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는 것이 주는 교훈
성경본문 : 잠언 14: 10-11
10.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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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승 목사(일산 소망교회)
오늘의 본문은 잠언 14:10-11입니다
10: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예하지 못하느니라”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부터 동의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가까운 서양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신발이 어디가 조이는지 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로 인해 고통하고, 또 자신만의 기쁨의 이유를 지니고 있는 참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정말 속에 있는 고통의 이유나 기쁨에 대해서 알리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느끼는 그만큼 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잠언은 “내 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결국은 너 혼자야”라는 푸념조의 언급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고통을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나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예할 수 없다는 사실적 말씀이 우리 신앙인에게 삶에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1. 먼저 우리는 이것이 인간의 실체라는 사실에 의해, 혹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 주지 못해도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에 분노하거나 슬퍼합니다
그러나 말씀과 같이 상대방이 나의 슬픔이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해도, 그것은 “그와 내가 달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결코 내가 아니기 때문에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아파도, 엄마가 수술을 하여도, 아이들은 우리의 기대만큼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에 섭섭함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다른 존재입니다. 자녀들이 그렇다면, 심지어 다른 이들이 내 자신의 감정에 일치 할 수 없음이 분노의 이유일 수 없는 것입니다
Elster라는 사람은 “가장 내적인 느낌은 결코 충분히 다른 사람들과 교분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느낌으로 자신들을 완전하게 커버할 수 없으며, 결코 다른 사람에 의해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것에 의해 각각의 분리된 인간의 개성됨의 가치와 중요성은 두드러진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도는 우리가 ‘획일적인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즐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불편함이 아닌 다양함의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도 한 종류만이 아니고, 꽃도 여러종류로 만드신 것을 보면 우리의 다양함은 즐김의 요소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 인간일 수 밖에 없는 다양성에서부터 기인한 것임을 받아 들이는 사람만이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Furthermore, 개성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이 타락 이후로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성경적 사실에 대한 이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우리의 여유를 더욱 폭 넓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 이후로, ‘말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사실에 대한 설명이기 보다, 그 안에 담겨진 목적을 위해 그 용도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상대방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 타락이라는 좀 더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좀 더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를 지닐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대한 나의 태도를 새롭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늘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배려라 합니다
상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상대방이 말한 것에 대하여 최대한의 선한 의도로 이해해 주려하는 것이 가능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를 같이 동행해 주며, 겉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속옷까지도 주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인간의 개별됨이라는 한계와 타락으로 인한 상대방에 대한 이해 부족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11: “악한 자의 장막(house)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tent)은 흥하리라”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것은 집과 텐트입니다
악한 자의 장막은 house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악인의 가정과 집이 혹 터가 든든한 집처럼 보일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외견상으로 무너질 염려가 없어 보이는 집이라는 것이지요
반면에 의인의 장막은 “tent”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방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유목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쉼을 위한 장소라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쉽게 부숴질 것만 같은 집이었습니다
의인의 이 땅에서의 삶은 그리 보일 수 있음을 성경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악인의 장막이 흔적도 없이 쓰러질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사 14:23)
“멸망의 비로 소제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반면 의인은 꽃이 필 것이며, 가지를 칠 것이 약속되어집니다
단순히 위험과 환난에서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번영과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다시 말하면 의인의 가장 연약한 상태가 악인의 최고의 번영보다 실제로는 더 안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 땅이 다인줄 알며, 불의한 방법으로 형통함을 좆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 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대하여 무정한 사람들의 잘됨을 배우려 하지 말 것을 성경은 권합니다
자신이 지닌 권력이나 지위를 가지고, 자기의 느끼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려는 사람을 본받지 말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은 채로, 살아가려는 성도들의 삶은 마치 텐트 속의 삶과 같이 불안해 보이고, 초라해 보일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인들에게 반드시 ‘멸망의 비’를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bring about justice)…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He will bring about justice for them speedily)”라는 주의 말씀을 확신하는 무리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믿음을 지니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나님께서 공의를 실현시키셔서 악한 자에게 멸망을 의로운 이들에게 번영과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그대로 실현하여서 사는 믿음을 사람들 가운데 보겠느냐?’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였습니다
“믿음 안에 자라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의는 종교적인 의만이 아닌, 삶 속에서의 의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의인입니까?
우리는 어느 장소에서 의인입니까?
그 약속을 믿는 이들로서 분명 다른 삶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귀히 여길 때에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다
주고, 나누며, 섬기고자 할 때에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입니다
주지 않으며, 나누지 않으며, 섬기지 않음은 무정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악인의 범주에 속한 것이요, 멸망의 때를 기다리는 자의 태도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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