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맞아 크리스마스 트리와 성탄 꽃꽂이를 기행하며 크리스마스 캐롤송을 듣다보니
어린 시절 성탄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주일학교 수요예배 출신으로
어린 시절 몸에 밴 성탄절의 추억은 기독교 문화의 자화상으로 체화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다녔던 시골 고향의 산촌 교회는
신앙의 잔뼈가 굵은 모교회였습니다.
유년 시절 "Merry Christmas"의 즐거운 추억은
고향의 서정이 깃든 그리운 정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번개치고 천둥치는 비오는 여름날 수요일 밤 동네 어귀에서 서성이다가
수요예배를 드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유일하게 예배 결석으로 기억될 정도로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예배를 비롯하여 새벽기도까지 열심으로 교회 다니며 믿음의 정도를 걸었습니다.
요즘 비슬산 둘레길의 새벽을 수 놓는 것도
어린 시절 집에서 5리나 되는 교회를 산길 따라 새벽기도를 다녔던 담력의 내공인 것 같습니다.
새벽의 밤길이 두렵지 않은 것은
새벽의 주인공으로 그 흔연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밴 교회에 대한 추억은 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와 2000년대를 비롯해서
2010년대와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은 곧 저의 인생, 그 자체가 교회사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역의 부분을 뺀 순전한 신앙생활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70년대의 신앙생활입니다.
유년 시절의 충실한 교회 생활은 신앙의 비전이 되었고
그 후 말씀 사역의 실상을 낳았습니다.
한시대 교회의 상징적인 문화가 되었던 종소리는
초종과 재종의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예배를 선포하였습니다.
어느덧 교회의 종소리는 차임벨 소리로 대체되었고
차임벨은 도시 문화의 소음으로 문제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대구에서 주민들의 거센 민원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차임벨를 울렸던 교회는 동구의 은천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종소리와 차임벨의 소리를 기억하는 성도는
신앙의 연륜이 깊은 성도일 것입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의 성탄절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찬송이 성탄절 고요한 새벽에 동네마다 울려퍼졌습니다.
교회의 종소리와 쌍벽을 이루는 성탄절의 문화는
바로 새벽에 성도의 가정을 찾아 천사의 찬송을 울렸던 새벽송이었습니다.
성탄 이브의 축하행사를 마치고 새벽송의 전사들은 만찬을 즐긴 후
밤을 지새워 성탄의 새벽을 맞아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 다니며 새벽송을 불렀습니다.
가장 많이 불렀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하고
누가복음 2장 14절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천사의 찬송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면 성도의 가정에서 준비한 다과를 비롯하여
다양한 선물을 푸짐하게 주었습니다.
마지막 성도의 집에서 새벽송이 끝나면
집 안으로 초청되어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고향 교회에서의 성탄절 새벽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목자들에게 구주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찬송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고향 교회를 떠나서 대구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그 때는 이미 시골의 교회 종소리를 들을 수 없고 차임벨로 대체되었습니다.
차임벨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성탄절 새벽송이 살아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도시는 성도들이 각처에 흩어져 있던
구역별로 팀을 나누어서 새벽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성탄절의 새벽송도 사라졌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성탄절의 새벽송은 성탄절의 특벽한 새벽 예배로 대체되었고
성탄절의 새벽 예배는 오늘날까지 성탄의 의미가 살았는 구주의 탄생을 선포하는 천사의 찬양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