 있지만 알아야 할 사람은 알아야 하고 소리쳐 알려야 할때는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나의 의견을 시의 적절하게 말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내가 속한 환경에 대해서,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 심한가!
2권.259 너는 종교에 다가가서 결국 신에게서 멀어졌구나.
책에 등장하는 몇몇 신부들은 그 조직에 들어가서 신에게 멀어졌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시민에게서 멀어진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 결혼을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사랑하는 이를 잃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멀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한다고 말한다. 싸우지만 나를 잃지 않는 싸움. 잃어버리고 놓치고 있는 가치를 더 사랑하고 궅건하게 세우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내 자신을 망치는 싸움을 해서는 안 돼. 더 사랑할 수 없이 증오로 돌아가는 싸움을 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는 적과 닮아버려요. 비결은 이거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훼손당한 그 가치를 더 사랑하기에 싸워야 해."
2.267 "결국은요. 자매님. 이 세상에 우리가 남기고 갈 것은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이에요. 그것이 좋은 결과를 맺었든 그렇지 않았든.... "
그래서 싸우는 중에도 사랑했음을, 사랑하고 있음을, 사랑할 것임을 다짐해나가는 일상이 되어야 할 것임을 한 신부의 입을 전한다.
아쉬운 것은 상황을 개선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악은 나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 하나 더 왕성하다는 것이다.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옷을 입고, 내가 더 좋아할 만한 치장하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해리는 사라졌지만 또 다른 이름의 해리와 백목사로 신분을 세탁한 백신부와 함께 사랑과 헌신의 옷으로 치장하고 측은지심의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갉아 먹으려 할 것이다. 동산 중앙의 과일을 따 먹으라고 속삭이고 있다는 것이다. (2019.2.9 평상심)
"그들로 하여금 떠들게 하고 나는 나의 길을 갈 뿐" - 단테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며 인정 없는 세계의 심장인 동시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 ...." - 마르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