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도 사랑이다(사49:14-17)
2024.5.5 어린이주일/어버이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진실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책임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책임은 사랑의 완성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람에 대한 책임도 함께 부여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힘들지만 사랑하는 대상들(가족, 성도들, 복음)을 향해 책임지려고 애쓰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와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동네에서나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가정에서도 종종 장기 투병하는 분들과 그들을 헌신적으로 수발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본다. 또한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님들의 모습도 많이 본다.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보면서 애처로움과 경이로움도 함께 느낀다.
누가 그런 일을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며, 식구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간에도 오랫동안 남편의 병수발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어느 노(老) 권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애처로움과 감동을 함께 느꼈던 경험이 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어찌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책임도 사랑이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책임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책임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책임이 수반될 때, 사랑은 더욱 빛을 발한다. 책임이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한다. 이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책임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아담과 하와가 혼인을 하면서 한 가정을 이루는 순간에 그들은 서로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되었다(창2장). 남녀가 결혼식을 하고 한 가족이 되는 것,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모든 것들은 곧 부부가 서로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그리고 자식이 부모에게 서로 책임적 관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효(孝)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사랑과 책임은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질서이며, 세상을 유지해 가시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책임으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활과 신앙의 요소들을 보면, 사랑과 책임을 늘 함께 붙어있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책임 ―> 예배, 찬송, 충성, 믿음, 영적인 효(孝)
-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책임 ―> 십자가의 대속, 성령임재
- 부부 사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과 책임 ―> 돕는 배필(a helper suitable, 창2:18)
-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책임 ―>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엡6:1-4)
-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과 책임 ―> 효(孝), 공경(엡6:1-4, 출20:12)
-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사랑과 책임 ―> 전도, 선교, 영혼구원 사역(행1:8)
-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랑과 책임 ―> 구제, 봉사, 나눔과 섬김, 환경보호 등
그런데 간혹 우리 주변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의 차원으로만 이해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책임을 짐으로 생각하고, 그 책임을 외면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 인생 자가가 사는 것인데, 왜 내가 너의 인생을 책임져?”라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자녀는 부모를 봉양하기를 거부하고, 어떤 부모는 자녀를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책임 없는 사랑은 마치 실체 없는 무지개와 같을 뿐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책임이 있는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악한 풍토들이 확산되어 갈까? 이것에는 단순히 사랑의 감정이 식어진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영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이다. 마귀 사탄은 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책임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한다. 이처럼 죄에 의해서 모든 책임적인 관계가 파괴된 상태가 곧 죽음이고 불행이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본래 서로에게 “돕는 배필”인데, 그들 사이에 죄가 들어가자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살인한 사건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죄의 결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인간의 불행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데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시편 107편 10-11절 말씀은 이 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지적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나)를 잊지 않으셨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의 고통과 힘든 짐으로 눈물 흘리는 우리들 모두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 같이 오늘 본문인 이사야 49장 15-16절 믿음으로 읽어 보자.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설령 여인이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오늘 우리들)을 잊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왜 하나님이 우리(나)를 잊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내 생명을 지으신 “우리(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감당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이다(요3:16) 그렇기에 십자가는 우리를 다시 살려내시려는 하나님의 책임적인 사랑의 절정이고 완성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펜으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독생자의 피를 잉크 삼아서, 당신의 손바닥에 우리들의 이름을 새기셨다.
어린이들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핀란드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어진 왕이 있었다. 그런데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서 왕위를 잇게 할 생각으로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전국에 붙였다. 왕이 정한 시험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청년들이 몰려왔다. 첫 시험은 말 타기와 활쏘기였다. 이 시험에서 후보자가 20명으로 압축되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다. 왕은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모든 사람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나무를 구해 오거라. 기간은 백일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년들 중의 누구도 이렇게 큰 나무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수도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도 역시 다른 청년들처럼 커다란 나무를 구하려다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에서 불쌍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기도를 마치고 예배당 안을 걸어서 나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뒤돌아보았다. 바로 그때 그의 눈에는 예배당에 걸려있는 큰 나무 십자가 보였다. 그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맞아! 그건 바로 나무십자가야!” 그 후 존 페로는 왕의 사위가 되었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정말 그렇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사람사이 연결하는 가장 큰 나무는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와 이 세상의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비밀은 십자가에 숨겨있는 사랑과 책임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십자가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책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가정의 행복과 평화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복된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책임도 사랑인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가족 사이에 서로에게 사랑과 책임을 다하자(예배, 기도, 충성, 양육, 공경, 효도, 사랑 등). 그러나 그 책임과 사랑은 내 힘만으로는 안 되고,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지는 것을 또한 잊지 말자.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심장을 사모하며, 성령의 충만한 영의 사람이 되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