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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능력으로 진리를 구별하십시오(요1서 2장18-29)
성경본문: 요한 1서2:18-29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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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의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6‧25 전쟁 때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연세대학교를 접수하고 교직원들의 신상 조회를 했다. 거기에 제출하는 서류에는 종교란이 있었다. 누구나 그 종교란은 비워두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불리한 탄압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란에 ‘장로교인’이라고 적어놓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정석해 교수였다고 전해 들었다.
그분은 알려진 장로나 집사도 아니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편도 아니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곤 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그를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크리스천이었고 장로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분은 4‧19혁명 때, 교수 데모를 주도하러 나가던 날 아침에 온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며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 가족을 돌보아주시기를 기도드렸다.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한때는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아주기를 바랐으나 자신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신도들에게 덕스럽지 못할 것 같아 사양했다고 한다.
나는 정석해 교수와 비슷한 선배 교수 몇 분을 알고 있으며 신앙적으로도 존경하고 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를 미혹하는 영들이 나타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당연하지만 오늘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셋으로 분류했습니다.
자녀들과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중요한 권면은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과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죠.
그리고 악한 세력 중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요한의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적이 있는 데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위험한 것은 그럴싸하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식당 앞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놓은 음식 메뉴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의 눈을 유혹해 식욕을 자극하고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죠.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진짜보다 더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야 하겠죠.
옷을 파는 매장을 지나가다 보면 어김없이 마네킹에게 멋진 옷을 입혀 놓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네킹이 가지고 있는 몸매는 감히 보통 인간은 넘볼 수 없음에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죠.
옷을 파는 매장에 있는 거울은 예외 없이 날씬해 보이고 키가 커 보이기도 합니다.
한때 우리나라에는 ‘진짜’ 참기름 논쟁과 ‘진짜’ 원조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진짜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누군가는 가짜를 가지고 유혹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장한 적그리스도들이 자신들을 ‘진짜’라고 주장하고 교회를 미혹합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후 2천 년이 넘는 적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적그리스도들이 마귀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옷을 입고, 뿔 달린 험악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순백색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이죠.
적나라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이단들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적그리스도란 어떤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는 세상과 싸움이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교회 안에 들어온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의 용서함을 받은 신자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올바른 신앙 위에서 진리를 붙잡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영적 아이들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초대 교회에도 그랬고, 작금의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을 흔드는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궤술과 간사한 유혹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아이들의 문제는 쉽게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진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신천지’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명확한 증거는 우리와 함께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면 왜 교회 앞에 와서 자신들의 공동체로 오라고 전도할까요?
그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전단을 돌린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속하였으나 더는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거짓된 영’이라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버린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처음 교회 공동체에 있던 자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들도 성경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인용하고 싶은 것만 인용하고, 활용하고 싶은 것만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들의 도구로 이용하는 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주 미묘한 표현이 될 것 같은데, ‘그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크리스천 공동체에 파고 들어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근본적인 교리의 문제나 성경 해석의 문제를 가지고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Q.T나 ‘하나님의 음성듣기’같은 공부를 하면서도 이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는데, 성경 말씀을 역사적 상황이나 문화적 context를 고려하지 않고 묵상할 때 주관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가운데 ‘진리’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데, 진리는 해석 가능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죄의 용서와 은혜, 성령의 열매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없기에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갈 수는 있으나, 진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자기 확신’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단들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주관적 진리에 목을 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오류 중의 하나일 듯합니다.
아파트 7층에 사는 칠수는 어느 날 아침 자고 깼는데 꿈에서 본 숫자 7이 선명했다.
달력을 보니 7월 7일, 시계는 7시 7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엄청난 행운의 조짐이라 믿은 칠수 전 재산을 들고 경마장으로 갔다.
그러곤 7번 말에 모두 걸었다.
칠수는 관람석에서 7번 말이 일곱 번째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럭키세븐'은 없습니다. 요행에 운명을 맡기지 마십시오. 감으로 사는 사람은 감상에 빠집니다. 노력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제목: 럭키 세븐 출처: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책 [거룩과 성화]에서, “진리에 대한 교리를 ‘진리’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예수님과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교리를 절대화시켜서 은밀한 영적 자아도취에 빠지는 교만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어느 순간 그리스도는 감춰지고 자신만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러한 영적 자아도취는 우리의 영혼을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참다운 믿음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묵상한 말씀을 보면 세 가지가 대비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장 1절부터 2장 6절까지 ‘빛과 어둠’이 대조되었고, 2장 7절에서 17절까지는 ‘미움과 사랑’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지켜야 할 것은 미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합니다.
빛과 어둠, 그리고 미움과 사랑 가운데 행하기 위해 조금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진리’입니다.
결국, 어둠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둠 가운데 거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를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잘 아는 자들에 의해 신자들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요한 1서 강해 [이렇게 사귀라]에 보면 아주 적절한 예화가 하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환자에게 독약을 의약으로 착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갖다 주었습니다. 환자는 간호사가 제공한 그 약을 성실하게 정성스럽게 받아먹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잘못 유도할 수 있는 적그리스도적인 가르침과 공격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초대 교회 성도들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 됨’입니다. 그때는 성경책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대하여 떠도는 ‘구전’과 제자들이 보낸 서신서들을 통하여 믿음을 알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는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인해야겠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4~5절에 보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전통 혹은 교리라는 것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이 ‘선’ 안에 있으면 너와 나는 ‘같다’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믿음이 감정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적어도 이것만 같으면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 안심할 수 있습니다.
22~24절은 바로 그 기준에 관한 것입니다.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은 아들과 아버지를 모두 부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데, 그것을 부인하면 우리의 구원론이 무너집니다. 아들을 부인하면 아버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톨릭’ 교회라는 말은 본래 ‘universal church’라는 말입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 고백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신조’로 만들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내년에는 우리가 이 사도신경을 좀 더 깊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 달에 한 번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는 이유도,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죠.
아마 여러분은 이미 ‘여호와의 증인’을 많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로 교패가 붙어 있는 집을 찾아갑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막무가냅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하자고 합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자고 하지만 함께 찬송하지 않습니다.
자신들과 같이 성경공부를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들과 성경공부를 해도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저도 오래전 여호와의 증인과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일 텐데, 흔히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동일본질’이라고 하는데, 아주 오래된 기독교 역사 가운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아리우스라는 사람 때문에 ‘아리우스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 와중에 구원론에 입각한 정통 교리를 세운 사람이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이 믿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답답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정하는데, 그 아들은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우리와 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것은 ‘거짓말’에 대한 정의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거짓말과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짓말은 다릅니다.
오늘 말씀 22절에 보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두 종류의 이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에비오니즘’이라는 이단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노스티시즘’이라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해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인격의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배울 것이 있는 분으로 생각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옳은 길을 살 수 없다는 인간이 가진 죄의 실존을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지, 이 땅에 사생아로 태어나서 인격적 모범을 보여주신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극명하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쾌락주의고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올 수 없는 이유는 악한 육신의 몸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를 지어도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는 사고를 하기에 하나님을 믿지만, 육신이 죄를 짓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다른 하나의 경향은 육신은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육체적인 욕망을 부정하고 금욕주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의 쾌락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죠.
그런 사고 가운데서 하나님이 더러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 육신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졌지만,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참 어려운 말이지만, 본질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으시고, 관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하자면, 관계적으로는 우리가 아버지도 되고 남편도 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가요? 24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말씀에 거하는 것이 거짓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처음 들은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저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난 후에 가장 염려했던 것이, 자신에게서 들은 복음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9~30절을 보세요.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이때는 사도 바울의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때였습니다.
조금 전 구절인 24절과 25절을 볼까요?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사도 바울에게 가장 큰 염려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이 복음을 전한 성도들을 보지 못하게 될 텐데, 이들에게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서 양 떼를 유혹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유혹은 ‘어그러진 말’로 거짓된 것을 따르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이 ‘삼 년 반’ 동안 가르친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처음 들었던 복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나누었던 요한일서 1장 5절입니다.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1서 3장 11절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이 두 복음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어떤 감언이설로 속여도, 그 말들이 빛이신 하나님을 가리는 것, 아무리 진리인 것처럼 들려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면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도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마지막 때, 부끄러움 없이 서도록
결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 왜 그렇게 염려하며, 어떤 의도로 권면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 28절에 그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 18절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적그리스도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입니다. 바로 이 긴장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적그리스도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주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 날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 성경에도 보면 마지막 때에 ‘정관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요한의 의도는 날짜를 명시하고 정확하게 그 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의식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종말 의식이 교인들 가운데 살아있을 때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긴장감!’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날과 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밤에도 예수님께서 오실 수 있다는 긴장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긴장감이 우리를 적그리스도와 세상의 타협에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가짜 종말론과 거짓 재림 예언으로 인해 영광스러운 종말에 대한 믿음과 의식이 희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면 왠지 이단 같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신앙은 종말을 의식하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긴박한 종말론에서 우리가 맞이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하라는 말입니다. 가짜들로 인해 진짜에 대한 열망이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가짜가 많을까요?
가짜가 많기 때문에 진짜가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짜가 많으면 진짜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파스칼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가짜가 많은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짜와 거짓, 적그리스도로부터 우리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은 그 비결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에서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영어로는 ‘anointing’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기름을 부어야 불이 붙고 빛이 납니다.
성령의 기름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밝히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와 어둠에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성령이 우리로 명확하게 보게 하는 것은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문 26절입니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미혹’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NIV 성경에 보면 ‘미혹’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trying to lead you astray’ 길을 벗어나 탈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의 궤도를 벗어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사역입니다.
건강한 관계, 가정, 교회를 파괴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미혹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고, 이것은 기름부음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호기심’은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깃드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이 있는데, 다른 것에 기웃거릴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의 신앙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늘 의심이 갑니다.
다른 무엇이 확실한지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미혹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늘 확실한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을 배울 필요가 없다거나, 사람들과의 교제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우리를 이끌어주고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 할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저에게 기름을 부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저에게 올바를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저에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길을 갈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성령 안에서 굳게 선다.’라고 표현하는데, 성령을 구하지 않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구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과 진리가 역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를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