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북이면 옥녀봉 국민보도연맹사건
청원 옥녀봉골짜기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1950년 7월 9일(또는 11일-청주기독교방송) 군경 40여 명이 괴산 불정면 지장리 새곡마을, 괴산 사리면 사담리 모래못·송오리·방축골·수성리·불당골·하도리·진암리 진지바위·산정리 산정말·중리 중말, 청원 북이면 신기리일대 보도연맹원 800여 명을 충북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골짜기(내추리앞 국도변)로 끌고 가 학살한 사건이다.
옥녀봉에서 죽어간 사람들(충북 청원군 옥녀봉 학살)
1950년 7월 9일(혹은 11일) 국군이 청원군 북위면 옥녀봉에서 괴산군 사리면, 칠성면, 불정면 등지에서 끌고 온 보도연맹원 800여 명을 학살했습니다. 피학살자들이 옥녀봉 골짜기에 들어섰을 때 이미 헌병과 경찰 등 40여 명이 기관총 등을 준비한 채 대기하고 있었고, 이후 4시간 동안 죽음의 행렬이 계속되었습니다. 골짜기에 핏물이 냇물처럼 흐르고 인근 마을의 개들이 옥녀봉에서 배를 채워 밥을 안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청원군의 다른 지역을 포함하여 충북 전체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3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50년 7월 6일, 괴산군, 청원군의 각 마을 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어 군용트럭에 실려 와 증평읍의 양조장 창고와 농협창고에 감금되었다.
사리면 우부원 거주 마을에서는 보도연맹원 34명 중 군경가족 2명을 제외한 32명 등 사리면내 8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하였다.(별도 정리함)
감금된 보도연맹원 780명은 3일 후인 7월 9일 경 1시부터 일제히 옥녀봉 골짜기로 끌려가 대기하고 있던 군인과 경찰 40여명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
군인들은 새끼줄로 양손을 뒤로 묶어 열 명씩, 스무 명씩 세워놓고 총을 쏘았으며 오후 5시까지 학살은 계속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월북작가 홍명희의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 이후 2003년 10월 사리면 민간인학살 추모위령비가 세워졌다.
입증자료
○ 우부원(사리면 희생자 유가족) 증언
○ 정종수(괴산군 사담리 희생자 유족, 옥녀봉 현장 목격자) 증언
“10명씩 10명씩 세워놓고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을 쏴서 자빠지면 그 사람 시체를 구렁챙이에 넣고 자기가 또 원위치에 서고... 그런식으로 죽였다고.”
참고문헌
2003 충북지역민간인학살 실태조사보고서 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