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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여행후기 청호 한기수 2012-04-20 14:02:25
# 탐방 인원으로 선발된 기쁨을...
가까우면서도 먼나라 일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한일 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본에 전해진 한민족 문화의 현장을 확인 하며 “신조선 통신사”로서 청호는 마음에 담아 보았다.
조선일보가 교육 사업으로 1987년부터 25년간 진행해 온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 금번 29회째 행사에 조선일보 구독자로서 우리 부부가 함께할 기회는 치열한 경쟁 속에 여러 해 만에 주어졌다
초.중.고 선생님341명을 포함한 탐방단 552명이 일본 열도라는 공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 일원으로 2만3000톤급 전용 크루즈선을 타고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전문교수와 동행하며 [2012년4월12~.17일] 5박6일간 학생의 입장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보람된 결실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벚꽃 과 민들레는 바람에 의하여 그 씨앗이 전파가 된다고 이웃한 두 나라 物以類聚요 人以群分 이라 동류의 대자연속에 우리선조들의 흔적을 확인했던 시간은 마음 깊숙이 잔잔하게 남는다.
# 선조의 그 흔적을 현지 탐방하며
탐방 첫날 역사는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유적과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고 규수 사가현 가라쓰시의 나고야 성터 앞 현장 강의에서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이곳은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쌓았던 전진 기지 .당나라[대륙]으로 가는 나루란 이름처럼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최단 거리 지점이다 라고
날이 맑으면 여기서 이키섬이 보이고 이키섬에선 대마도가 보이며 대마도에선 부산이 보인다고 그러나 허물어진 유적은 한.일 관계사 2000년을 이렇게 증언하는 듯했다 평화와 전쟁[침략]은 같은 길 위에 있다고
올바른 한.일 관계사를 돌아보기 위한 탐방경로는 부산~하디카츠~이즈하라~후크오카~시모노세키~히로시마~시모카마가리~후쿠야마`~오사카~교토~시즈오카~하코네~도쿄 로서
전쟁과 평화의 길 이었다 이길을 따라 청동기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물이 열도에 전해졌고 조선시대엔 통신사가 거쳐갔다 순행할 땐 문명의 길 이었지만 역류할 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평화와 침략이 같은 길 위에 있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시모노세키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숙소인 아카미 신궁과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패전한 청나라의 이홍장이 강화조약을 체결한 “청일강화기념관이”이 나란히 서있다 각각 조선의 선진 문물을 맞아들인 환영의 무대와 조선침략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출발점 이기도하다
이번 탐방의 4 대 키워드는 고분, 신사, 성, 절이라고 이를 주제별로 잘 정리 하여 교육용으로 활용토록 당부하였다.
① 고 분
후쿠오카에서 구마모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백제와의 연결 고리인 출입문이 남쪽으로 향한 “후나야마 船山 고분”은 전방후원분임을 확인 하였다.
그리고 무령왕릉 유물과 거의 유사한 부장품이 대량 출토 되었고, 충남 공주 수촌리 에서 발굴된 5세기 전반의 백제 금동관과 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굴된 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의 금동관 또한 비슷하여 선조의 흔적에 감동하였다.
백제인 으로서 고대 일본의 상층부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백제계 실력자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으로 30여개의 웅장한 화강암으로 상부에 드러나 있는 북쪽 돌의 무게가 64톤, 남쪽의 돌이 77톤으로 총 중량이 2300톤의 나라의 “이시부타이 石舞臺”의 현장에서 우리 조상들의 얼을 상기할 기회를 가졌다.
② 신 사
벚 꽃으로 유명한 교토에 위치한 “히라노 平野 신사에”는 네 명의 백제계 조상신이 묘셔저있다. 이마키신을 비롯한 네 명인데, 이미키신 이란 본래 “새로 도래한 신”이란 뜻으로 ,백제 멸망 후 일본에 망명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모국에서 조상을 모시던 신을 모신 곳이다.
여기서 주목할 네 번째신인 타카노노 니이카사이다. 이는 다름 아닌 백제계로 알려진 캄무 천왕의 어머니이다. 몇 년 전 일본 천왕 아키히토는 “나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캄무 천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말하자면 일본 황실의 모계 백제설을 현 천황이 공식적으로 확인 해준 셈이다.
캄무 천황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속일본기에“황태후[타카노노 니이카사]의 성은 야마토이고 이름은 니이카사" 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이다. 황후의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는 기록이나온다.
백제계와 인연이 깊었던 감무천왕이 794년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백제계의 신들을 히라노로 신사로 함께 옳겨 조상신들을 모신 곳 이어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③ 성
부산에서 200km 밖에 안되는 기타 규수는 한반도 남부와 같은 문화권으로 신라 공격에 대한 방어거점 水城으로 백제를 생각나게 하는 유적으로 후쿠오카의“다자이후 大宰府 ”의 신축은 7세기 중엽이며 일본이 국가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8세기 초에 개축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일본 내전으로 얼룩진 도요토미의 권력의 영화와 몰락을 상징하는 상징인 “ 오사카성 大阪城 ”은 우리나라를 괴롭힌 왜구의 첫 주인 죄의 댓가 탓이었던지 신기하게도 세 번이나 벼락을 맞아서 천수각등 그 원형을 태워 버렸으며 1931년 콘크리트로 축성이 되어 있었고
그러나 졸부가 죽으면 일장춘몽도 사라지는 법이라고 조선침략의 늪에 빠저 허우적거리던 도요토미가 죽은뒤 1614년 겨울에 벌어진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막판 대공세로 오사카 성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도요토미의 영화와 몰락을 상징하는 성 뒤편 이에야스에게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이성에서 자결로 최후를 장식한다.그가 자살한 곳에 조그마한 표지석 앞에서는 순간 그 감회는 청호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였다,
④ 절
세계최대의 목조건물인 나라의 “도다이지 東大寺” 창건에 한반도계 손길이 곳곳에 스며 있으며 가라쿠니 신사는 도다이지 경내에 있는 우리의 조상을 모셨던 신사였다. 그리고 우리선조 行基 스님의 상이 보존이 되고 있어서 마음이 뿌듯하였다.
나라의 “호류지 法隆寺”는 세계최고의 목조 건물로 삼국고대 문화의 종합판 이었으며 한반도의 불교건축양식과 백제관음, 그리고 구세관음에 발길을 멈추어 탐방하였다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은 나라의 “아스카테라 飛鳥寺”에 보존되고 있으며 백제의 왕흥사가 원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에 그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숨결이 살아있는 교토의 “고류지 廣隆寺”는 경주와 지형과 기후가 비슷한 곳이며 신라계 하타씨가 일본에 양잠과 견직, 농업 등 선진 문명을 전해 주었다. 또한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는 없는 우리나라의 赤松으로 고증이 되었다는 자료에 섬세한 조상의 그 혼에 감사드렸다.
또한 독일 철학자 칼야스퍼스는 그가본 코류지[廣隆寺]불상을 보고“인간존재의 청정하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현”이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그가본 반가사유상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83호 금동미륵 반가사유상과 꼭 닮았다.
두불상 모두 한반도에서 만들어졌거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 來人]이 일본 불상을 만들었 으리라는 것이 통설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정재정교수이자 동북아 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낸 지일파 학자로서 이를 정리하였다.
조선과 일본 간 교류를 통한 평화를 상징하는 조선통신사의 현장 오사카의 “시텐노지 四天王寺”는 한반도의 고대 절 양식을 보여주는 절의 배치로 중문, 오층탑, 금탑, 강당이 백제의 특징인 일렬배치로 이를 화랑으로 둘러싸는 형식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그 원류는 6~7세기 대륙양식 이었다. 그러나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은 콘크리트로 조성, 단청이 되어있지 아니하여서 왠지 미적 감각이 다소 약해 보였다.
강의 말미에 정영호 교수는 40년지기 교포친구가 생전 자수성가한 거금의 돈을 일본이 아닌 고국에 의미 있게 쓰고 싶다는 요청을 받아 이를 경주 불국사에 보시토록 하여 금년 6월 하순 준공을 앞두고 있는데 친구는 갑자기 쓰러져 의식이 없는지라 병문안 차 탐방원과 마지막 날 현지에서 아쉬운 눈물의 작별을 하였다.
# 야간 선상대학의 보람된 교육
① 첫째 날 주제는 “우리문화의 일본전파”로서
원로 미술사학자 豪佛 정영호 전 단국대 박물관장 겸 석좌교수는 1977년부터 일본 쓰시마섬을 200여회 방문해 한국문화유적을 발굴하였고 2004년에는 쓰시마 주민들이 한.일 교류사 연구애 애써온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1979년 대한민국문화상 2001년 만해학술상을 받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단양 적성비[국보 제198호],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찾아낸 주인공이며, 한일 관계사 정립에 진력하고 있는 정영호 석좌교수께서 78세 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 자세로 우리의 금번 탐방은 우리 조상이 갔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중 이라며 탐방의 동기를 실례를 들어가면서 하나하나 불어넣어 주었다.
② 다음 날은 “조선 통신사와 21 세기 한일관계에 대하여
강원대 손승철교수의 왜구들이 아녀자의 괴롭힘과 사지를 찢는 만행이 슬라이드로 그림과 함께 공개가 되었을 때에는
청호는 민족의 응징인 순간의 혈기가 독립투사의 자세로 돌변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몸에 소름과 손에 땀이 났고. 또한 그간의 역사 인식을 바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셋째 날은 “한국과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백제와 일본 교류에 대한 서정석 공주대교수는 뛰어난 프레젠터이션 활용한 좋은 자료준비로 이를 잘 정립하여 주어서 탐방시 궁금하였던 부분과 남은일정 현장 확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④ 넷째 날 정호승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기쁨”
정호승 시인은 시는 봄날의 꽃과 같으며, 어린이의 언어는 모두가 시다. 시의 배경은 침묵[묵언]이라 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늘 그리고 눈물이며 고통에 이은 절망과 상처 그래서 항상 내 인생에 햇빛이 보이면 고로 사막이된다,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잘 자라 우리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위에 내리던 함박 눈 처럼 잘 자라 우리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뒤를 따라 갈때까지 잘 자라 우리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뿐 아들의 저절로 벗겨진 꽃 신발처럼
사랑에는 고통이 포함 되어있다, 빈 밥상을 받아놓고 배 부르기를 바라는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랑의 시가 있다, 풍경과 바람은 사랑 이지요
또한 바닥에 대하여 인간의 최대의 죄악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바닥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내 차례 내 순서이구나 하고 그 순리를 그래서 등산은 바닥에서 부터 오르고 왜 오르는가 내려 올려고...
산산조각은 누구나 인생살이에 산산 조각이 따른다 산산 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 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법정스님은 보람되게 살아가라고...박완서 선생은 견딤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견딤의 연속이다 라고 수선화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인간의 본질이다 죽움 또한같다 이는 그동안 시를 대하는 나의 안목에 새로운 변화를 일깨워 주었다.
⑤ 마지막 날 귀국길 신한은행 에서 주관한 “100세 시대의 자산관리 전략은”
재산의 증식에 있어서는 이불을 덮어쓰고 부부만이 알고 비밀리에 실행을 함이 좋으며 자금이 필요하여 대출을 받고자 할 경우에는 자녀들과 상의를 하라고... 모두가 하하..호호..하하하...배꼽 웃음이 얼굴로 전해지는 것이 생생하였다.
※초대 이삼평이 일본서 도자기 빚은지 400년
417년 전 왜군에 글려간 한국 도공의 14대손 이삼평[54]씨 인사말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솥아졌다. 규수 사가현 아리타는 심수관의 사쓰마 도자기와 함께 일본의 양대 도자기로 꼽힌다.
이삼평가는 일본에 건너온 초대 조상부터 가업을 이어 본인은 스무살 때 부터 함께하였으며 먼 옛날 조상이 한국에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해 고향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라고 선친 13대[현제95세생존]께서 하셨다고 말했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1598년 정유재란때 일본에 끌려온 이삼평의 선조는 백자를 구울 수 있는 도석광을 찿아 18년을 헤맨 끝에 이곳에 정착하여 일본 명품 가문이 되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초대 할아버지의 혼을 담아 현제 150여 가마에서 백강석 자기를 빚는다
※통신사는 조선시대 우리 나라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사절로서
일본에서는 이를 조선 래빙사 라고 하였으며 조선정부에서 일본사절에 반례로 보내는 경우에는 회례사라 칭하였다.1394년 태조3년 보내다가 1479년 성종10년 이형원이 풍랑으로 병을 얻어 거제도에서 죽은뒤로 중지 하였는데,
그후 일본을 제패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끈질기게 요청 1590년 선조 23년 황윤길을 통신사로, 김성일은 부사로 보냇다. 규모는 400~500명으로 13회실시 되었고 1711년 숙종37년 매회 100만냥이[지금돈 670억원,천황 즉위식 경우:230억] 소요되니 일본의 요청으로 그 규모를 줄이다가 1811년 순조11년 에는 쓰시마 섬에서 응접할 정도였다.
참고로 통신사의 길을 따라 이를 맞이 하기위한 1,400여척의 배와 1만여 일본의 환영객이 동원되고 창덕궁에서 애도 까지 8~10개월이 소요되며 그 행렬은 2십리나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물을 접할려는 일본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엇으며, 서산대사는 법문.당인의춤,조선가마,필담창화,시문등 유학자/문인과 교류, 서예작품을 받을려고 통신사 숙소에 진을치고, 대형병풍, 판화, 두루마리그림, 등이 지금에와서 문화재로 지정 일본발전의 창시가 되엇다.
일본으로 부터는 고구마,고추,토마도,구리,접부채,양산,벼루,미농지 등등이며... 통신사가 지나간 그 길을 오늘을 살면서 한걸음 두걸음 청호는 많은 것을 유산으로 생각하며 마음에 담아보았다.
# 조선일보 진행 팀에게 감사한 마음을
금번 탐방의 진행은 24시간 체제로 아침 6시 기상에서부터 저녁 선상대학이 종료 될 때까지 기본계획대로 물이 흘러서 가듯 순조롭게 실시를 하여 함께한 552명은 일본 속 한민족사를 터득하는 학생의 자세로 동행을 할 수 있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그리고 일본을 알고가자,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일본의 고대사며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세 인물[오다 노부나가 1534~1582 울지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린다.토요도미 히데료시 1536~1598 울지않는 두견새는 울게 만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 울지않는 두견새는 울때가지 기다린다]과
행정구역 및 주요도시와 먹거리, 일본 지폐속인물, 알아두면 유익한 일본어 ,일본인들이 실어하는 빨리빨리 와 애누리며 더 주세요 등 이러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기회교육으로 함께한 우리 탐방 선생님들 로부터 배려와 선을 배풀 수 있는 기회이었다.
또한 선상에서 이른 5시경이면 조선일보를 수신 게시판에 부착하여 놓으니 국내의 돌아가는 궁금한 사항이 없어서 더더욱 좋았다.
일본 현지 출항식은 스태프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는 4층 좌현 갑판위에서 석별의 정한은 숙연하였다 크루즈의 무지게 색천이 뱃 고동 소리와 함께 내려지고 순간 카트하니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우리 일행은 일본기를 흔드는 답례며
그리고 현지인들의 36인조악단 연주와 태국기의 물결로 열열한 환송은 가물가물 보이는 끝까지의 방향을 잡아가며...영화의 한 장면 같았으니 청호는 마음의 응어리를 일부분 풀게 되였다
조선일보 독자로 솔직한 바람은 본 교육사업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니 최소한 연간 2회 정도의 탐방이 이뤄져 우리나라의 여러 사람들이 이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하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한다.
# 마무리 하는 글
인생을 살다보면 평소의 " 마음 "은 " 言語 "가 되고 그 언어는 " 行動 " 이되며, 또한 행동은 " 習慣 "성 되어 " 人性 "화 되고 그 인성은 " 運命 "된다, 그래서 첫 단추 를 잘 끼워야 하고, 첫 발을 잘 내디뎌야 하며, 이세상 인생을 마감할 때도 처음 먹었던 그 " 마음 "이 후세에 영향을 주며 남지 않는가 ...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첫 교육이 중요 하지요.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은 어릴때 부터 국가관의 큰 그림을 그려 주는데 ,일부 전교조는 그러하지 를 아니하니 참. 獨島는 우리 국토인데 ! 독도와 동해의 영해 표기 문제로 한일 간 긴장이 고조가 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영원한 우방도 없고 또한 영원한 친구도 없음을 명심하게 되었다.
금번 탐방 길은 우리 선조들의 대일 문화전수인 백제의 손길 그리고 조선 통신사의 현장 등 일본 곳곳에서 선조의 높은 문화자취를 현지에서 본 흔적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으로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세대들 에게는 우리 고대사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되겠으며 이를 토대로 한일 간 갈등 해결에 관계기관과 주변에 널리 이를 전파하여 진정한 “강병부국”의 평화를 추구하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 청호는 생명이 있는 한 함께 기여하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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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랫만에 봄비가 창박에 내리니
5년전 이맘때 벚꽃으로 유명 하였던 교토[京都]가 생각이 나내요,
교토는 1869년 도쿄[東京]로 천도 하기전
일본의 수도 이었.....................................................다 .
일본 열도는
크게 4국으로 치열한 네전의 연속이었지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오다 노부가 [1534~1582] 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린다.
도요도시 히데요시[1536~1598] 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만든다,
도쿠카와 이에야스[1543~1616]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가지 기다린다.
16세기 난세의 세 인물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과 전략으로
전란에 휩싸인 일본사회를 평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것은 사실이다.
@청호 한기수
그래서
水城은 서로간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쌓은것이다.
그런데
그 수원을 어떻게 확보를 하는야가...
다자이후는
주위가 모두 산으로 막혀있어
수성은
적으 접근로가 될 수 있는 곳에 쌓았다.
제방은 다져진 흙으로 쌓았으며
산등성이에는 토루로 쌓고 골짜기에는 석축을 쌓는 형식이다
몇군데 정문을 만들고 성안에 건물을 세웠으며
이와같은 성을 우리나라의 "산성"과 같다 .
@청호 한기수
그러한
다자이후 수성은
당시로서는
신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거점이기도 하였다.
@청호 한기수
위 본문에서도
일부 어필 하였으나
어린시절
국가관에 대한 큰 그림의 교육이 중요하다.
마주하는 중학생의 경우
수학여행길 복장이며 표정들은 너무나 순종적이며 밝았다
@청호 한기수
300여명이 동시에 입장시
신발 정돈은 1cm 틀리지 아니하게
6열 종대로 벗어놓은
정리된 모습은 부럽고 부럽기만 하였다.
아마 하루 아침에
마음이=말이되고=말이 행동이되고=행동이 습관이되고
=습관이 人性이되고=인성이 운명이 되듯이
그렇게 된것은 아니지요.
강도높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입을 시키고 있으니
우리 후세들은
어떻게 할것인...................고
@청호 한기수
여기서
獨島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독도가 되었는가 하면
원래는" 독섬 "이라 하였는데
고대에 이섬을 지나다니는 뱃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섬에 나무가없이
바위로만 주위가 이루어 졌기 때문이란다.
돌[ 石] 의 방언이 "독"이다
우리나라 중남부 지방의 사투리에서는
"돌"을 "독"으로 발음한다.
@청호 한기수
독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뱃사람들이
이 섬을 지나 다니다가
붙였던 이름으로 추정 하기도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독섬"으로 불러오던 이름이
대한제국 시대에
한자로 이름이 바뀌면서 "石島"로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소리 나느대로 [借音表記]바꾸었다.
"독섬"이 "獨島"가 된 것이다.
@청호 한기수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국토 독도를 竹島로 표기한다.
대나무가 있는것도 아닌데
왜 죽 자를 넣을을....................까?
대나무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인데 점차 북상하여
중국 남방으로 올라왔다.
중국 남방에서 竹을 " ter "으로 발음한다.
@청호 한기수
이것이 일본에 들어가서
終聲을 분리하여 발음하는 습관에 의하여 "다케"로 발음이 되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入聲이 탈락된 뒤에 들어와 "대"로 발음하게 되었다.
@청호 한기수
우리나라 뱃사람들이
"독섬"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듣고
전하는 과정에서 "도케시마"로
이것이
다시 "다케시마"로 정착 되었다.
@청호 한기수
다케시마를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竹島"가된다.
독도에는
대나무가 전혀 없으므로
竹자가 필요 없다 .
우리말 "독섬"을 일본 사람들이
소리 나는대로
전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竹島]"로 되었다
그래서
누가 무어라 하여도 獨島는 우리 국토이다
계속 비가오..........니
관광과 여행을 약기하여 볼까한다.
먼저 觀光은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의 풍물,풍속을 구경하는 것이다.
이는
레크리에이션을 수반하고 그것을 추구한다.
周易 에서는 관국지광 이라
문물 문화재 자연경관등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라고
그래서 관광은
눈 나들이 이고
깃 발따라 가며 보는것
휴식속에 충전이고 목적지에 도달해야 시작이다.
돈이 있어야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몸에 배인 습관과 버릇 그대로 다닌다.
유럽 여행시 열차 안에서
이동식 음식물 판매 요원을 찾는 경우 이는 아니지요.
자신을 절제하며
그 곳의 문화와 풍습에 순응 하여야 하는것을
@청호 한기수
또한
가서 편안하고 돌아와서 몸살이 난다
흥청거리는 과시욕의 소비며
알려진 장소 범위에서 활동 위주이다.
가급적
입=혀=눈=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고
기간도 비교적 짧다
가장쉽게 어던곳을 알수있는 방법 그 곳의 배경 지식을 얻을것을 목표로 하드라
그도 그렇지
일부에서는 쾌락의 증진으로 착각을 하드라.
그래서
효도,묻지마 관광등등 이라고 하지않는가
@청호 한기수
旅行은
아름다운 풍경만 보는것이 아니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간사에 대한
풍요 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더 큰 여행의 가치 이란..............다
@청호 한기수
그래서
일정기간 다른 고장이나 다른 나라에 가는일
모든것을 내려놓고
나그네가 되어 돌아를 다니는 것이 기도하다.
@청호 한기수
그러므로
여행은 마음 나들이 이고
여행 지도를 보며
자신만의 무엇인가 를 찾아내려는 직업이다.
힘듬 속의 충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이고
돈이 없어도 가능하고.
가는 곳 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일랑 털어 내야한다
그래서
가서 힘 들었지만 돌아와서는 힘이나며
삶의 탐구를 멈추고
홀가분 하................다
@청호 한기수
이는 호기심이 필수라
새로운 것을 찾을려고 님의 내면과 조우라 그래서 장기간 이드라.
여유있고 밝게 배려하는
많은 정신력이 필요로 한다
어떻게 하면
절제를 할 수 있나하는 내면의 마음 이지요
그래서
신혼, 배낭,가족 등등등 여행 이란다.
@청호 한기수
그런데
일부에서는 자신의 습을 못버리고
혼동들을 하며
부어라 마셔라 왁자지걸 하니
그 곳으로 솔린
포커스 [국격과 자신의 초라한 위치]를 어찌 할려는고
이제와서
이 나이에 하하..호호..하하하...
좋은 계절
삼육회원님 가정에
건강,건간,건강과 행운의 기도를 드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청호 다녀감니다.
어느한 분야에
10년을 전념하면 프로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래서 학부후
전문성을 유지한 박사가 되는 시간이 그렇지 않는가
청호는 오랜시간 운이좋아서
좋은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기공을 실행 하여보니
어점 " 氣功 "도 반복되는 습 이드라
그래서 禪인이 되려면 오랜 세월이 지나야한다.
20년을 하면
강호에 나가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지 아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맞기도 하지만 맞 받아쳐 때리기도 하지요
30년을 하면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
50년정도 하면
接神의 경지에 도달 하지 않나 싶다.
학문적으로
접신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구구절절 배우는 게 많.....다
우리 말의 어원과
한자학을 50년 넘게 연구해온
진태하[81] 선생의
"漢字學全書" 를 탐독 하다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진 선생의
주장 가운데 獨島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독도가 되었나 를
밝히는 부분이
흥미로워서 청호가 교육 차원에서 정리하여 보았다.
@청호 한기수
어제 밤
때~ 르`~~릉
내용 인즉
"""독도 어원"""의 자료 출처를 요구 하기에
이 아침
위와 같이 두 란에 걸처 약기 하였습니다.
어제 내린 비로
주변 경관이 쾌청한 지라
움트는 새싹들과
피어 있는 산 꽃이며 그 꽃잎에 초롱초롱 맺혀진 물방울 등 등
오늘 하루
자연과 대화 를 나누며 지나볼까 합니다.
회원님 좋은 시간 되십시요
청호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감니다.
청호님
본문도 본문이지만 댓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좋은 여행 하셨네요...
카페지기님!
저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요.
어떤 회원께서
크루즈선상에 대하여 질문이 왔어요.
내용인즉
뱃 멀미가 나지않는 야 고요.
청호가 이용한 전용선은
2만3천톤,항해속도 18노트,시속약 33km, 전장 167m,폭은 24m 선급은 ;국제원앙 이지요.
총 7층 이고
지하 1층은 피트니트 센터,
1층은 진료실 의사대기/극장.
2층은 안내대스크 ,대강단[퍼시픽홀],식장
3층은 사롱, 도서실, 베란다, 화실, 담화실, 카트룸, 매점,
4층은 객실,세탁실,드라이룸,
5층은 객실,세탁실,라이룸,대욕장
6층은 객실 스포츠 데크
7층은 조정실 이었어요
뱃 멀미는 좌우로 흔들려야 오는데 그러하지 를 아니합니다.
@청호 한기수
1990년 백령도 를 갈때
중형 소형등 접안시 3번 갈아 타며 8 시간이 걸렸고 뱃멀미와 몸살이 났던일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정도 규모의 선상은
그러하지 아니하엿어...............요
전용선 이라서
친근감 이라든가 함께 한다는 그 마음이 와 닿더 라고요.
그러나 승선시 여권을 주고
자기의 방 번호표가 입력된 "선상카드" 를 목에 걸고 부터는
선상의
이용 안내에 응 하여합니다.
각기 다른색의 표시 명찰이라
순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니 불편함이 없지요
@청호 한기수
더욱 좋은것은
승/하선시 대기행렬은 1시간을 초과하지 아니하니 좋아요.
선장께서
마지막 날 아쉬운 작별의 연회는 추억 이었으며
모두가 갖추어진 복장에
예를 표하며 그간의 동화의 정한 이엇지요
@청호 한기수
본인만 부지런한 마음 이라면
이곳 저곳 시설들을 활용하....며
체력은
선상을 한 바퀴돌면 약 380km 이니
두 세바퀴 돌고나면
공기는 그만 인지라 기분이 그렇게 좋아..........요
@청호 한기수
때론 갑판위 에서
망망대해 앞도 뒤도 좌우 어느곳도 수평선이라
청호의 살아온 날과
이제 남은 시간 어느날 홀연히 이 세상을 마무리 할
그 순간을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마음으로 정립되어 지더군요
오가는 선박도 보이지 를 아니하고
날으는 갈매기도 없으니 조용히 갑판위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경관은 그만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는 더더욱 좋아요
그 어느 한곳에서 해가 뜨고
지는 그 장관이 廓然無聖을 실감하며...
@청호 한기수
기회가 되어
어느날 14만2천 톤의 크르즈선을 활용 하여보니
총 승무원만 1,185여명 이라
여행객이 어느 항구에 승하선시 3~4천여명이 동시에 출입국 수속시 움직여야 하니
대기 행렬은 무려
2~3시간 이는 너무나 지루 하드군요.
그런가 하면
일부 항구에서는 접안이 되지를 아니하니
중형 배로 갈아를 타고
육지에 다다르기도 하고.그러한 단점이 있어요,
@청호 한기수
그러나
17층 규모이니 하나의 여행공간의 도시라
없는게 없을 정도 이더군요.
대 공연장만 4곳 [1곳에 1천5백명 동시입장]이고
아이스쇼[낮 시간대에는
일반인도 랜탈해서 즐길수 있어요]며
라이브공연,오케스트라 연주,
싱어와 댄서가 가 선보이는 정통 프로덕션 쇼,영화, 연극,마술,등등등
카지노, 주요 상품면세점 .로얄 프리머네이드
세탁소, 메인 /솔라리움수영장 .스파/피트니스 센터,사우나.독서실. 연회석.
암벽등반,바이킹 크라운 라운지 ,스포츠시설 ,미니 콜프코스등등등 24시간 이니
편리성은 그만이지................요.
@청호 한기수
객실은
취향에 따라 외측이 더 가격이 비싸며
그 활용 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며,화방, 등등 선택 할수도 있고
일단은 승선시 여권을 반납후
지정된 방 번호표가 입력된 "승선카드 "로 결제가 됩니다.
승선카드는
크르즈여행시 선실 키,지불수단 ,신분증의 3가지 역할을 하지요.
그때부터 카지노며 등
그래서 더욱 편리하지요.
@청호 한기수
식사는 3개층 에서
조식의 경우 6시 부터 10시30분 까지
중식은 11시30분 부터 4시,
저녁은 6시부터 10시라
차림은
조식은 부드럽고
중식과 석식은
단백질 등 200여 종류이고
객실이나 갑판위든 어느곳 어디에 서나
취식을 할수 있으니 좋으며
또한 직접가지 를 아니하고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요구를 하면 도착 시키며 야깐의 경비는 추가가 됩니다.
부드럽고 편안함과
취향에 따른 편리성이 있으며,
희망하는 경우
지정된 좌석에서 선정된 매뉴로 활용할수도 있으나 이때의 복장은 정장이지요.
@청호 한기수
서로가 다른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크르즈여행과 육지여행의 절묘한 배합으로 함께 하다보니
새로운 모습들을 터득하며 등
좋은 점도 있기는 해..................요
청호는 규칙적인 생활로
06시 조식을 창측 바다를 보며
취침은 10시30분
이렇게 진행을 하니
육지에서와 같은 감 이라서
혼동이 되지를 아나하야 피로감 없이 즐거움을 만끽 할수가 있어서 좋았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