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
이동민
나의 시선이 닿는 저 먼 산자락에 실날처럼 가늘은 길이 산능선을 향해 기어오른다. 나른한 내 눈은 꿈꾸듯 흐려지면서 아지랑이가 되어 일렁이었다, 산길은 봄 햇살에 실려가버린 듯이 낮은 산마루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의 어느 봄날 오후, 수업 시간에 파도처럼 몰려오는 졸음을 떨치려 고개를 들고 교실 창너머로 바라보았다. 대기도 졸음으로 지친 듯 흐느적거리고, 그 속으로 저 멀리 낮으막한 산이 아지랑이에 싸여 흔들거렸다. 민둥산이었던 그 때, 산 자락을 타고 기어오르 던 산길이 산마루 너머로 모습을 감추어 버리던 모습이 유난히도 내 기억에 담겨서 지금까지도 머문다. 나는 사라진 산길에서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었나 보다. 내 상상만이 찾아갈 수 있는 그곳은 소년적의 내 꿈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 길은 황토색을 띄고, 색연필로 그은 듯이 굵어지기도, 가늘어 지기도 하면서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온통 산이 푸른 녹음으로 뒤덮인 요즘에는 그런 길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때의 내 몽롱해진 눈에는 간절한 소망이 그림자처럼 흐릿하나마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산야는 온통 푸른색이고, 보일 듯 말 듯한 길도 만날 수 없다. 그런 만큼 교실의 창 너머로 눈길을 주면서 꿈꾸었던 환상의 세계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수 십 년이 흘렀다. 화랑에 들렸다가 메마른 봄날의 시골 풍정을 그린 그림을 만났다. 산 둔덕도, 산 둔덕에 누워있는 밭도 온통 황토색이다. 둔덕과 둔덕 사이의 얕은 계곡에는 개울이 흐르고, 개울 가에는 아직 봄기운이 찾아오지 않는 듯 누렇게 말라있는 물풀과 잎이 없는 개버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나는 마른 풀의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좁은 길을 보았다. 그 길은 개울을 따라 가면서 개버들 가지 뒤로 숨었다, 드러냈다 하면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오래 동안 서 있었다.
그 길은 환상을 쫓던 내 어렸던 날을 불러주었다. 그 길은 산 너머로 넘어갔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던, 교실의 창 너머로 보았던 길이다. 길이 닿은 곳은 어떤 곳일까. 내 꿈을 마음껏 그려 보았던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주었던 길이다. 동화책에서 읽었던, 나는 백마를 탄 왕자가 되어서 백설공주만큼이나 예쁜 여자애를 만나고 둘이서 만들어 내는 황홀하고도 신나는 세상이었다. 아니면 가난한 시골 아이인 내게는 없는, 많은 돈을 가지고, 나를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는 세상이기도 하였다. 삐삐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디오가 들려주었던 도회지 세상의 낯선 이야기도 있었다. 라디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난한 시골 아이가 도시에 나가 부잣집 딸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황홀한 이야기이다. 모두가 고개 너머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길의 어디에서 펼쳐진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잊어버렸던 길이었고, 잃어버렸던 환상의 세계이다. 어인 일인지 어른이 된 후로는 소년 적에 꿈꾸었던 세계는 유치하여 드러내서 말하기를 부끄러워 했다. 그랬었는데,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나는 이원희가 그린 안동의 척박한 농촌 풍경 그림 앞에 서서 엉뚱하게도 부끄럽고 유치하다고 느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누렇게 마른 개울가의 풀 뒤에 숨어 보일 듯 말 듯한 길 때문이었다. 그 길은 중학교를 다닐 때 졸음에 겨워서 창 밖을 멍히 바라보았던 풍경 하나를 불러다 주었다. 산마루를 타고 올라와서 능선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고갯길이었다. 그림은 나의 몽상까지도 불러냈다.
지금은 산수화를 볼 때면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길 찾기이다. 신기하게도 산수화에는 길이 있었다. 그림의 앞 부분에 허리 구부정한 사람이 개울의 다리를 건느는데서 시작한다. 길은 개울을 따라 오르다 숲속으로 들어가서 꼬리까지 감춘다, 산모퉁이를 돌면서 바위 언덕 뒤로 숨어버려 보이지 않는다. 무심히 지나면 이 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때부터 길 찾기를 한다. 그러면 어딘가에서 길은 흔적으로나마 흐릿하게 나타났다. 길이 끝나는 곳은 거의가 산속 깊숙한 곳에 있는 산사이거나, 초당이다. 아마도 화가에게는 산사나 초당이 자기의 환상 세계였을 것이다. 나도 길의 끄트머리가 어디에 머무는 지를 확인하고나면 그림 앞을 떠난다.
나는 기차로도, 버스로도, 그리고 승용차로도 내가 중학교를 다녔던 고향 마을을 수도 없이 지나쳤다. 산길을 보았던 얕으막한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버릇처럼 그 산 언저리에 눈길을 준다. 좁고 구불거리던 산길이 보일까 하여 찾아 본다. 산은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여서 산능성마저도 청색의 빛에 녹아지고 없는데, 길이 보일 리 없다.
황토빛이던 산길이 보이지 않으니 환상마저도 사라지고, 삶의 고달픔만 푸념한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힘든 세월이더라도 꿈을 꾸었는데, 꿈이 사라지니, 내가 사는 지금 세상이 더 황량해보인다.
2024. 4
첫댓글 고갯길... 옛시절 산골마을에는 입구에 고갯길이 하나씩 있었죠...
꼬부랑 고갯길 옆으로 보리밭이 펼펴지는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길...
지금은 넓은 길에 검은 아스팔트가 깔린 추억 속의 고갯길... 그리워 눈물이 다 납니다... ㅎ... ^^*...
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그림을 볼때 제시선이 산길을 따라갑니다
옛 산수화를 보는 기초를 알려
주시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