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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經 48章 -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取天下常以無事 취천하상이무사 及其有事 급기유사 不足以取天下 부족이취천하 의역: 물질과 권력을 얻기 위한 學은 행할수록 쌓여서 무거워지고 딱딱 해져 죽음에 이르지만, 道는 행할수록 줄어들고 가벼워져 극히 부드러운 상태에 이른다. 따라서 덜어내고 덜어내면 無爲에 이르며 부드러운 에너지로 우주를 창조하였듯 무위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天下를 취하면(道를 따르면) 항상 無爲로 이루지만 억지로 하려면 天下를 충분히 취하지 못한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연스럽지 못한 시도들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
道德經의 주된 내용이 빅뱅 이전과 이후를 다루는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30章 가까이 살펴보았으니 나름 공감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믿는다. 우주가 열리고 138억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든 것이 無爲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老子의 생각이다. 따라서 老子의 생각을 따라잡으려면 아래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 빅뱅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이해한다.
2.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이해한다.
3. 1과 2에 존재하는 차이를 파악한다.
4. 2의 현재를 1의 빅뱅으로 돌리면 道에 이른다.
우리는 사실 無爲가 주는 어감(語感)에서 모호한 자유를 느낀다. “自由”의 정체는 무엇일까? 죽어서 육체를 버리는 것인가? 우리는 자유를 얻고자 엄청난 노력을 한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표현한 수많은 영화와 책들, 삶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보인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自由의 정체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라는 단어를 알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또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神, 時間, 道의 존재처럼.
현재 道德經 40% 정도를 읽어 내려가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중 하나가 無爲다. 이해할 수만 있다면 道德經의 근간을 뚫을 것이다. 48章에도 無爲가 등장한다. 먼저 學益(학익)과 道損(도손)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學은 행할수록 축적되고, 道는 행할수록 점점 줄어든다. 둘은 정반대 속성으로 無爲에 이르려면 덜어내라고 한다.
무엇을 덜어내라는 것일까? 영화 “쇼생크 탈출”은 감방에 갇혔지만, 자유를 갈망하여 탈출하고 자유를 얻는다. 老子는 덜어내면 자유로워진다고 주장하고, 쇼생크 탈출은 감방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고 자유의 정체가 무언지 모른다. 나를 속박하는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그 정체가 무언지 알려고 평생을 헤맨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가?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루시”는 정반대 주장을 하고 있다. 채우라고 한다. 인간은 10%의 뇌 용량도 활용하지 못하는데 엄청난 양의 마약을 먹고 뇌 용량이 계속 증가하여 결과적으로 100%를 활용한다.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I am everywhere 나는 어디에도 있다”는 표현이다.
육체에 속박 받지 않고 우주에 펼쳐진 時空間과 일치할 수만 있다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경계에 걸리지 않는다. 중력으로 내 육체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우주 어미의 본성을 되찾을 것이다. 10%의 뇌도 활용하지 못한다는 복선은 인간의 가치는 100%이었는데 90% 이상 속박당하여 자유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神과 같은 존재다.
쇼생크는 감방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고, 루시는 100% 뇌 사용량을 회복하여 시공간에 자유로워진다. 老子는 육체와 물질에 갇혀있지 말고 無爲에 이르라고 요구하며, 소강절은 천지를 만든 주인처럼 살라고 한다. 모두 공통적으로 주인처럼 살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
내가 神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달아야 할까? 힌트를 주는 영화가 “매트릭스”다. 1편 초입에 나오는 대사가 있다. “네오, 너는 노예다. 너는 정신을 통제받는 가짜 세상에 살고 있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는 사람들에게 경계가 없는 세상을 보여주겠다. 어떤 것도 가능한 세상임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100% 뇌를 활용한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나는 누구의 노예인가? 나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지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道德經을 공부하는 과정에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
學은 행할수록 축적되는데 도는 행할수록 줄어든다. 學은 무엇이고, 道는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무엇을 배우면 안 되고, 어떻게 덜어내 無爲에 이를까?
損之又損, 以至於無爲(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덜어내고 덜어내면 無爲에 이른다. 주의할 문장이 至於다. 덜고 덜어서 無爲로 돌아갈 수 있다. 老子가 생각하는 끝은 바로 빅뱅의 순간이다. 물질이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다. 또 無爲에 이르면 어떤 상태일까? 老子의 주장은 명확하다. 無爲는 바로 丁-壬-癸가 균형을 이룬 有物混成 상태로 언제든 물질과 육체를 만들 수 있는 부드러운 상태다.
丁--------------壬--------------癸
인간이 추구 老子가 추구.
인간은 돈, 명예, 물질, 권력, 명성에 집착하고 채우려 한다. 영화 “루시”에 나오는 그 대사 바로 “인간은 소유에만 집중하고 존재에 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
이 문장을 다시 살펴보면, 학을 행할수록 늘어가지만, 도를 행할수록 점점 줄어든다. 學을 행할수록 늘어가는 것은 色界의 탐욕이 늘어가는 것이다. 돈, 명예, 물질, 권력을 위한 공부를 하지만 본성에서 멀어져간다. 道는 물질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無爲에 이르려면 돈, 명예, 물질, 권력 욕망을 덜어내라고 한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손지우손 이지어무위)
계속 덜어내다 보면 無爲로 이루어진 경계에 이른다. 사실 어려운 표현이다. 우리가 무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다.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하고자 몸부림치는데 老子는 끝없이 덜어내라고 한다. 老子는 죽음을 향하는 탐욕이 불쌍해 보였던 것이리라.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무위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138억 년 동안 누가 作爲를 했던가? 인간도 하지 못했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기껏 수백 만 년의 존재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극히 자연스럽게 현재에 이르지 않았는가?
取天下常以無事(취천하상이무사)
천하를 취하면 항상 無爲로 이루어진다. 천하를 취한다는 뜻은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다. 道를 따르면 모든 것이 無爲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억지로 하려면 천하를 충분하게 취하지 못한다. 인위가 개입되었다. 억지스러움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時間을 거스르고 문제가 생긴다. 다른 각도에서 무위에 이르는 방법을 살펴보자.
현재는 이런 상태다.
0 ---------------------------> 138억 년 후 현재. (1)
빅뱅/本性/天下/無爲
도를 찾으려면
0 <-------------------------- 138억 년 후 현재 (2)
빅뱅/本性/天下/無爲
“빅뱅의 순간”으로 돌아가 현재와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핀다. 가장 큰 차이는 육체와 물질의 세상을 살아간다. 무위에 이르려면 빅뱅 당시에 없었던 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老子는 축적되어 왔던 탐욕들을 덜어내면 無爲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양한 방법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종교, 명리, 철학, 수행, 참선 등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여전히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유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며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얻었다고 해도 자유가 무언지 모른다. 自由도 時間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불분명하고 모호한 것이다. 세상에는 모호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사실 1과 2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有無를 규정하는 기준이다. 존재하지 않다는 것과 존재하다 만큼의 차이이다. 영화 루시에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시간이다.”라는 표현만큼 차이가 있다. 빅뱅의 순간이 色界의 존재를 규정했다. 따라서 빅뱅의 순간에서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 老子의 주장을 이해하는 빠른 방법은 四季圖의 의미를 파악해보는 것이다.(四季圖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癸乙 봄 丙庚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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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甲 겨울 丁辛 가을
봄에는 癸乙로 부드러운 에너지로 생명체의 성장을 촉진한다. 老子는 이런 이치를 따르라고 한다. 여름에 빛을 받아들이고 열을 축적하면 중력이 쌓이고 가을에 죽음에 이른다. 老子가 물처럼 살라, 아이처럼 부드럽게 살라고 계속 강조하는 이유다. 丙庚 色界에 나가지 말라는 이유도 재물, 권력, 욕망을 탐하면 목숨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丁壬癸도 함께 비교해 보자.
丁------------壬------------癸
악마-----------------------천사
수렴, 중력 時空間 발산, 척력
물질 정신
육체 생존
입자 파동
중생-------열반----------부처
死-------------------------生
學 탐욕 증가----------------道 무위
주의할 점은, 비록 대칭구도지만 丁壬癸는 멈추지 않고 회전한다. 중간에서 균형을 맞추는 존재가 壬(樸)이다. 완벽한 균형은 無이고 차이가 생기면 空이며 물질이 생겨나면 色이다. 이때 회전하는 움직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마음이 회오리임을 깨우치면 많은 것을 이해한다.
수시로 흔들리는 것도 회오리 때문이다. 왜 흔들리는가? 왜 괴롭다가 즐겁고 즐겁다가 괴롭고 서로 다른 나를 만나는가? 회전하기 때문이다. 중력도 척력도 모두 내 속성이며 원자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입자로, 파동으로 반응한다. 이런 에너지를 육체에 장착한 우리 마음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뇌가 한시라도 얌전하게 있는가? 육체를 버리고 無로 돌아가도 丁壬癸는 멈추지 않는다. 새로 육체를 얻어도 회오리 작용은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 어디에도 멈춤은 없으니 멈추려는 노력은 무의미하고 오히려 더 괴로워질 수도 있다. 道는 움직임이다. 老子의 주장은 한결같다.
빅뱅의 순간에 머물라는 것이다. 항상 生氣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물형을 딱딱하게 만드는 丁(중력, 탐욕)쪽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 내 마음이 괴로운 이유는 현재의 시간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육체를 가졌기에 물질 쪽으로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색계에 머물려는 성향이 강해져간다. 老子는 學을 행하면 이런 욕망이 더욱 강해지는 것으로 보았다. 탐욕만 늘고 마음이 괴로울 것이며 죽음을 재촉할 것이라고 한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정리하면 學은 知와 智를 만들어내는 원천이고 3章 不尙賢(불상현)처럼 尙賢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문제다. 결과적으로 貴難得之貨(귀난득지화)의 문제를 만들고 백성들을 부러움, 시기, 질투, 경쟁, 탐욕에 빠트린다. 또 13章 寵辱若驚(총욕약경)으로 극히 불안정해지는 심리상태를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老子는 이것을 덜어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가에 답해보자. 時間으로부터 자유다. 내 욕망의 불만족으로부터 자유다. 모든 것에 만족하면 자유가 필요 없다. 만족과 불만족은 시간이 만든다. 내가 시간을 평가해서 시비가 생겨난다.
그렇다. 우리는 만족스럽지 못한 시간 때문에 내 자유를 구속받는다. 결론적으로 自由와 老子의 有物混成은 연결되어 있다. 마구 섞여 시작도 끝도 없기에 不可致詰(불가치힐)로 분별이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꾸만 분별하기에 자유를 잃어버린다.
任性合道(임성합도) 本性에 맡기어 道와 하나 되면
逍遙絶惱(소요절뇌) 자유롭게 번뇌를 끊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