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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5:1-3 하나님이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 시편이 압살롬의 모반에 관련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모반으로 다윗은 보좌에서 쫓겨났으며 광야에서 고통을 겪으며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사울의 핍박을 받아 위험에 빠졌을 때 쓴 것 같습니다.
이 시는 고통을 토로하고 보살펴주시기를 애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의 슬픔을 맡기고 간구합니다.
다음에 이 시인은 앞으로 얻을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시인은 그 구원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교훈을 위한 다윗의 시, 지휘자를 따라 느기놋에 맞춘 노래 - 칼빈)
본문 1-3절은 “(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 소서 (2) 네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내게 유의 하시고 응답하소서 내가 말할 때에 울부짖고 소란을 피울 것이니이다 - 칼빈)
(3)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 를 핍박하나이다” 입니다.
시가 시작된 말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때 심한 고통 중에 애 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뛰어난 용기를 가진 성도였던 다윗에게 그와 같이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그 고통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דידא(아리드)라는 말에 대한 번역인 ‘내가 이겨내겠다’는 문맥에 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말을 좌우하는 굽힘이 없는 정신을 자랑하기는커녕, 다윗은 자기가 크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면서 자기가 당하는 불행에 대한 느낌을 전하고자 애쓰기 때문입니다.
3절의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는 말은 1절이나 2절, 혹은 이 두 구절에 함께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55 편
‘소리’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원수들이 그를 대항하기 위해 많은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 의한 시끄러운 소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죄없는 자에게 습성처럼 나타냈다고 생각된 위협을 말합니다.
또 다윗에게 ‘죄악을 더하여 주었다’라는 말을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에게 터무니없는 죄를 씌웠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해석하면 억지이며 문맥과 거의 불일치합니다.
이 말은 ‘그의 원수들이 노하여 그를 대항하여 싸웠다’는 그 다음 구절과 일치됩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더하여 주었다’는 말은 원수들이 다윗이 멸망을 받도록 애매하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간악하게 흉계를 꾸민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구절을 좀 다르게 말하고자 했다면 “노하여 그를 대항하여 싸웠다”라는 말은 그들의 공공연한 폭력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 ‘죄악을 더하여 주었다’라는 말은 그들의 기만적인 반역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서는 우리가 ‘죄악’이라고 번역한 ןוא(아벤)은 숨은 악의를 의미할 것입니다.
“악인의 압제”라는 말은 여기서는 ‘핍박’의 능동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악인’이란 말을 자기 원수들에게 적용시킬 때에, 다윗으로서는 비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암암리에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핍박 받을 때, 얻는 가장 큰 위안은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핍박을 받을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방패와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시편 55 편
시55:4-8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칼빈은 이 시편이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 받으면서 지은 시라 합니다.
1. 본문 4-5절은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당한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이런 단어들을 쓰는 사람은 온화하거나 여성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조를 가졌다는 뚜렷한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또 다윗의 하소연은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입힌 가혹한 손상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다윗이 이때 당한 고통은 심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 하나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이 가진 강한 참을성도 심한 시련의 기간에는 그들을 지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동안에는 우리 모두는 훌륭한 군병들입니다.
그러나 숨막힐듯한 싸움을 치러야 될 때에는 우리의 약점이 곧 드러납니다.
사단은 이에 편승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으로 도우시던 것을 거두시고 붙들어주지 않는다고 넌지시 말하여 포기하도록 우리를 충동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한 실례를 다윗에게서 봅니다.
다윗은 여기서 밖으로부터의 재난에 의한 곤란한 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속에 있는 무서움 때문에 몸부림칩니다.
또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간청할 때 다윗의 영혼이 극심한 쟁투를 계속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사망의 위험” 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가 침몰할 위험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본문 6-8절은 “(6)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 로다 (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8)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도 도망할 수 없었다는 사실보다 더 강한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당한 형편이 애처로웠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시편 55 편
이 말씀은 오히려 방랑이 부러워할만한 복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방랑은 사람이면 아무나 당하는 방랑이 아니라 비둘기가 숨을 만한 한적한 곳으로 멀리 날아갈 때와 같은 방랑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추방에 의해 떠나 쉬는 특전도 다윗에게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기를 뒤쫓는 자로부터 날아갈 수 있는 하늘에 우리는 그 불쌍한 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둘기가 빠르기에 이 말씀에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비둘기가 날 때에 단지 한쪽 날개만을 사용하기에 히브리어에 단수로 ‘날개’ 라고 쓰였다는 우스운 관념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는 그러한 수의 변화는 자주 있습니다.
다윗은 둔하고 힘없는 비둘기가 매의 습격으로부터 날아가는 것과 같은 비유를 씀으로서 자기가 그 잔인한 원수들로부터 도망하기를 간절히 바람을 의미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동요하여 부끄러운 도주를 생각하고 자기 고향과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야의 한적한 곳에 숨으면 좋겠다고 말할 만큼 그 나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약속을 아득하게 잊을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다윗이 빠져들어 갔던 궁지는 실로 극심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격노에 대하여 마치 양보라도 하듯이 그 원수들이 허락만 한다면 ‘멀리 떠나 방랑하고 싶다’ 고 말합니다.
또 구원을 받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갖기 좋아하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다윗은 단지 시간만을 더 얻고자 그들에게 휴전을 제의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이 절망의 모퉁이까지 쫓겨간 사람의 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입니다.
다윗이 당하고 있었던 곤경이 그처럼 어려웠기에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을 먹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환경, 이런 불안한 근심 중에서 다윗의 마음이 사망에 대한 슬픔으로 억눌려 있었음을 이상히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일어난’ 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העוס(소이)를 혹자는 ‘폭풍우의’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오리바람에 의해 일어난 폭풍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 바람을 ‘회오리바람에 의해 일어난’ 바람이라고 한다면 그 완곡한 표현으로 보아 사나운 바람을 의미합니다.
여행자들이 뛰어서 가까운 집이나 덤불 속의 은신처를 찾게 하는 바람입니다.
시편 55 편
시55:9-11 내가 성내에서
다윗은 난관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해결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합니다(1-11).
신자가 견디기 어려운 난관에서 질겁(窒怯)해져서 기도도 못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계속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은혜를 입은 것이 벌써 구원의 서광(曙光)입니다.
본문 9-11절은 “(9)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10)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돌아다니니 성중에는 노동과 슬픔이 있도다 - 칼빈)
(11)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입니다.
지금 다윗으로서는 마음을 가라앉혔으므로 기도할 마음을 되찾았습니다.
만일 다윗이 더 오래 계속 불평한다면, 이 성과 없는 위안의 말을 지나치게 함으로서 유익보다는 손상을 당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옳다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할 때, 때로는 전혀 옳다고 볼 수 없는 불만을 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들의 경우에는 곧 정신을 차리고 믿음 있는 간구를 합니다.
“저희 혀를 나누소서”라는 표현에는 바벨탑을 쌓던 자들에게 임했던 심판(창31:7)에 대한 암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대체로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의 동맹을 깨뜨리시고 그들의 거룩하지 못한 도모를 이루지 못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의사 전달을 혼란시킴으로서 그들의 계획을 막는 능력을 행하셨던 기억할만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함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원수들을 약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서로 원한과 경쟁과 일치하지 않은 의견으로 그들을 분파로 나누십니다.
기도 중에 스스로 용기를 얻기 위해 다윗은 계속 자기 원수들의 악과 그들이 가진 악의를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죄악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곧 그들 위에 임하게 될 것이 예상됩니다. 이는 우리가 항상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 가운데 만연하는 무절제한 방종을 보고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멀지 않음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시편 55 편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판하도록 계속 기도하기 전에 다윗은 자기가 그들의 악과 해로운 성격을 충분히 알고 있음을 넌지시 말합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말하는 ‘성’이 예루살렘성인지, 그일라성인지를 알아내는데 필요이상의 수고를 했습니다.
다윗은 이 말로 그 나라 안에 공공연히 대중 앞에서 행해지는 죄악을 지적합니다.
‘성’은 숨겨져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와는 반대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분쟁이 뻔뻔스럽고 공공연하게 자행됨을 넌지시 말합니다.
성이 의미하는 것이 그 나라의 큰 도시였다는 것을 뜻한다 할지라도 이 시인이 그것으로 그 나라의 전반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 의견으로는 이 말이 일반적으로 은밀하게 행해지는 악이 당시에는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음을 의미하기 위해 분명히 어떤 한정적인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들의 죄악을 설명할 때, 그 죄악이 성벽위에 보초와 파수꾼을 세워두고 그 성벽의 주위를 왕래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에 그 나라를 다스리던 악의 흉악한 성격을 지적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성벽은 약탈과 침략으로부터 성을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사리가 거꾸로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즉 성이 요새로 둘러싸인 것같이 분쟁과 억압으로 포위당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성벽을 점유하고 그 위를 왕래한다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ןוא(아벤)이란 말과 למע(아말)에 관하여 앞에서 이미 주석했습니다.
“악독이 그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라고 선언함으로서 다윗은 수많은 죄악의 참 근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음 속이 부패하고 악한 계획에 빠진 그들이 강포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몰두하였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반적으로 다윗은 이 말씀에서 사울의 정치의 특징이었던 그 비탄스러운 혼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정의와 질서가 그 땅에서 밀려났었습니다.
다윗이 하는 설명이 한 성읍에 적용되도록 의도되었는지 많은 성읍에 그러했든지간에,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나라에서 분명히 위기의 전조는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들의 모든 성읍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시에서도 그랬듯이 다윗은 성읍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함에 있어서 분명히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심판이 당연한 것임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55 편
시55:12-15 나를 책망한 자가
다윗을 박해하는 원수는 보통 종류가 아니고 그의 친구였던 자로서 배신(背信)한 자입니다(12-15). 사람이 배신자에게서 당하는 고통은 유달리 아픈 법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원수에게 심한 저주를 선언하였으니 곧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15). 이것은 반역자 고라당이 당한 화(禍)였습니다(민16:33). 이것은 누구든지 자기 개인의 원수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감(私感)으로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천국의 공적(公敵)에게 선언한 것입니다.
1. 본문 12-14절은 “(12)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 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고통을 당한 상처에 쓰라림을 더해 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상처가 공공연한 원수들의 손이고 그의 친구인 척하는 자들로 인한 것들입니다.
אשנ(나샤)라는 말을 다윗이 자기의 공공연한 원수가 하는 책망은 ‘참을성있게 견딜 수 있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번역하는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은 공공연한 원수가 자기에게 책망을 한다면 자기를 겨냥한 매질을 막거나 피하는 것처럼 ‘그 책망에 맞설 수 있었다’ 는 것입니다.
아는 적은 우리가 경계 하나 친구에 의한 예기치 않은 타격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상반절에서 “내가 참았으리라” 하반절에서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라는 구절의 반복은 이 말씀에 더욱 완전한 의미를 줍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라 한 것은 그 원수가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폭력을 다 썼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이 하는 불평은 자기 방어를 불가능하게 했던 그 은밀한 반역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고발에 마음에 둔 사람이 아히도벨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시는 압살롬의 사건과 연관되어 쓰여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55 편
그일라성에 어떤 악명 높은 반역자가 있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다윗과의 친분이 알려진 큰 인물이 궁중에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아마 다윗의 눈에는 왕의 호감을 얻고 자기를 죽이려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전에 자기와 가졌던 우정을 배반한 여러 명의 궁중 인물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들과 이들의 머리 위에 있던 유명 인물이 함께 그가 겨냥해 말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우리는 다윗이 했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숨김없는 박해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에 의한 은밀한 반역도 당하게 될 것을 예상해야 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사단은 칼과 공공연한 싸움으로 교회를 공략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계략과 부정 수단에 의한 숨겨진 무기로 교회를 손상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서 원수들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이는 버나드(Bernard)가 말하듯이, 우리가 그들로부터 떠나갈 수도 없고 그들을 쫓아버릴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적입니다.
그 인물이 누구였든지간에 다윗은 그를 “나의 동류”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ךדע(에라크) 라는 말은 어떤 이들이 번역하는 것과 달리 우리 의견으로는 ‘평가에 있어서 나와 동등’ 하거나 다른 이들이 번역한 것같이 ‘그가 자기의 두 번째 몸으로 인정한’ 사람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우애의 공통 결속이 깨진 것을 불평하는데 이는 친족 관계나 직업, 사무 등은 신성한 것으로 존중되고 유지돼야 하므로 변동 심한 결속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또 자기 원수가 전에 서로 은밀히 의논하기를 좋아했으며 함께 신앙의 모임에 왕래했던 것에서 자기의 ‘인도자’요, 지도자였음을 말합니다.
이 모든 사실은 다윗이 당한 배반이 더욱 심하게 되었던 배경을 말해줍니다.
שגד(레게쉬)는 ‘연례적인 모임에 참석하려는 흥분’이 아니라 ‘동반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갔을 때 다윗의 원수는 가까운 동무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세상의 일뿐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절친한 동료요, 지도자로 자기가 우러러 보았던 사람에게 배반당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우리를 관련짓는 모든 자연스러운 결속들을 귀하게 여기도록 성령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인류는 공통적이고 우주적으로 하나라는 사실 이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욱 가까이하고 싶은 신성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웃관계, 친족관계 혹은 직업에 의해 더욱 가까이 연결되면 될수록 이런 연결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조정의 결과임을 더욱 알게 됩니다.
신앙 결속이 모든 결속 중에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시편 55 편
2. 본문 15절은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 무리 전체를 공격합니다.
그 민족 전부가 아니라 자기를 핍박하는데 매우 큰 몫을 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이 저주가 임하도록 빌 때 다윗은 그들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성령에 의한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아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순간적인 분노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열정으로부터 나온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소원을 갖게 되면 사소한 자극을 받을 때마다 우리의 원수들에게 저주를 하면서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스스로를 합법화시킬 것입니다.
보복의 정신은 영원한 멸망을 받기로 이미 정하여진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시도록 기도했던 다윗이 가진 그 거룩하고 억제된 열심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죽을 운명을 갖게 하시오며’라는 번역은 무리이며 누군가가 한 ‘사망을 그들의 채권자로 세우소서’라는 번역도 역시 무리입니다.
우리가 한 번역이 가장 명확하고 간단합니다.
그의 원수들이 “산체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라는 기도에서 다윗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받은 형벌을 암시하는 것 같다는 관찰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홀연한 파멸, 곧 생각지도 못한 파멸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빎으로서 자기들은 죽음의 벌을 피할 것이라는 그들이 형통할 때 가지고 있었던 오만한 자신감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주여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에 깊이 빠져 자기들은 사람의 공통된 운명으로부터 면제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땅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게 하소서 - 그들의 온갖 허세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그들이 멸망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막지 말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심이 그들에게는 마땅하나이다’ 라고 기도한 것과 같습니다.
이 구절의 하반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드린 기도에 대한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다윗이 원수들에 개인적인 분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지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 위에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한데 대한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다윗은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라는 말로 악독이 그들의 처소에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에 “저희 가운데” 라는 말을 덧붙여 이 사실을 더 충분히 설명합니다.
즉 그들이 악을 자기들 안에 소중히 간직하여서 그 악은 그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동반자이며 한 지붕 밑에서 그들과 함께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시편 55 편
시55:16-19 나는 하나님께
다윗은 그런 괴로움과 위험 중에서 기도와 신앙을 재강조(再强調) 합니다(16-23).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하여도 그와 함께 하여 주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들보다 다 반대하여도 그와 함께 하여 주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들보다 강하십니다.
1. 본문 16-17절은 “(16)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 로다” 입니다.
다윗은 전에 이루어진 것을 말하지 않고 기도의 의무와 희망과 확신을 갖도록 자신을 충동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동사의 미래 시제를 살렸습니다.
자기가 피신할 만한 확실한 수단 없이 곧 당하게 될 죽음에 당면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기도를 계속하겠다는 자신의 결의를 선언합니다.
또 다윗은 자신의 기도는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합니다.
곧이어 기록된 구절에서 다윗은 기도에 참을성을 갖겠음을 더욱 상세히 말해줍니다.
다윗은 기도하겠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함에 있어서 기운이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열심과 열정을 보이겠다고 결심합니다.
다윗은 정확히 ‘저녁, 아침, 정오’를 들먹이며 자세히 말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이 지켰던 기도 시간들이었습니다.
희생의 제사가 성전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려짐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집에서 스스로 기도에 전념하도록 교훈을 받았습니다.
정오 역시 특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하여 본래 마음이 잘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규칙에다 얽매어 놓지 않으면 기도하기에 태만해지고 완전히 그만둘 위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지정된 규칙적인 시간을 정해놓으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이 연약함을 고려하셨으리라 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은 공중 예배와 마찬가지로 은밀히 드리는 예배에도 적용돼야 합니다.
시편 55 편
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과 다니엘이 보여준 모범(단4:3)에 나타납니다.
오늘날은 교회 안에서의 희생제사는 더 이상 시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의무에 대한 내키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이겨내기 위한 자극이 다윗에게서처럼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기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겨낼 수 없었던 슬프고 근심되는 마음으로 간구의 열심을 보이도록 울부짖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당한 고통이 극에 달해도 그 고통이 자기가 주께 자기의 불만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으면 반드시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2. 본문 18절은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입니다.
앞 두절을 미래 시제 대신에 완료 시제로 읽는 사람들은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전에 드린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시제가 완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동사를 미래 시제로 읽는다 해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다윗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은 여러 경우에 자기가 했던 명상의 요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삽입하여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 중에 어떤 말을 했다면 그 기도 이후에 따라오는 결과를 덧붙여 진술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 자기가 받은 자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전에 드렸던 그 기도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을 받고 평안해졌다’고 하는데 이 말은 강력한 표현입니다.
또 자기가 처했던 위험과 자기가 그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은 수단이 거의 기적적인 것이었음을 상세하게 의미합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원수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들의 견해에서 ‘나를’ 이란 말은 ‘나를 대항하여’ 라는 말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수많은 원수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또 자기를 온전히 구원하실 때 보여주신 그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시편 55 편
다른 이들은 다윗이 주를 경외하는 자들 주위에 무수히 진을 치는 천사들(시34:7)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태’로 번역한 ב(베트)라는 글자를 그들은 다른 여러 구절에서처럼 여기서도 단지 부가적인 글자로 생각합니다.
이 구절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라고 읽게 할 목적에서입니다 이런 해석은 결코 무난한 진리를 전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돕는 자를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연약함에 적응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룰 때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심이 옳다고 여겨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받은 구원이 크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원수들에 관해 말합니다. 또 다윗은 그 원수들의 수를 말합니다.
3. 19절은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오래 전부터 좌정하여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저희를 괴 롭게 하시리라 이는 저희가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함이라 - 칼빈)” 입니다.
‘보응하다’로 번역한 הנע(아나) 동사의 경우 ‘증거하다’ 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대적하는 증인으로 일어나심을 다윗이 말한다고 합니다.
이 말의 구문을 볼 때 이런 의미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ב(베트)라는 글자는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에 덧붙여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여기서 암암리에 또 일종의 반어적이긴 하지만 ‘고통스럽게 하다’ 또는 ‘벌주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극히 보편적으로 הנע(아나)는 ‘보상하다’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들으실 것으로 말하고 나서 자기 원한을 갚아주시는 방법으로 자기 원수들을 형벌하심으로서 자기에게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적용시키는 별칭, 즉 설명적 호칭은 경건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당황할 때에 위안을 주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조급하게 된 것은 주께서 영원한 분이심을 생각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가련한 인간들이 자기의 나약한 견해로 하나님을 헤아린다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그의 영원한 보좌에서 모셔 내려서 변동하는 세상의 동요 속에다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ףלח(할랍)이라는 말이 ‘변하다’는 물론, ‘절단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에 어떤 이들은 다윗이 여기서 악한 자들의 멸망이 지연되고 있음을 불평한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55 편
그러나 이 생각은 그럴듯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변화’라는 말로 번역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을 택한 사람들도 이 구절의 의미에는 여러 견해를 갖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그들의 성격으로 볼 때 더 좋아지기 위한 변화란 기대할 수 없고 그들은 도무지 회개할 수 없을 만큼 심히 악에 빠졌고 다시는 인정이나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없을만큼 전적으로 지독한 성격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더한 추리력을 가지고 다윗은 불평하는 말로 그들의 번영은 사람이면 누구나 당하는 운명에서까지 면제된 것처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죽어야 하는 불행에서 면제되는 특권이나 받은 것처럼 방종으로 부패되고 두려움을 주는 온갖 원인을 자기들의 마음으로부터 없애버리는 자들로 설명합니다.
이 연결의 불변화사는 ‘그들은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는 번역문에서와 같이 귀결절의 의미를 좌우합니다.
악한 자들이 쾌락을 누리도록 오랫동안 내버려두면 둘수록 그들은 악을 계속 행하면서 더욱 강퍅해질 뿐이며 교만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넘기시면 우리는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두 부분이 연결되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자기들의 행위에 방해를 받지 않는 자들의 반쯤 신이 되었다고 하는 그릇된 생각에 대한 책망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교해보면 인간 생명의 과정은 너무도 가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잘되고 있을 때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시인이 암시해 주는 이유는 안일한 정신에 빠져들거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전능하신 분에게 도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55 편
시55:20-23 저는 손을 들어
다윗은 무엇보다 무서운 원수, 곧 배신자의 행위의 가증함을 다시 진술합니다(20).
거기에 따라서 또 다시 자기의 믿음을 확고히 할 뿐 아니라 남들더러 하나님을 신뢰하라고까지 부탁합니다(21-23)>
1. 본문 20-21절은 “(20)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 도다 (21)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입니다.
다윗은 23절에서 그 원수들에 대하여 복수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악한 무리들의 지도자에 관하여 말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지도자가 화평한 중에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상호 신뢰를 깨뜨린 자라고 비난합니다. 지도자는 자극을 받은 일도 없으면서 자기가 싸우겠다는 의도를 밝히지도 않고 느닷없이 반역하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라고 말함으로서 그 지도자의 죄악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유순하고 호감을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칼이나 살처럼 상처를 내는 적의심(敵意心)과 잔인성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이는 속이는 자들이 입술에 꿀 섞은 독을 바르고 다닌다는 흔한 속담과 같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얼마나 그럴듯한 많은 약속들과 달콤한 말을 했던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중에 있던 자들도 같은 수법을 썼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을 꾀어 멸망으로 끌어들이는 교활한 사람들의 꾀 앞에 놓여 있는데 이는 그들이 겪는 특별한 시련입니다.
이때에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순진한 뜻을 갖도록 권면하시면서 이와 같은 모든 음흉함과 특히 반역적인 간사함은 책망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하십니다.
2. 본문 22절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입니다.
בהי(야하브)는 ‘주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ךבהי(예호브카)는 문법의 일반적 규칙에 따라서 ‘너의 주는 것’ 또는 ‘너의 선물’로 번역돼야 합니다.
주석가들은 ‘너의 짐’으로 해석하는데 그들은 이 번역에 대한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시편 55 편
동사 בהי(야하브)는 ‘짐지우다’ 라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또 그 말에서 나온 명사가 우리가 만족하도록 ‘짐’을 의미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너의 선물을 여호와께 드리라’라는 번역문이 의미가 거칠고 이치에 잘 맞지 않기에 그러한 의미를 지닌 말을 만들어내야겠다고 느낀 것이 분명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를 누르는 모든 염려와 고통을 하나님 앞에 벗어버려야 한다고 표현하는 그들의 마음은 경건하다고 인정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주의 섭리에 맡기는 것 외에 영혼의 근심을 없애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이 ‘짐’이란 의미로 번역된 실예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수동의 의미인 ‘선물’ 혹은 ‘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도록 바라는 온갖 은혜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면 중요한 교훈을 주는 이 번역이 옳습니다.
다윗의 권면은 우리의 근심들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청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면서 우리의 요구와 간청을 올려야 합니다.
외쳐대면서 기도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고 그들의 지나친 걱정과 불안 때문에 전능하신 분께 명령하는 투로 기도하려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우리가 무엇을 원할 때 생기는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간구에 있어서 바른 겸손의 태도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실 복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맡길 것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지나친 성급함을 가졌느냐 아니냐의 단 한 가지 시험 방법이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네가 주께서 전에 내려주신 선하심이 어떠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 사랑 안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이 말씀의 순전한 의미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자신을 격려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규칙을 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그가 너를 먹이실 것이라’(칼빈)는 위에서 말한 견해를 선명하게 확증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궁핍을 당하다 보면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맡아 실로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공급하심으로서 목자의 역할을 다 해주실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킵니다.
다윗은 ‘의인이 넘어지거나 항상 요동케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곧이어 말합니다.
טומ(모트)가 ‘넘어짐’으로 이해된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확고하게 세우셔서 의인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 됩니다.
시편 55 편
그러나 ‘요동하다’ 라는 번역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의인들이 한동안은 비틀거리고 그 의인들을 향해 사방에서 불어오는 심한 비바람에 맞아 쓰러질 뻔한 모습을 봅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움을 당하다가 다윗은 그 의인들이 마침내 자유롭게 되어 그 의인들이 당하는 온갖 고난과 염려는 평화롭게 끝나고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외칩니다.
3. 본문 23절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에 관한 말로 되돌아갑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그의 원수들 앞에 놓인 종말을 보여줍니다.
의로운 자들이 자기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발아래 밟히게 될 때 위로받는 단 한 가지는 자기들을 둘러싼 그 위험이 마침내는 평화롭게 된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에게 절박히 다가온 확실한 파멸을 믿음으로 분간합니다.
תחש(샤하트)는 ‘무덤’을 의미하며 그들이 ‘무덤의 웅덩이’ 속으로 던져진다고 말한다면 합당하지 않게 여겨지므로 어떤 이들은 ‘파멸의 웅덩이’라고 읽기를 원합니다.
תחש(샤하트)라는 말에는 ‘부패시키다’ 또는 ‘파멸시키다’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로 읽든지 문제는 안 됩니다. 단지 한 가지 다윗이 그 악인들이 일시적일 뿐 아니라 영구적인 멸망을 받게 될 것을 주장하려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또 이 말씀 중에서 다윗은 그 악인들과 의로운 자들 간의 구별을 지적합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세상의 재난 속에 여러 번 깊이 빠져든다 해도 다시 올라옵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원수들에 대한 파멸은 치명적이라고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그 악인들이 썩어지게 되는 무덤 속으로 그 악인들을 던지시기 때문입니다.
그 악인들을 ‘피를 흘리는 사람들’로 불러서 다윗은 자기가 주장한 사실을 확증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보응은 잔인하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 어김없이 미칩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이 그런 기질들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임할 형벌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 ‘피를 흘리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우리의 눈앞에서 실제로 보여지고 있는가? 만일 이 원칙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면 단지 자기들의 방자한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학살시킨 폭군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일반적인 살인자들이 아닌 그들에게 시인은 이 말씀으로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 폭군들이 나이가 많도록 생존하는 일이 종종 있지 않는가?” 라고 물을 것입니다.
시편 55 편
때로는 그 폭군들이 그렇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 일을 연기하신 이와 같은 실예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시인이 하고 있는 주장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확인됩니다.
잠정적인 심판에 관하여, 말하자면 사건의 일반적 원칙에 따라서 우리는 악한 자들 위에 심판이 임하는 것을 봄으로서 충분합니다.
우리가 37편을 설명할 때 충분히 말한 것처럼, 이 문제에 관한 엄정하고 완전한 처리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자들의 생명이 아무리 길게 연장된다 할지라도 극히 심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괴로움을 당하기에 그 생명은 생명이라기보다 차라리 죽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아래서 그리고 가장 야만적인 형리(刑吏)보다 죄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양심의 고소를 당하는 생명은 죽음보다 더욱 비참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인생의 노정을 바로 평가한다면 주님 안에서 살다가 죽어간 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참 생명의 목표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 안에 사는 자들에게는 육신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자들에 의한 폭력이나 속임수로 공격을 당할 때 그 악인들의 운명은 길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 악인들은 마치 회오리바람에 의해서처럼 불려갈 것입니다. 또 온 세계를 멸망시킬 것처럼 보여진 그 악인들의 음모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시의 결론으로 덧붙여진 짧막한 구절은 사악한 자들에 대한 이와 같은 심판에 대해서는 믿음과 인내의 연단 속에서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시편의 선지자 다윗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소망 안에서 쉼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사악한 자들이 지상으로부터 그렇게 갑작스럽게 끊어져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오래도록 계속되는 불법을 끊어버림으로서 우리의 인내가 밝게 드러날 것에 대한 소망을 우리가 지닐 수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56:1-4 하나님이여
다윗은 하소연 섞인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하며 마음의 슬픔을 달랩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과 다른 원수들 때문에 받아야 했던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해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표명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다윗이 암시하는 그 위험을 겪은 이후에 쓰였을 것입니다.
이 시가 다윗이 이미 받은 구원을 감사할 때에 쓰여 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다윗의 믹담, 지휘자를 따라 먼 곳에 있는 잠잠한 비둘기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칼빈)
표제가 말해주고 있는 일단의 역사는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은 안전하다고 여겼던 모든 은신처로부터 쫓겨나 아기스왕에게로 도망쳤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붙들렸다고 말합니다.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라는 아기스의 영감 받은 말로 쓰여진 대화를 볼 때 그가 그러했었음을 짐작합니다.
그들이 방문 중에 사악한 계책을 부리고 있다고 다윗을 의심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미친 척함으로 그 경우를 모면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그가 간곡히 요구했고, 또 다윗이 이런 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때에도 보이지 않는 중에 믿음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분명히 죄가 되는 탈출을 계획하는 지나친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빠져 들어간 그 절망적인 위급의 상태에서 다윗이 취한 그 방법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의 권위를 떨어드리는 것일지라도 두려운 나머지 생명을 건질만한 교묘한 꾀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도량이 크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다윗의 마음 속에 있었던 신앙과 공포간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는 이 시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시편 56편
‘잠잠한 비둘기에 맞춘’(칼빈) 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노래의 시작 부분에 쓰였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이 비둘기에 비교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추측은 다윗이 지금 당하고 있는 상태를 고려하여 당연히 이러한 은유를 썼을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논증됩니다.
특히 ‘먼 곳에 있는’ 이란 말이 붙어 있으므로 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핍박자들의 격노 때문에 원수의 나라에까지 쫓겨 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 말을 ‘궁전’으로 번역하여 덧붙인 내용은 이 말과는 관계가 멉니다.
‘믹담’은 어떤 특별한 유형의 곡조이거나 아니면 어떤 악기를 말했을 것입니다.
1.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 며 압제하나이다
(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나의 원수가 날 마다 나를 삼키나이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여 정말 나를 대적하여 싸우는 자가 많 도소이다 - 칼빈)” 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외국 원수들을 말하는지 국내 원수들을 말하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왕에게 이끌려 갔을 때, 그는 두 떼의 이리들 사이에 선 양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다윗은 블레셋인들에게 심한 미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다윗은 자기 동포로부터 이에 못지않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다음 절에서 자기에게 많은 원수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에서 다윗은 막연히 ‘사람’ 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자기를 대적하여 연합하고 있으며 자기는 사람들 중에서 인정이란 느껴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필코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힘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종일’ 이란 다윗이 사울과 그의 무리들을 지체없이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다윗은 심히 수가 많고 야만적인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기의 운명이 비참함을 슬퍼합니다.
어떤 이들은 שאף(샤아프)를 ‘주목하다’ 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삼켜버리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공격했던 그 그칠 줄 모르는 분노를 의미하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시편 56편
לחם(라함)도 ‘먹어 없애다’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일반 번역을 지지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 구절의 앞부분에 사용된 은유와 더 잘 어울립니다.
이 사실은 그 말이 ‘대적하여 싸우려고’(칼빈)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하는 이 번역에다 다른 의견을 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지나가는 말로 이 절의 하반절을 마치 다윗은 천사들의 도움을 말하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나와 함께 싸우는 많은 자들’이라고 읽는 사람은 이 구절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절 전체에서 하소연하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3절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구절은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과거 시제로 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자기가 두려워했던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그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은 부인합니다.
위험이 다윗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희망을 포기하도록 유혹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윗은 위험을 경멸하는 굉장한 영웅심을 가졌다고 자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두려움을 느꼈다고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확고한 결의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참된 증거는 우리가 두려움에 대한 유혹을 받을 때에 그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고, 그 두려움이 우세해지지 않도록 막는데 있습니다.
두려움과 소망은 서로 반대 되고 양립할 수 없는 감정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어느 정도 따르지 않고서는 소망이 충분히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관찰에 의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에는 소망이 작용할 만한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오히려 참된 소망은 잠자고 있습니다.
오히려 참된 소망은 낙심한 혼을 소생시키고 동요를 진정시키며 혼란을 안정시킬 때에만 우세하게 작용합니다.
소망이 다윗의 마음 속에 나타났던 모습은 이러했었습니다.
무서움을 느꼈으나 믿음을 갖었던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위험이 큰 것임을 알아차렸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확실한 소망으로 마음을 안정시켰던 것입니다.
시편 56편
3. 본문 4절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입니다.
다윗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면 흔히 그렇게 하듯이 희망을 불러일으켜 더욱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사실을 압니다.
그 백성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심한 투쟁을 겪고 난 후부터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나 충만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또 우리가 가장 만만치 않은 원수들과 맞붙어 겨루고자 하는 각오를 갖게 됩니다.
‘찬양하올지라’ 라는 말은 ‘영화롭게 하다’ 혹은 ‘자랑하다’ 와 같은 의미입니다.
다윗은 지금 의기양양한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고 확실한 소망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다윗이 가진 기쁨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에 의하여 버린바 된 자같이 보여질지라도 하나님께서 해주신 진실한 약속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말해줍니다.
그런 중에도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자랑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도움이 없을지라도 또는 그 도움이 현저하게 없어져버렸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해주신 신실한 말씀의 안전함으로 만족하면서 평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선언은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즉시 허락해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참으로 초조해하고 수군거리지 않는가!
우리가 허탄한 것처럼 여겨지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이처럼 의존될 때, 우리가 가지는 불만은 입 밖에 표출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다윗이 갖가지 위험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붙들만한 아무런 근거도 갖지 않고 그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던 것은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반절에 담긴 감정은 얼른 보기에 깊이 생각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지키실 수 있고 그들이 해를 입힐 때 쓰는 능력보다 우리를 지키실 때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보다 더욱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그 패역한 불신앙이 얼마나 큰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불신앙은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이 피조물의 힘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 원수들의 위협을 하찮게 여긴것은 다윗의 믿음을 증거해 줍니다
또 하나님의 성도들 모두가 위험에 대해 똑같이 경멸할 원수들을 향하여 다윗이 보여준 우월감에 감명을 받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시편 56편
원수들의 공격을 받을 경우 싸움은 사실상 원수와 하나님 사이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의심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성도들의 생각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원수들의 가장 큰 목적은 주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만일 주께서 우리 우편에 서시고 손가락 한번만 움직이거나 그 입기운 한번으로 우리 대적들을 흩어 없애시고 그 대적들의 얼빠진 책략을 혼란케 하실 수 있으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데 대한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인간의 수준에다 놓아야 할 것인가?
또 다윗이 거두게 될 성공을 그에게 대항하고 있는 자들의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계산해야 할 것인가?
‘다윗의 행동에 나타난 이 급격한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잠시 전에만 해도 다윗은 멸망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말했는데 지금 다윗은 자기 대적들의 새로운 세력을 우습게 여기고 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할 것 입니다.
대답은 ‘자기는 무서움이 주는 공포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들에 대한 온갖 감정을 완전히 딛고 일어났음을 넌지시 말해 주는 다윗의 말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다윗의 말은 구원에 대한 확실한 희망으로 자기 염려를 이겼음을 암시해 줄 뿐입니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 인간을 ‘혈육’ 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들이 가진 힘으로는 전혀 어떻게 할 수 없는 싸움을 해보려는 엄청난 어리석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더욱 새겨두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57:1-3 하나님이여
이 시편은 몇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사울과 그의 원수들의 박해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애원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하고 있는 근심을 표명합니다.
셋째로 다윗은 구원에 대한 확신 있는 기대를 갖고 행동합니다.
넷째로 다윗은 찬양을 하도록 자기 영혼을 격려합니다.
1. 본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믹담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입니다.
우리는 ‘믹담’ 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하여 오직 추측만 할 뿐입니다.
תחשת־לא(알다스헷) ‘멸망치 말라’ 는 말이 이 시의 제목으로 붙여진 이유에 관해서도 성경 주석가들은 동일한 불확실함을 가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당시에 잘 알려진 어떤 노래의 시작이었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 말이 다윗이 처해 있던 그 절박한 사정 가운데서 ‘오, 하나님! 나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라고 부르짖은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윗이 아비새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했을 때 다윗이 보여준 고귀한 원리를 찬양하면서 이 말을 이 시에다 제목으로 붙였다는 의견을 갖습니다.
그들은 이 말이 영감받은 사가(史家) 다윗이 사용했던 말이라고 기록한(삼상26:9) 바로 그 표현이라는 사실로 자기들의 견해에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기도들은 다윗은 아비새에게 어떤 종류의 명령을 내리기 전에 드려졌으므로 이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시가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졌던 어떤 노래의 영향을 받았거나 다윗이 잊혀질 수 없는 환경 즉 크게 위험했던 환경 중에 했던 것으로 다윗이 기록한 짧은 기도체의 말일 것이라는 앞서 말한 두 가정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겠습니다.
2.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하나님이 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는 내 영혼이 주를 의지하여 주의 날개 그늘에서 죄악이 지나가기까지 바라리이다 - 칼빈)
시편 57 편
(2)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입니다.
이 반복된 기도는 지금 다윗에게 가득 차 있는 슬픔이나 근심이나 불안이 일상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자비를 비는 다윗의 호소가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것으로 나타난 것은 주의할 만합니다.
다윗의 ‘영혼’ 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칼빈).
이 표현 형식은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강한 강조의 힘을 갖습니다.
이 표현 형식은 다윗의 의지함이 그의 가장 깊은 감정에서 나왔음을 말합니다.
다윗의 의지는 경박한 것이 아니라 깊고 든든하게 뿌리박힌 것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날개 그늘로 자기를 덮어 주신다는 확신을 말했습니다.
이 때에 다윗은 이와 동일한 사실을 비유적인 말로 선언합니다.
‘바라다’ 로 번역한 הסח(하사)는 때로는 ‘거주하다’ ‘피난처를 얻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구절에는 날개에 의한 보호가 암시되어서 이런 의미로 이해해도 합당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에다 온전히 맡깁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는 안전한 데 거처한다는 복된 느낌을 경험합니다.
다윗은 이 안전한데 거처함에 관하여 시편90편 첫 부분에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날개의 그늘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에게로 정답게 부르시기 위해 암탉이나 다른 새들이 그 새끼들에게 피난의 장소를 만들어 주기 위해 그 날개를 펴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처럼 자애롭고 온화한 부르심에 심히 느린 동작으로 응한다면 우리의 배은망덕과 고집은 그만큼 더 큽니다.
다윗은 막연히 하나님께 소망을 갖고 그 날개 그늘 아래 쉬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악독이 폭풍이나 회오리바람처럼 자기를 덮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악독’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הוה(하바)를 어떤 이들은 ‘세력’으로 번역합니다.
그 말의 뜻이 그렇다 해도 다윗은 자기를 스쳐가는 고난의 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난처가 되고 하나님의 날개 또한 자기의 피난처가 됨을 증명하여 주실 것을 선언한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번영의 평온한 태양을 받는 특전을 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중에 고난의 폭풍이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날개로 우리를 덮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희망을 갖기 위해 다윗은 기도를 계속합니다.
진실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 기도합니다.
시편 57 편
다윗은 자신의 위급한 상황 중에 하나님을 향하여 온 마음을 드리고 있음을 보입니다.
이로서 다윗은 자기가 희망을 갖고 있음을 여기서 실제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면서 다윗은 하나님께 존귀한 칭호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이행하시는 분 혹은 하나님은 일단 시작하신 일은 완성시키시는 분으로 찬송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דמג(고메르)는 138편 8절에서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두 구절의 의도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은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 백성은 완전히 구원시키시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의 마지막까지 계속 그들을 데려가며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 이 생각은 실제로 우리의 희망을 든든하게 해주고 유지시킵니다.
어떤 이들은 2절을 ‘나에게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께’ 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표현상의 강조를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우리 판단은 ‘나를 버리고 돌보시지 않는 하나님’이라 해야 이 말씀의 목적에 맞습니다
이 경우에 이 문장은 반대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려 돌보시지 않고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손을 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계속 부르짖겠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이들이 제시한 ‘최대한도로 실행 혹은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부르짖으리로다 하나님의 엄중하심은 나를 향했다’ 는 해석은 억지입니다.
이 문장의 문맥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키고 있음을 이해시켜줍니다.
그 선하심의 불변성은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내시는 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3. 본문 3절은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이 위안을 받게 하려고 신성한 명상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다윗은 자기 희망이 결과적으로 실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유익을 위해 개입하신 사실을 이미 본 것처럼 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양합니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라고 말했는데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을 생략형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을 보내실 것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떤 것을 꼭 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은 다윗이 기대하고 있었던 구원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하고 기적적인 것임을 의미합니다.
시편 57 편
‘하늘’ 이란 땅이나 자연적 수단에 의한 구원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곧이어 나오는 말씀은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이 말씀에다 우리는 히브리어의 전치사 מ(멤)을 넣어서 ‘그가 나를 치욕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을 동격의 절로 보고 ‘그가 나를 삼키려는 자의 치욕에서 나를 건지실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이 번역의 첫 부분을 ‘나를 숨어 기다리는 자에게서’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열심히 떠들어대며 방심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구원시키시고 다윗의 원수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을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때리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기대했던 구원이란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기적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진실만을 믿고 기대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진실을 다윗은 여기서 손처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비와 진실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57 편
시57:4-6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다윗은 위험한 원수들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4), 하나님을 높이기 원합니다(5).
다윗은 과거의 신앙체험에 의하여 진정한 성도를 해하려는 원수들의 흉계가 필경 그들의 자멸(自滅)을 가져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6).
본문 4-6절은 “(4)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더욱 신속히 관여해 주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호소의 방법으로 자기 원수들의 잔인함을 다시 주장합니다.
다윗은 그들을 사자에 비교하여 맹렬하고 마음 깊은 증오로 불붙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다윗은 그 원수들의 이는 창과 화살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원수들의 혀에 관해서 다윗은 독이 들어있는 비방을 넌지시 말합니다.
또 다윗은 이 독이 든 비방은 악한 자들에 의하여 팔려나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다윗은 그 비방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칼보다도 더 깊은 상처를 입힌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누구나 알듯이 거짓 중상하는 비난을 받으면서 극심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비난은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에게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이 성도가 견디어야 했던 여러 종류의 잔인한 핍박에 관한 말을 들을 때 거짓된 입을 재갈먹이고 난폭한 손을 묶으실 수 있는 주께 우리의 불만을 하소연하기만 하면 그 핍박을 어려운 것으로 헤아리지 않고 도리어 만족스러운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가 얼마나 적절한가를 알기 위해 악한 자들이 뻗어나가는 무례와 교만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억제되지 않을 때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를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57 편
또 사울이 다윗을 향해 지시했던 음모의 무서운 성격과 다윗의 유익을 위해 현저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요망했던 그 나라의 온 백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하여 나타나실 때에는 자신에게도 영광이 더욱 많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작은 위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여 악한 자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이 그 빛을 잃거나 악한 자들의 불경스러움 때문에 자기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시인은 고소하는 말을 다시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했던 그 잔인한 핍박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향한 반역과 속임수를 생각하면서 몹시 슬퍼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영혼이 ‘굽혀진다’(칼빈 ; 억울하도다 -한글개역)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몸을 굽히는 것, 또는 새들이 사냥꾼이나 사냥꾼이 사용하는 그물로 말미암아 무서움을 느끼면 깃조차도 움직일 수 없고 땅바닥에 납작 누워버리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나의 영혼을 굽혔다’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이 가장 명확한 번역입니다.
동사 ףפכ(카팝)은 자동사의 의미로 취급될 때가 많습니다.
‘영혼’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שפנ(네페쉬)는 여성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남성적 부가사(付加詞)로 쓰인 곳은 단지 여기 뿐만은 아닙니다,
시편 57 편
시57:7-11 하나님이여
다윗은 그런 위험한 때에 피신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7절에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든든히 신앙하게 된 결과로 심령(心靈)이 극히 평안해진 사실을 강조합니다.
위험한 때에 하나님을 믿어 마음이 확정된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이적(異蹟) 입니다.
그것은 그 당면한 위험이 틀림없이 해제(解除)될 것을 예언함입니다.
다윗은 벌써 영적으로 안전보장을 받았음에 따라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7하반-11).
마치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중에서 밤중에 찬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행16:25).
1. 본문 7절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준비되었고 - 칼빈)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정되었다’ 혹은 ‘확고하게 되었다’ 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ןוכנ(나콘)은 이 모두의 의미를 다 갖습니다.
우리가 후자의 의미를 택한다면 우리는 다윗이 스스로 드리고자 하는 찬양을 올바르게 잘 묵상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이 찬양을 성급히 하거나 형식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마음 속에 견고한 목적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준비되었고’ 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택하고 싶습니다.
이 번역은 다윗이 진실로 자원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찬양할 준비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면 이 마음은 경건한 행위를 하게 해줍니다.
독자들은 이 말씀 중에 사용된 히브리어의 강한 의미를 알게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준비된 마음을 한편 위선자들이 입으로만 드리는 예배와 맞세웁니다.
다른 한편으로 다윗은 생기가 없이 피동적으로 드리는 예배와도 맞세웁니다.
다윗은 신실하고 열정적인 정신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이 예배에 본격적으로 임합니다.
다윗으로서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나 버립니다.
시편 57 편
2. 본문 8절은 “내 영광아 깰지어다(나의 혀여 깰지어다 -칼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 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시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열정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혀와 비파와 수금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준비를 하라고 말합니다.
‘혀’ 라고 번역한 דובכ(카보드)를 어떤 이들은 ‘영광’ 으로 번역합니다.
‘영광’이 이 히브리어의 일반적인 의미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제 16편과 성경 말씀의 수많은 곳에서 이 말은 ‘혀’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의 앞뒤 관계를 볼 때 ‘혀’가 여기서 사용된 의미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다윗은 예배 중에 더욱 열심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마음을 말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입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 다윗은 그 반주의 악기들을 말합니다.
동사 הדיעא(아이라)를 ‘나는 깨일 것이다’ 혹은 타동사로서 ‘나는 새벽에 나를 깨우리라’ 등 어떻게 번역하더라도 문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각성이 되어 있는 사람은 이 찬양에 연관된 모든 일에 열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9-11절은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 하리이다
(10)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입니다.
‘민족들’과 ‘백성들’이 여기서는 다윗이 하는 찬양을 듣는 자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고통 중에서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눈여겨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시 중에서 우리의 상태와 성격은 마치 거울 앞에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바울이 단정한 말로도(롬15:9) 그 근거를 잡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말씀을 판단해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편 57 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선포하는 것은 바위나 돌들을 향해 찬양의 노래를 하는 것보다 훨씬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게 선포되면 그들 중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온 세상에 충만하다고 말했을 때 자기가 드리는 찬양의 결과에 관한 의도를 간략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온전성이 대체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질서는 주의 깊게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신속하고 관대히 약속 해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신속히, 또 기꺼이 해주시는 것만큼 그것들을 이행하시는 데에도 변함이 없으신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시기 에 하나님의 성실하심 또한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하나님 자신의 양광이 어두워지거나 악한 자들의 불경을 더 오래 눈감아 주심으로서 그 악한 자들의 무례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되어지지 않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이 시를 끝맺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미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급히 부르시고 죄없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때때로 유대에서 심판을 내리심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을 굴복시키기 위해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능하신 심판을 내려주실 것을 기도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