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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7) 디오라마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셀주크의 승리와 장악, 십자군 전쟁의 불씨가 될 줄이야
-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1071, Bataille de Manzikert),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터키.
아랍 무슬림의 성장, 성지 팔레스타인의 상실
5~9세기 서방에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가 회복되고 유럽의 주요 왕국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며 그리스도교를 구심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고 있을 때,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에서는 서서히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7세기 아랍 무슬림이 성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은 그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에서 이집트, 시리아는 물론 팔레스타인까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의 상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알다시피 팔레스타인은 ‘성지’(Terra Santa)다.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이후 잠시 마케도니아 왕조가 부흥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 다시 회복되는 듯했으나, 10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8세와 9세를 거치면서 제국은 안으로는 내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해 허약해졌다.그 시기, 비잔틴 동쪽에는 셀주크 튀르크(Seljuk Turks)족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원래 튀르크족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돌궐(突厥)로 중앙아시아의 스텝을 누비던 유목 민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당나라에서 중앙아시아로 밀려와 살며, 거기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1045년에 이란으로 내려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셀주크라는 왕국을 건설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차례로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아시아의 곡창지대 아나톨리아 반도를 넘보았고, 이 때문에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 충돌했다.
셀주크와 비잔틴 제국 간의 싸움
소개하는 작품은 터키의 이스탄불 군사박물관(Asker Mze)에 있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다. 이 작품은 특정 장면이나 풍경을 일정 공간 안에 입체적으로 전시한 디오라마(Diorama) 작품이다. 무대 장치적인 원근법과 조명 연출에 의한 3차원의 전시 방법으로,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풍경, 도시 경관 등을 제작하여 교육용, 오락용으로 활용된다.
작품이 소장된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은 거의 1000년에 이르는 터키군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1950년 오스만 제국의 전 육군사관학교 건물에 개관했다. 박물관은 22개의 전시실에 9000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종 대포와 군인, 갑옷, 투구, 검류, 총기류, 오트만 메테르 밴드(군악대) 등이 있는 사이에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던 그들의 조상들을 그린 작품이 있다. 소개하는 작품도 그중 하나다. 13세기 말 이후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1299∼1922)의 토대가 되었던 셀주크 튀르크의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1071년 8월 26일, 터키 동부 만지케르트(Manzikert)라는 곳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과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Romanus IV Diogenis 1068~1071)가 부딪힌 싸움이다. 이 전쟁은 결국 셀주크의 승리로 끝났고, 과거 로마 제국의 정통 후예라는 비잔틴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그 결과 술탄은 아나톨리아가 포함된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한 패주가 되었고, 비잔틴과 터키의 운명이 여기서 갈렸다.
이를 계기로 셀주크는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비잔틴을 괴롭히면서 예루살렘 성지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급기야 1096년 비잔틴의 황제는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의 발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096∼1270년까지, 200여 년간 10차례에 걸쳐 벌어진 것으로,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7세기에 이미 경험한 바, 당시로써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한 명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의 서막과 관련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20세기 교황님들의 가르침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아픈 역사를 겪으면서 나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비잔틴 제국의 치욕스러운 패배
당시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만지케르트 전투’의 주인공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다. 그는 1063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술탄이 되어 중동 전역을 누비며 전투를 했고, 동로마 영내인 카파도키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 전선인 아나톨리아 지방까지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었다. 나이는 많지 않아도 전장에서만큼은 백전노장인 셈이다.
한편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는 그런 술탄을 야만족의 족장이라며 하찮게 보았고, 그의 군대를 떠돌이 유목 집단에 불과한 오합지졸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의 습격을 받고 약탈을 당한 아르메니아 지방을 평정하고자 별렀다. 1071년 봄, 드디어 황제는 군대를 모아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남쪽 지류를 따라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튀르크 사람들로 구성된 비잔틴의 용병부대는 만지케르트 입구에서 둘로 나뉘어 일부는 반(Van) 호수 옆 아클라트 요새로 향했고, 나머지는 황제와 함께 만지케르트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2만 명이 넘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상비군인 타그마타(Tagmata)는 싸우기도 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버렸고, 힐라트(khilat)로 가는 길을 탐색하러 간 500명 넘는 노르만 용병도 도망가 버렸다. 또 1000명이 넘는 튀르크인 용병들은 셀주크인 친척들과 접촉한 후 달아나 버렸다. 첫 전투가 시작된 1071년 8월 25일 이전에 이미 로마누스의 군대는 절반 이상이 사라진 셈이었다. 비잔틴 군대의 이런 상황을 간파한 술탄은 마지막으로 평화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황제는 제국을 침략하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거절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술탄은 비잔틴군과 거리를 두고 유목민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적의 동태를 살폈다. 셀주크군은 4km 떨어진 곳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비잔틴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목표물이 그들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초승달 모양의 진형 중앙은 양쪽 끝에서 적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동안 뒤를 터 주었다. 중앙을 지나가는 사이에 비잔틴군은 셀주크 궁수들에 의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기병대를 동원하여 셀주크를 압박하자, 그들은 초원의 전사답게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밤이 되자 결국 로마누스는 군대에 퇴각을 명령했고, 배후에서 잔여 병력을 담당하고 있던 장군 안드로니쿠스 두카스는 패전의 기미를 느껴 황제군의 퇴각을 돕는 대신 만지케르트 전장을 벗어나 부하들과 함께 달아났다. 비잔틴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황제의 좌우에 있던 군대도 조금 버티다가 곧 퇴각하고, 결국 황제의 친위대와 2000~3000명의 튀르크 용병들만 셀주크 군에 포위된 채 싸웠다.
어느 순간, 전장에는 황제 혼자만 덩그러니 적군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일부 비잔틴군이 황제를 발견하고 달려갔지만, 셀주크군이 나타나자 그마저 도망치고 말았다. 로마누스는 부상을 당했고, 셀주크군의 포로가 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마누스의 목에 자신의 신발을 묶고 땅에 입을 맞추게 했다. 튀르크족이 승리를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술탄은 황제를 일주일간 포로로 붙잡아 두며 정중하게 대접했고, 전투 전에 제안한 평화조약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이미 포위된 안티오키아, 에데사, 히에라폴리스와 만지케르트를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로마누스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비잔틴 제국은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요하네스 두카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로마누스는 전쟁에서 굴욕스럽게 패했다는 이유로 제국에서 더 이상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길로 쫓겨났다. 그 결과 술탄과의 협상은 무산되고,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만지케르트 구릉이다. 전쟁의 시점이 한여름인 8월 26일이지만, 모든 생명이 죽은 듯 배경은 흙빛이다. 몇몇 포로들과 함께 황제만 덩그러니 술탄과 적에 둘러싸여 있다. 앞의 주인공들 외에 주변은 멀건 가깝건 모든 것이 피폐할 뿐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8) 프란체스코 하예츠의 ‘클레르몽의 광장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설교하는 우르바노 2세 교황’
성지 되찾고 형제 도우러 “십자군 원정에 나서야 합니다”
- 프란체스코 하예츠, ‘클레르몽의 광장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설교하는 우르바노 2세 교황’, 캔버스에 유화, 1835년, 밀라노의 이탈리아 갤러리(Gallerie d’Italia - Piazza Scala) 소장.
제국을 압박하는 셀주크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는 비잔틴 제국이 서방 교회로부터 신뢰를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방은 비잔틴 제국을 더 이상 동방 교회와 중동의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의 보호자로 보지 않게 되었다.
1074년,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이 패배(1071)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놀라운 선포를 했다. 비록 동방 교회와 껄끄러운 점이 있었고, 서로가 이단이라며 갈라선 마당이지만 어쨌든 비잔틴은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이라며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최소 5만 명의 병력을 목표로 지원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서방 제국들이 이를 막아섰고, 그들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결국 의지를 접어야 했다.
비잔틴 제국의 허술한 점을 안팎으로 간파한 셀주크는 이후 지속적으로 터키 영토를 조금씩 빼앗았다. 1095년 셀주크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했고,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아나톨리아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그 땅마저 내어주고 말았다. 이렇게 제국을 압박해 오는 셀주크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비잔틴 황제는 서방 교회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교황은 복자 우르바노 2세였다.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알렉시우스 1세의 서신을 피아첸차 시노드에 부쳤다. 피아첸자 시노드는 우르바노 2세에게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를 권했고, 교황은 이를 수용했다. 클레르몽 공의회는 1095년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열렸고 300여 명의 성직자가 참석했다.
혁신적이고 다방면에 뛰어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이 역사적인 클레르몽 공회의가 열리고 있던 클레르몽시 광장에서 민중들에게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우르바오 2세 교황과 은수자 피에트로다.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츠(Francesco Hayez, 1791~1882)의 작품이다.
하예츠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밀라노로 이주하여 활동하고 사망했다. 하예츠는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화가로 혁신적이고 다방면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아 종교와 역사,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유명한 작품 ‘입맞춤(The kiss)’을 그릴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계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 바람에 중세를 배경으로 한 그의 많은 작품에는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을 암시하는 애국적인 메시지가 짙게 담겨있다.
만조니, 베르케트, 펠리코, 카타네오 등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초상화를 남기는 한편, 밀라노의 문화 예술계에 자신을 확실히 각인시켜 1850년에 그는 브레라 아카데미 미술관 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후에 우리의 이 코너에서도 다시 다루게 될 것 같다.
복자 우르바노 2세 교황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복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1035년 프랑스의 북부에서 태어나 1064년에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해 아빠스까지 올랐다. 1080년경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의해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그는 그레고리오 개혁의 열정적인 지지자이자 가장 유명한 활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다음에 언급하겠지만,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교황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를 굴복시킨 후에도 그레고리오 7세는 슈바벤 공작을 새 황제로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1080년에 황제를 재차 파문했다. 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1084년에 군사를 동원하여 로마를 점령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토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고 말았다.
우르바노 2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상대해야 했고, 매우 강한 노선으로 지금까지 있는 로마 교황청 조직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독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갈등, 프랑스에서 일어난 분쟁, 대립교황, 위협받고 있는 동방 교회의 문제 등에 직면했다.
십자군 원정은 ‘하느님 뜻’이라고 연설
우르바노 2세 교황이 비잔틴 황제의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는 사절을 맞이한 것은 1095년 3월 피아첸차 시노드에서였다. 교황은 그해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소집된 공의회에 이 안건을 부쳤고, 서방 교회는 무슬림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를 되찾고,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위험에 빠진 비잔틴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교황은 노트르담 두 포르 대성당에서도 연설했다. 처음에는 교회 내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의 쇄신을 주문하다가, 시노드에 참가한 귀족과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지와 동방 교회를 셀주크 투르크족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호소했다.
그의 연설을 그대로 옮겨 적은 정확한 필사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우르바노 2세 교황의 연설로 알려진 문건은 모두 5개가 전해온다. 대부분 후대에 써진 것들로 보는데, 이유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시노드 현장에 있었던 샤르트르의 퓔세가 쓴 기록, 제1차 십자군 원정 연대기 「게스타 프랑코룸(Gesta Francorum)」, 랭스의 로베르가 남긴 기록 등에는 저자들의 생각이 첨가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담긴 공통 내용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대사를 수여한다는 것’(샤르트르의 퓔세)과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Deus vult)”(랭스의 로베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해오는 또 다른 자료가 있는데, 바로 우르바노 2세 교황의 친서 4통이다. 여기에는 앞선 자료들과는 달리 교황의 본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플랑드르에 보낸 것」(1095.12)에서 ‘동방 지역의 교회들’과 ‘동방 교회들’, 「볼로냐교구에 보낸 것」(1096.09)에서 ‘교회의 해방’, 「발롬브로사니 수도원에 보낸 것」(1096.10)에서 ‘그리스도교의 해방’, 「카탈루냐 백작에게 보낸 것」(1089/1096-1099)에서 ‘아시아 교회’ 등의 표현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보다는 그 지역에 흩어진 그리스도 교회들을 셀주크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림 속으로
그림은 애국자로 알려진 엔리코와 가에타노 타촐리(Taccioli) 형제의 요청으로, 1835년에 프란체스코 하예츠가 그렸다. 이들 형제는 하예츠의 다른 여러 중요한 작품도 의뢰한 적이 있다. 모두 하예츠의 낭만주의적인 그림 속에 담긴 정치적인 메시지를 좋아했기 때문이리라.
클레르몽의 광장에서 우르바노 2세 교황과 은수자 피에트로가 십자군 원정을 설파하고 있다. 이 장면은 1826년에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조셉-프랑수아 미쇼(Joseph-Franois Michaud)의 「십자군의 역사(Histoire des croisades)」에서 영감을 얻었다.
광장에 마련된 교황좌를 둘러싼 많은 군중, 은수자 피에트로가 손에 든 십자가와 도처에 흩어진 붉은색 옷감들은 싸움을 앞둔 흥분한 군중의 심리를 표현한다. 역사 회화의 강점은 중세라는 시대적인 배경과 군중을 특징짓는 감정과 그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반응을 포착하는 데 있다. 그림의 앞쪽 우측에 젊은 부부는 출정을 앞둔 남편과 이별의 키스를 하고, 그 옆에는 가장의 참전을 암시하는 듯 부인이 아기를 안고 있다.
1835년 그림이 완성되던 해는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모아지던 때였다. 하예츠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십자군 원정이라는 주제로 호소했다고 하겠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9) 구스타브 도레의 ‘안티오키아 학살’
십자군의 칼은 절규하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마저 처참히 살육
- 구스타브 도레, ‘안티오키아 학살’, 삽화, 1877년, 파리.
무슬림 세력에 대항한 십자군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그를 추종하던 세력은 순식간에 아라비아 반도 주변의 이교도들을 소탕하고,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비잔틴 제국과 가까운 타부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무슬림은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완승하면서 아나톨리아 남부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것은 무함마드 이후, 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지역인 비잔틴 영내로 진출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후 계속해서 몇백 년에 걸쳐 무슬림 세력은 비잔틴 제국을 괴롭혔고,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과거 비잔틴 제국의 땅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하나씩 점령했다. 아랍 무슬림들은 이제 아르메니아로 향했고, 동시에 이집트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태생의 영국인 이슬람학자 밧 예올(Bat Ye’or)은 저서 「The Decline of Eastern Christianity Under Islam: From Jihd to Dhimmitude」에서 “성당으로 도망간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모조리 살해당했다”고 적었다.
이에 비잔틴 제국의 요청에 따라 일어난 서방 교회의 십자군 결성은 나름대로 충분한 당위성이 확보되었다. 복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의 성지 해방을 위한 제1차 십자군의 선포는 “하느님의 뜻”(Deus vult)으로 제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든 빚을 탕감받고, 재산을 보호받으며, 죄를 용서받았다. 이런 혜택은 교황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에 대한 대중의 지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참전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모두 달랐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열정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어떤 사람은 빚을 탕감받기 위해, 또 어떤 사람은 모험심에서, 어떤 사람은 약탈을 통해 한몫 잡으려는 의도 등 마음에 품은 의도들은 결코 고상하거나 원대하지만은 않았다.
1097년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고, 거기서 알레시오 1세 콤메노의 도움으로 소아시아 반대쪽 해안을 통과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는 시리아 해안에 도착했고, 9개월 후에는 드디어 아름다운 도시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1098년 6월 3일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고 있던 무슬림들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안티오키아를 차지했다. 과거 그들이 한 그대로, 이제 십자군이 그들에게 한 것이다.
삽화가, 독창적인 예술적 기조 확립
소개하는 작품은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 1832~1883)의 삽화 ‘안티오키아 학살’(파리, 1877)이다. 구스타브 도레는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여 6살에 이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12살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돌에 새겨 석판화를 제작했으며, 15살에 신문에 실었던 만평집과 삽화를 실은 책을 출판하였다. 1847~1854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들을 보면서 그림을 공부했고, 많은 양의 캐리커처와 석판화를 제작하며 독창적인 예술적 기조를 확립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판화로 제작하고 많은 문학 작품에 삽화를 그렸다. 당시 프랑스의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그의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절충적이고 다면체적인 도레의 예술은 여러 면에서 만화와 영화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무한한 상상력과 그래픽 작품들은 20세기 위대한 영화감독들에게 도상학적인 중요한 영감을 주는 한편,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에서도 월트 디즈니와 팀 버튼은 물론,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삽화는 다양하게 힘을 발휘했다. 대표작으로 1872년에 발표한 런던의 빈민촌의 더럽고 참담한 삶을 묘사한 판화 ‘런던 순례’, 에드가 알란 포우의 ‘갈가마귀’가 있고, 삽화를 넣어 출판한 책들로 밀턴의 「실락원」, 단테의 「신곡」, 영어판 「구ㆍ신약 성경」, 불어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이 있다. ‘안티오키아 학살’은 「십자군」이라는 역사서에 담긴 삽화다.
뺏고 뺏기는 안티오키아 공방전
비잔틴 제국의 도시였던 안티오키아를 셀주크 왕조가 빼앗은 것은 1085년이었다. 안티오키아 성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동로마 제국의 건축 기술로 튼튼하게 잘 지은 성벽이었다. 1088년부터 안티오키아를 통치한 야기 시얀(Yaghi-Siyan)은 1097년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온 십자군을 의식하고, 주변의 이슬람 세력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다. 야기 시얀은 안티오키아의 정교회 총대주교를 감옥에 가두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자들을 모두 추방하는 한편,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만 거주를 허락했다.
십자군과 셀주크 무슬림군이 안티오키아를 두고 공방전을 벌인 것은 모두 두 차례다. 제1차는 이미 무슬림의 도시가 되어 버린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기 위해 십자군이 벌인 공성전으로 1097년 10월 21일 시작해 1098년 6월 2일 도시를 함락하면서 종료되었다. 제2차는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에 대항해 1098년 6월 7~28일 벌인 공성전으로 여기서도 십자군이 승리했다.
그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십자군이 처음 안티오키아 성 바깥 오론테스 강변에 모습을 보인 것은 1097년 10월 20일이었다. 군대를 이끈 장수는 3명으로 부용의 고드프루아, 타란토의 보에몽, 톨로사의 백작 레몽 4세였다.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은 레몽의 직접 전투를 반대하며 공성전을 주장했다. 생각보다 길어진 공성전은 오히려 십자군을 괴롭혔다. 12월이 되자 고드프루아가 병으로 쓰러졌고, 충분했던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월 말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가 병력 2만을 이끌고 식량 조달을 위해 남쪽으로 향하자, 포위 병력이 줄어든 틈을 타서 야기 시얀은 레몽의 야영지를 습격했다. 레몽이 물리치기는 했지만 피해는 적지 않았다. 보에몽과 로베르의 군대도 야기 시얀을 도우러 오던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의 군대와 충돌하여 결국 승리했으나 식량 조달에는 실패한 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야 했다.
안티오키아를 포위한 십자군의 야영지에는 식량 부족으로 기아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사람과 말이 차례로 죽어갔다. 전체 군인 7명 중 1명이 굶어 죽었고, 군마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병사들은 적병의 사체와 죽은 말을 먹었다.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추방되어 키프로스 섬에 있던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약간의 식량을 보내준 것으로 기아를 해결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098년 1월, 기사와 병사 중에서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중에 은수자 피에트로도 있어 그의 명성은 추락하고 말았다.
1098년 2월, 비잔틴 제국의 장수이자 황제의 특사로 십자군에 합류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길 안내 및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던 타티키오스가 돌연 십자군을 떠났다. 알렉시우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나가 쓴 역사서에 따르면, 십자군이 계속해서 타티키오스의 조언을 거부했고, 보에몽과 십자군의 장수들은 그를 믿지 못해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결국 그를 떠나게 했다고 전했다. 이에 보에몽은 타티키오스를 욕하며, 안티오키아를 함락해도 그 땅은 비잔틴에 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주장했다. 십자군의 장수들 사이에서 이권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1098년 5월 말 모술의 영주 케르부가가 야기 시얀의 요청으로 대군을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십자군에게는 큰 위협이었고, 어떻게든 케르부가의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안티오키아를 함락시켜야만 했다. 보에몽은 야기 시얀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안티오키아의 한 수비대장을 매수했다. 수비대장은 성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에 성문이 열리자 십자군은 순식간에 시내로 들이닥쳤다. 굶주린 병사들에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십자군은 무슬림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림 속으로
도레의 작품 속에는 안티오키아 성벽에 매달려 절규하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아기를 안은 여성 등이 있다. 날카로운 창끝은 힘없는 그들을 겨누고, 무장한 병사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시민들을 살육하고 있다. 건물은 과거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대변하듯,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답고 장엄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에서 믿기지 않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안티오키아 공방전은 이후 유럽에 전해져 전설이 되었고, 여러 무훈시의 소재가 되었다. 12세기에 널리 불리던 ‘안티오키아의 노래’(chanson d’Antioche)도 그중 하나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0)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탐욕에 눈이 멀어 형제 도시를 짓밟은 비극의 역사
-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 ‘1204년 4월 13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 1587년경, 캔버스 유화, 두칼레 궁 소장, 베네치아.
십자군, 본래의 뜻과 다르게
13세기에 들어서도 십자군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비잔틴 제국과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유럽도 내부적으로 여론이 나빠지고, 각국의 정치적인 상황도 혼란스러워졌다. 신성로마제국은 노르만족이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를 되찾아 왔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은 내전 중이었다. 비잔틴은 비잔틴대로 계속해서 이래 달라 저래 달라 징징거렸다.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수송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가 그 비용을 댈 것인가가 원정의 실질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제4차 십자군 전쟁이다.
1202~1204년 베네치아가 중심이 되어 단돌로 도제가 베네치아 시민들을 설득하고, 프랑스 샹파뉴의 조프루아가 십자군을 결성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재위 1198~1216년)의 독려하에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플랑드르, 발루아 왕국, 신성로마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가하기로 했다. 이들은 1201년 이집트 공략을 목적으로, 이듬해인 1202년 약속한 날까지, 3만 병력을 베네치아에 집결시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준비한 500여 척의 배로 이동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동방 무역을 통해 유럽 최고의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던 도시 공화국이었다. 인도, 중국과 교역을 통해 얻은 후추와 각종 향신료와 비단, 면 등의 옷감은 물론 금, 은, 호박 등의 보석류까지 유럽 전역에 팔아서 막대한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가령, 고기에 후추를 뿌려서 맛을 본 사람은 후추 없이 고기를 먹지 못했다. 더욱이 베네치아의 금융과 조선은 국가 경제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또 다른 두 축이었다.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 제4차 십자군 원정대를 수송하기에는 누가 봐도 베네치아만 한 곳이 없었다. 1202년 6월 24일, 출발을 앞두고 베네치아는 군 병력에 맞추어 500척이 넘는 배를 건조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예상 인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만 2000명 정도만 모였고, 이들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수송비를 낼 능력도 없었다.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배를 건조하고 병력을 수송할 인부에게 지급될 비용 등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단돌로 도제는 비용을 내지 않으면 병사들을 억류하겠다고 위협했다. 십자군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베네치아가 솔깃한 제안을 내놓았다. 헝가리의 항구도시 차라(Zadar)를 공격해 주면 수송비를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차라는 동방 무역을 하던 베네치아에게 중요한 상업의 거점이었고, 그래서 한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 아래 두었으나 얼마 전부터 베네치아의 통치를 거부하고 헝가리 왕의 통제 속에 들어간 달마티아의 해안 도시였다.
십자군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차라는 십자군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는 한편, 교황의 사절까지 동원해 십자군에게 철군을 명령했다. 하지만 십자군을 거의 진두지휘 하다시피 한 단돌로 도제는 교황 명령을 무시하고 공격을 선동했고, 평소 지속적으로 반항해오던 차라를 철저히 짓밟았다. 차라는 함락되고 주민들은 모두 쫓겨났다. 이 소식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격분했다. 십자군이 이슬람 도시가 아닌 그리스도교 도시를 공격하다니! 십자군의 행위를 맹비난하며 십자군 전체를 파문시켜 버렸다.
교황의 눈 밖에 난 십자군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때마침 비잔틴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알렉시우스 3세 황제의 폭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망명 중이던 황제의 조카이며 황세자인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십자군에 자신과 자기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왕권을 되찾아주면 십자군에게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지원을 해 주는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가톨릭의 관할로 주겠다는 것이다.
곤경에 빠져있던 십자군은 일이 잘되면 이집트 원정도 큰 문제 없이 하고, 교황의 마음도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돌로의 야심은 차라에 이어 동방 무역의 최고 요충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인노첸시노 3세 교황은 앙겔루스의 제안에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를 공격할 수 없다며 거절한 바 있었다. 십자군 측에도 혹여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거부할 것을 명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십자군과 단돌로의 선동, 원정의 실패를 두려워한 각국의 제후들과 장수들, 예전부터 비잔틴 제국에 깊은 원한이 있던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 공작은 결국 기수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렸다.
베네치아 학파 대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것을 그린 것이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베네치아 학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야코포 팔마 일 조바네(Jacopo Palma il Giovane, 1544~1628)의 ‘1204년 4월 13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이다.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 대회의실에 있다.
야코포의 부친 안토니오도 화가였고, 삼촌 팔마 일 베키오와 외삼촌 보니파시오 베로네세도 유명한 화가였다. 한 마디로 팔마 집안이 모두 화가였다. 야코포는 1564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우르비노의 공작 구이도 발도 2세 델라 로베레의 극찬을 받으며, 그의 궁정으로 초대되어 1567년 5월, 트라이아노 마리오가 우르비노 공국의 대사로 로마에 파견될 때 함께 가서 4년간 있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1568년, 「미술가 열전」에 나오는 ‘레체의 마태오 초상화’를 그렸다.
라파엘로와 틴토레토를 연구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스승 티치아노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스승을 도와 유명한 ‘피에타(La Piet)’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는 베네치아 학파에 머무르는 한편, 로마에 있는 동안 습득한 매너리즘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628년 극심한 가래로 사망할 때까지 400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그의 매너리즘 연구가 빛을 발휘하는 작품의 하나로 간주된다.
로마 교회가 동방 교회에 가한 지울 수 없는 상처
십자군은 도시를 3일간 짓밟았다. 강간과 살인은 물론 저택에 침입하여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쳤고, 건물에 박힌 금과 보석도 뽑아갔다. 성인들의 유해와 귀중한 성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교회로 보내졌다. 베네치아 군인들은 수 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경마장에 있던 네 개의 청동 기마상을 가져가 성 마르코 대성당의 정면을 장식했다.
원정이랄 것도 없는 이 침범의 최고 수혜자는 베네치아였다. 그 후 마르코 폴로와 같은 상인들에 의해 베네치아가 누린 번영의 이면에는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 교황의 뜻을 어기고, 십자군의 난감한 상황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과 자기네 입지를 굳히겠다는 야심과 집요한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목격한 증인과 역사가들은 십자군이 같은 형제들에게 보인 탐욕과 수치를 이야기했고, 그들에게 가한 엄청난 속임과 잔인함을 교회사의 최악의 사례로 언급했다. 교회 입장에서는 로마 교회가 동방 교회에 가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기록됐다. 이에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로마 가톨릭이 그리스 정교회에 저지른 제4차 십자군의 만행에 대해 사죄했고, 이로써 사건 800년이 되는 2004년, 양측 교회는 화해했다.
그림 속으로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야코포는 자기 조국이 저지른 이런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너무도 극적으로 잘 묘사했다. 당시 십자군의 함대인 갤리선이 좁은 해변에 꽉 들어차 있고, 배에서 혼잡스럽게 내리고 있는 수많은 병사,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십자군, 연기인 듯 구름인 듯 도시의 파괴를 묘사한 분위기는 총체적인 혼돈의 상황을 포착했다. 이렇게 성안으로 들어온 십자군은 성문중 하나를 열었고, 군 병력은 송두리째 도시로 진입했다. 수비군의 전투 의지가 꺾인 것은 한순간이었다. 성벽은 우측으로 뻗은 원근법적인 구도로 넣었다. 색의 대비와 크고 작은 인물의 극적인 몸짓을 통해 매너리즘의 특징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가장 매혹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