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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5편 7절-9절: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 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7절: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바다의 흉용이 무엇이냐? 넓은 바다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물결과 물결이 서로 부딪혀서 파도가 미친 듯이 솟구쳐 일어난다. 태평양이나 동해바다에서 이런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햇빛이 가려지면서 낮은 구름이 잔뜩 낄 때 바다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바다에서 바람이 불면 무엇이 일어난다? 파도가 일어난다. 그리고 바람이 일어나려면 무엇이 끼게 되느냐? 구름이 끼게 된다. 이 이치를 알아라. 믿는 우리는 이런 걸 삶에 적용시킬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 특별계시의 입장에서 볼 때 ‘아, 저러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감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머리 위로 따스한 햇볕이 비취는 것처럼 머리가 맑고,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밝고, 기쁘고, 마음 속에서 찬송이 나온다. 어떤 일을 해도 즐겁다. 사는 맛이 있고 재미가 난다. 그러나 머릿속에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성적인 구름이 끼게 되면 근심 걱정의 바람이 슬슬 일어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마음이 요동치게 된다. 밤새도록 잠을 못 자는 이유가 이런 데서 오는 거다. 그 이치를 알아라. 이런 걸 성경의 특별계시를 통해서 아는 거지 특별계시를 모른 채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모른다.
바다가 흉용하다는 것은 바다에 바람이 불면 물결은 반드시 바람에 밀리게 되어있다. 안 밀린다가 아니라 반드시 밀리게 되어있는 것이 물질이치다. 바람에 물결이 밀리면서 이 물결이 술렁술렁 움직이는 현상이 물결의 요동이다. 사회적으로 파괴력을 가진 폭동 또는 전쟁 등의 세상의 소문의 바람이 불면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이 때 인간 자기가 절대 정확한 정착지가 없으면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게 되어있다. 이 바람에 인간 자기는 날아가게 되어있다.
신앙 면에서도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요지부동한 진리의 말씀을 잡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소문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지금 절대 정확한 것을 잡지 못하면 앞으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바람에 자기의 마음이 요동치게 된다. 계속 이렇게 산다면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느냐? 불 보듯 빤한 거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물질목적으로 사는 자들은 주님보다 물질을 최우선적으로 붙잡기 때문에 세상의 바람이 불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거다. 그러면 세상의 바람에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흔들리는 이것을 잠재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신체적으로 어지러울 때 어떻게 하면 되느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자기보다 강한 것을 붙잡아야 한다. 신앙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했듯이 오늘날 교인들이 거의가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머리로는 가장 강한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기 속에 이게 인격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는 세상을 의지한 채로 흔들거리고 있다. 진리에 말뚝을 박지 않았다는 말이다.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그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느냐?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다. ‘만민의 훤화’가 무엇이냐? 지구상의 사람들이 소문과 소문에 격동을 받아 서로 뭉쳐서 여기저기서 폭동적으로 소란스럽게 불쑥불쑥 일어나는 거다.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는 게 훤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냐? 하나님의 절대 정확한 것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적으로 보면 세상 인본주의 교회들이 세상의 어떤 사건의 바람에 덩달아 격동을 받아서 세상과 함께 들고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기독교 종교적으로, 세상 정치적으로, 세상 과학의 문명적으로 폭동들이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우리가 자연이치를 잘 깨달으면 인간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이치가 신앙의 이치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바람이 불면 변화가 생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뿌리까지 뽑힌다. 정신 사상적으로 세상의 물질바람이나 종교적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서 사람들이 ‘와’ 하며 떠들고 일어나면 진리를 붙잡지 않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리로 쏠리게 되어있다. 지금도 쏠리고 있다. 구국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구복주의, 이런 게 다 교회 안에서 바람이 부는 현상이고, 진리를 바로 붙잡지 못한 사람들이 이리로 쏠리고 있다.
이런 게 다 훤화요 홍수인데, 비가 많이 와서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서 죽는 것만을 홍수로 보지 말아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한 길로 몰려나갈 때 사람의 이런 홍수 가운데서 넘어지면 밟혀 죽는다. 누가 밟았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에서 무슨 세일을 한다고 하면 사람이 많이 모인다. 슈퍼마켓에서 ‘몇 시에 두부 한 모에 십 원’ 하는 할인행사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런 곳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밟혀 죽는다면 이 사람은 십 원짜리 인생이다. 십 원에도 흔들리는 인생이라면 백 원이나 만 원이 걸려있다면 눈이 뒤집히는 거다.
바람이 살살 불 때 길바닥에서 비닐이나 종이가 날아갈 듯 말 듯 하면서 까딱까딱 하다가 조금 더 센 바람이 불면 그만 날려간다. 이 때 그 옆으로 자동차가 휙 지나가면 이 바람을 타고 휙 하늘로 올라가서 이리 저리로 날리다가 땅으로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도 어떤 인물이 빠르게 활동을 하거나 빠르게 솟구치면 반드시 바람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 주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세상바람에 휘말리게 되면 자기도 같이 휙 날려 올라갔다가 어느 새 땅으로 내리 꽂힌다.
파도가 일어날 때 그 파도에 뛰어들면 자기는 죽는다. 죽을 줄을 모른 채 뛰어들어도 죽는다. 마찬가지로 세상 인간들의 폭동이 일어날 때 거기에 뛰어들면 자기는 죽는다. 교회들이 세상주의 육본주의로 홍수처럼 밀려갈 때 이것이 교회의 부흥인 것으로 보여져서 거기에 뛰어들면 이 사람의 신앙생명은 죽는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을 보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며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막 뛰어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만능의 능력으로 세상의 폭동들이 못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기들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이 된 것은 그런 폭동들을 이용하여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시킨 후에 악한 자들을 다 없이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걸 모르면 ‘축복 받아라’ 하면 거기에 뛰어들고, ‘성령의 바람을 받아라’ 하면 그리로 뛰어든다. 갈릴리 풍랑을 일으키신 분도 주님이시요, 이 서건을 통해 제자들을 연단시킨 후에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신 분도 주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역사의 배후의 주권자가 누구냐? 전체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전부가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실물 같지만 사실은 실물이 아니다. 전부가 현상물이요 현상세계다. 언젠가는 다 없어지고 만다. 다 지나가는 거다. 즉 진짜가 아니라 진짜 비슷한 거다. 우리도 여기에 앉아있지만 언젠가는 다 없어진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현상적인 것에 많이 속는다. 진짜 실물은 지나가지 않고 영원히 있다.
8절: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 가운데 사는 자가 아니라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한다고 한다. 또 주께서 아침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성도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면 세상바람에 휩쓸리게 되고 신앙생명이 죽게 되지만 세상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붙잡고 진리 가운데 사니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징조를 볼 때 교회에게 내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알고 이것을 두려워하는 거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뛰어들면 안 된다. 세상이라고 하는 범위 안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의 가에 살아야 한다. 세상 안에 들어가면 죽는다. 정신 사상적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일이나 공부도 다 세상의 범위 안에서 하는 거지만 소원 목적은, 자기의 위치는 세상 밖에 나와 있어야 한다. 같이 있지 않아야 한다. 주의 징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오늘날 유형교회들이 세상의 바람에 쏠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고 두려워해야 한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아침이 되니 동이 터서 밝으니 좋고, 분별이 되니 좋고, 일을 할 수 있으니 좋다. 그리고 저녁이 되니 편히 쉴 수 있어서 좋고, 천국에 대한 꿈을 꾸게 되니 좋다. 이렇게 밤과 낮으로 시간이 교체되고, 사건이 교체되고, 환경이 교체되니 이를 통해 영인의 성장과 영능의 신앙수입을 잡게 되니 좋고 즐겁고 기쁘다는 말이다.
9절: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신앙인이 믿음생활을 잘 하면 일반 자연은총, 자연은혜, 즉 먹고 마시는 것을 축복으로 잔뜩 안겨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기 쉽다. 축복을 주어서 농사가 잘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사람이 잘 되는 농사를 말하는 거다. 사람이 잘 되는 농사, 자식이 잘 자라는 농사를 말한다.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을 키우는 게 자식농사다. 자식을 잘 여물도록 키워놓으면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사람들은 자식농사가 중요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식에게 좋은 열매가 여물게 하는 교육 면에서는 빵점이다. 나무나 식물을 키울 때 거름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고, 영양제를 줘도 죽어버리는 일이 있으니 그냥 내버려두면 열매가 제대로 맺겠느냐?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 내버려두면 속에서 죄가 자꾸 크게 되어있다.
좋은 밭이라고 해서 그대로 두면 안 된다. 바람이 여기저기서 이상한 씨를 불려 와서 밭에 흩어놓기 때문에 한 해가 지나면 온통 풀밭이 된다. 풀은 사람이 씨를 심지 않아도 나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날 때부터, 아니, 이보다 앞서서 아이를 가질 때부터 부모가 좋은 씨를 심어야 하고,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그 자체로도 죄를 품고 나온 것이고, 세상은 온통 죄악이 관영한 곳이기 때문에 밭의 곡식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둑을 돋아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이 바람 저 바람에 견딜 수 있게 지주를 세워주고 하듯이 말씀으로 바로 키워야 한다. 가만 두면 절대로 안 된다. 옆에서 쇼크도 주고 견제가 필요하다.
성도가 진리신앙을 갖는 면에서는 이것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단순히 주일을 잘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주일을 왜 지키게 하는 거냐? 지키는 그게 다냐? 아니다. 말씀을 받고 주님의 정신을 가지려고 주일을 지키는 거다.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진리의 교훈을 듣는 자리로 가야 한다. 아무리 예수를 믿을지라도 옳은 교훈마저 안 듣는다면 이 사람은 불을 보듯 빤한 거다. 볼 것 없는 인생, 가치 없는 인생이 돼버린다.
자연은혜, 자연은총 속에는 자연계시가 들어있고, 이 자연계시는 특별계시를 깨닫게 해 주는 보조계시다. 그래서 본 절은 자연은총을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내려지는 이치를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인간을 깨닫게 해 주는 거다. 인간을 깨닫게 해 주려고, 인간을 바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보조물들을 만드신 거다. 우리가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이걸 무시하고 살게 되면 자기에게는 그만큼 고통이 오게 되어있다. 이 고통을 누가 부르는 거냐? 자기가 몰라서, 못 깨달아서 자기가 부르는 거다.
‘땅을 권고하사.’ 땅을 권고한다는 말은 사실은 인간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이다. 권고는 인격을 가진 자에게 하는 거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바른 길을 가라고 권고를 하는 거다. 왜냐? 당신처럼 충만자 영광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이 권고의 성질은 여러 가지다. 믿는 사람이 깨닫고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려는 마음은 없고 세상과 짝하여 짝짜꿍하고 돌아갈 때 성도들을 보내서 말로써 권고하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을 보내서 ‘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서야 쓰느냐?’ 라는 소리도 듣게도 하신다. 또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보내서 신앙양심으로 느끼도록 권고를 하신다.
이 권고성에는 신실한 종들의 권고도 있지만 둘러엎고 갈아엎는 사건도 사실은 권고라고 볼 수 있다. 왜냐? 자극을 줘서 깨닫게 하려는 거니까. 만일 권고가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라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거다. 그런데 살려둔 것을 보니 아직까지 우리에게 사랑으로 권고를 하고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왜 만드셨느냐? 성도들의 신앙실력을 깨우쳐 주고, 키워주고, 깨닫게 해 주시려고 성도들을 위해 만물을 지으신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을 때는 일반은총을 거두어 가버리고, 말씀에 순종할 때는 일반은총을 풍족히 주시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이런 게 다 영적 은혜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심이다.
구약시대에 아합과 엘리야와의 싸움이 있었는데, 아합 왕은 일반적으로는 통치를 잘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입장에서 볼 때는 큰일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른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이런 정신 저런 정신, 많은 소원 목적을 가지는데, 한 마디로 세상정신으로 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의사단일밖에 없다. 세상사람들과 같지를 않다. 그러면 왜 의사단일로 사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만물을 통치할 수 있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되는 것일수록 이것저것이 없다. 기준은 하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잣대 하나면 이것으로 세상을 다 볼 수 있다. 이것저것 잣대가 많으면 정신이 사납고 정확하지를 않다. 하나님께서는 만능의 능력자이신데, 만능의 능력이라는 것은 만물을 다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저런 잣대가 많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윤택하다는 것은 풍부한 것을 말한다. 논에 물을 넣으려면 논을 갈아서 둘러엎고 물을 댄다. 물을 대면 흙이 묽어지고 씨를 받을 준비가 되듯이 성도가 사건 환난을 겪고 난 후에는 진리지식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기름진 마음바탕이 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세상 인본주의의 더러운 물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악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더럽고 쓰지 못할 사람이 돼버린다.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말이 많은 사람은 인본주의 신앙자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