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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상의 교착
제 1 절 판문점 군사분계선 협상
1. 접촉선 기준원칙 합의
1951. 10. 25일 판문점에 설치된 대형 천막에서 본회담이 재개되었다. '51. 7. 26일부터 논란을 거듭하면서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8월 24일 중단되었다.
10월 25일 재개된 회의에서 유엔군측은 "군사분계선은 서쪽의 예성강 하구에서 시작하여 강을 따라 12.8km지점에 이르러, 동북방으로 커브를 돌고 다시 동쪽으로 곡선을 그려 개성 북방 6.4km 지점을 지나 구화리를 경유하여 동북방으로 평강 남쪽 6.4km 지점, 화천저수지 북쪽 약 24km 지점을 지나, 동해안의 고성 동남쪽 18.4km 지점에 이르는 선"이었다.
하지만 북측은 이를 받아드릴리 없었고 상투적이지만 기존의 38도선을 주장하여 타협점이 없었다. 특히 그들은 우리의 협상 조건에 개성을 요구하자 흥정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후 10월 31일, 북측은 현 접촉선에서 4km 폭의 비무장 지대 설치안을 들고 나와 개성을 완전 확보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나타냈다. 그러나 유엔군측이 국제적인 휴전압력에 개성을 북측에 넘기는 선에서 의제 해결의 대타협이 시작되었다.
2. 접촉선의 기준시기 논쟁
유엔군측은 '51. 10. 31일 공산군측이 제기한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 4km 비무장지대 설치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접촉선은 회담중에도 전투를 계속하므로 그것은 최종 조인시의 실제 접촉선으로 해야 한다고 하며 개성도 포함된다고 하자 그들은 지금 바로 현 접촉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의제 토의에 앞서 지금 당장 조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쌍방은 군사분계선은 접촉선으로 하고 비무장지대는 이에 기준하여 4km 폭으로 설치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으나, 군사분계선을 확정짓는 시기에 대해 어느쪽도 양보할 수 없었다.
북측의 요구대로 하면 개성이 북에 가고 나머지 의제들도 자신들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반면에 유엔군은 개성을 포기하면서도 결국 북측의 지연전술에 휘말려 지상군 작전에서의 확고한 우위를 자신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칠 것이 명약관화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행정부와 합동참모부는 회담의 지연의 책임이 유엔군측에 전가되고 공산군측이 어느정도 양보한 만큼 1개월 내에 접촉선에 관한 군사분계선 타격에 박차를 가하라고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지시하였다.
여기에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현행 접촉선을 수락한다면 앞으로 협상에서 공산군측의 비타협적 행동의 증가로 휴전을 획득할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지연된다고 판단하여 반대입장을 표하였다.
그러나 결국 1개월의 유예기간이란 시기를 걸어 조건부 승인이 되어 북측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측은 1개월이 지나더라도 현 접촉선은 변경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유엔군측은 즉각 거절하였고 결국 11월 23일 본회의에 접촉선이 상정된다.
3.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협정
'51. 11. 23일 쌍방 분과위원회에서 본회의에 제시할 건의 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작성하였다.
가. 쌍방은 실제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휴전협정에 명시한 시간에 이 선으로부터 2km씩 철수하여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는 원칙을 수락한다.
나. 이에 따라 합동분과위원회는 즉시 현재의 접촉선을 결정하고 이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중간선으로 확정한다. 본회담에서 이 안이 승인한 후 30일이내 휴전협정이 조인될 경우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는 상방간 실제 접촉에서 발생하는 어던 벼화에도 관계없이변경되지 않는다.
다. 휴전협정 조인까지 적대행위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본회담에서 승인 후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 쌍방은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선을 수정해야 한다.
'51, 11, 27일 본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서명함으로서 4개월간의 줄다기는 끝났다. 유엔군은 현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한다는 주장은 관철시켰지만 결국 북한에게 개성지구를 비무장지대로 휴전회담장소로 시작하여 결국 북에게 할애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제 2 절 군사상황의 소강과 휴전협상의 교착
1. 방어선의 참호화
가. 적극방어 전략
국군과 유엔군은 휴전협상을 개시한 4개월 반 동안의 설전을 통해 11월 27일 드디어 공산군측으로부터 38도선을 휴전선으로하는 주장을 철회하고 쌍방이 대치 중인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피아의 지상군은 문산 서측 11km 지점의 임진강 어귀, 판문점 서방, 삭녕북방, 철원 서북방, 금화 북방, 금성 남방, 어문리, 문등리, 고성 동남방 6km 지점에 이르는 전장 237km에 달하는 전선에서 대치하여 휴전회담의 전개 상황을 주시하게 되었다.
'51년 말 현재, 유엔군은 서부 전선의 미 제1군단이 국군 제1, 영연방 제1, 미 제3, 미 제25, 국 제9사로 개성 서남방의 서해안으로부터 철원 서북방에 주저항선을,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이 미 제2, 국 제2, 미 제24, 국 제6사단으로 평강-금성-화천 방면을,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이 국 제7, 미 제7, 미 제1해병사단으로 관대리-현리-덕곡-노전평 방면에 주저항선을 각각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이 제5, 제11사단을 지휘하여 동해안의 남강연안의 신탄리-고성(남쪽 감호) 방면을, 후방지역에는 백야전전투사령부가 국군 제8, 수도사, 제3사를 운용하여 적의 패잔병 및 공비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반면 적의 배치는 서해안 방면에 북한군ㄴ제40여단이 배치되었고, 그 우측으로 서부전선 일대는 중공군 제65, 63, 64, 39군이, 중서부 전선에는 중공군 제42, 26, 12군이, 그리고 중동부 전선에는 중공군 제68군과 인민군 제2군단 예하 제13, 27사단이 그리고 동부 전선에는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45, 15, 1사단과 최동단에 북한군 제1군단의 제47사단이 배치 되어 있었다.
쌍방은 휴전회담이 개시된 이후 전력의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여 왔다. 공산군측은 중공군이 64만여 명, 북한군이 23만여 명이고, 유엔군은 국군 포함 80여 만명이 유지되고 있엇다. 특히 공산군측은 병력분만 아니라 포병화력을 대폭 증가시켜 전선에 710문의 야포를 갖게 되었고 전차 및 장갑차로 장비한 3개 기갑사단을 전선에 배치할 정도로 전력을 증강시켰다. 공군력도 만주에 공군기 1,25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공군력의 월등한 우세속에 포병도 155mm와 8" 곡사포로 중포병을 강화하여 보병에 근접화력지원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휴전회담은 잠시나마 진지쟁탈전을 중지시키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새로은 대진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진지를 보강한 가운데 공세적 방어를 취하게 된 것이다.
유엔군은 이른바 적극방어의 개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제한목표 공격으로 압력을 유지하여 적에게 전투력의 소모와 출혈을 강요하면서 적의 공격기도를 분쇄하려 하였다.
반면 적은 되도록 휴전협상 기간을 들면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혈안이 되었으며 일부 빼앗간 진지를 공격하여 협상에서의 유리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나. 방어선의 참호화
공산군은 이전에는 야간에 주로 진지공사를 하였으나 이제 잠정 휴전선이 설정된 이후에는 밤낮으로 진지공사에 전력하였다. 그들은 제2차세계대전시의 프랑스의 마지노선과 같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하였으며 고지 후사면에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부 지역은 후방 40km가지 지하보루를 형성한 진지도 있었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거미줄처럼 깊이가 2m나 되는 교통호를 개미집처럼 연결하여, 중공 공간사에 의하면 중공군은 '52년까지 갱도 7,789개 198.7km를 구축하였고, 북한군이 판 갱도는 총 1,730개 88.3km 였고 각종 엄체호가 3만여 개, 찬호길이 260km라 기록하고 있다.
적은 해안선의 방어진지도 지하요새화 하였다. 그들은 아군이 상륙할 만한 예상되는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ㅈ위에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준비시켜 두었다.
유엔군도 공산군보다는 못하지만 주저항선에 개인호와 기관총 등 화기진지를 구축하고 교통호로 연결하고 철조망과 지뢰로 주변을 강화하였다.
1951년 겨울이 다가오고 쌍방은 휴전협정이 조기에 종료될거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장기 소모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정찰전의 전개
쌍방은 상대방에 대한 기선을 확보하고 방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상대 정부 파악이 중요시되었다. 이를 위해 정찰전과 아울러 전초의 전술적 운용이 지장작전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특히 수색정찰대 운용을 강화하고 제한된 규모의 전투정찰도 실시하게 되었다.
수색정찰은 적의 방어진지나 활동을 탐색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실시하였으며, 전투정찰은 매복, 습격 등의 활동으로 적 포로를 획득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실시 되었다.
공산군의 정찰대는 흔히 소대 내지 중대 규모로 드물게는 대대 규모로 편성되어 공중으로부터 관측과 포격을 피할 수 있는 야간에 실시 되었다. 예로써 금성 동서방면에 배치된 중공군 제12군은 '51. 11월 상순에서 '52.. 1월 하순까지 정찰활동을 805회 실시, 하루평균 12개반이 출동한 셈이다.
이에 반해 국군과 유엔군은 통상 중대 내지 대대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 공산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 국부적인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주저항선에 배치된 전방 연대는 공산군의 야간침투를 사전에 저지하기 위하여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아군은 '51. 11. 29일에 68회에 달하는 수색정찰대를 전방에 투입하였으며, 12월 한 달 동안 전부대가 전투경찰을 실시한 횟수는 247회였다. 국군 과 유엔군은 각 연대가 매일 밤 1개 조의 정찰대와 2~3개 조의 매복조를 투입하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있었다.
3. 전초진지 전투
'51년 말 전선 상황은 유엔 당국이 협상을 통하여 전쟁을 더이상 확대화지 않고 결말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적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쌍방의 세력이 점차 균형을 이루게 되어 대규모 전투는 실현가능성이 적었다.
미 제8군은 '52. 1월 중에 미 제1군단 포병들이 중포와 전차를 고지 정상에 추진하고 경사면에 구축된 적의 축성진지를 직접 사격하는 동안,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11사단을 제5사단과 교체하는 한편, 국군 제6사단(미 제9군단 배속)의 진지(북한강 상류 동서)를 국군 제3사단과 인수케하고, 미 제45사단에 이어 미 제8군에 배석된 미 제40사단을 미 제24사단의 진지를 인수케 하는 등 부대교대를 실시하였다.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장군은 2월 2일 "빅 스틱"이란 작전계획을 유엔군사령관에게 건의하였다. 이 계획은 4월 5일 공격을 하여 미 제1군단을 예성강 선으로 추진하고, 미 제1해병사단을 동해안에 상륙하여 양공을 한다는 것이었으나 승인되지 않았고, 이어서 " 홈 커밍"작전 계획이라 하여 상륙작전 없이 국군만을 사용한다는 계획 또한 휴전협정 조인과 맞물려 적에게 빌미를 준다는 이유로 시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미 제8군은 타성에 젖은 수색정찰의 반복실시를 극복하고자 "크램 업"이란 유인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은 "침묵작전"으로 불리었으며 아군이 전선에서 일체의 접적 활동을 중지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유인하여 반격으로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가. '51년도 동계작전
(1) 두매리 부근 전투
(가) 전투경과
이 전투는 '51. 12. 28 ~ '52. 1. 8일간에 문산 정면 임진강 북쪽 두매리 부근에서 국군 제1사단과 중공군 간에 벌어진 전형적인 전초기지 쟁탈전이다.
국군 제1사단은 주저항선을 임진강 북안의 사천-백학산-사미천을 연하는 선으로 추진하여 좌전방에 제11연대를, 우전방 두매리 남쪽에 제12연대를 배치하고 제15연대(-)를 예비로 중공군 제63군 예하 제188사단과 대치하였다.
평촌
개성 하리 사시리
*122
*철모고지 *89
*두매리고지
*무명고지
*대덕산 237 *104
11연대 12연대
*백학산 229
중공군이 '51. 12. 28일 16:00시에 철모고지 전방 300m에서 신호탄과 함께 104고지 일대와 두매리고지 일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여왔다. 이에 제17포병대대에서 미리 준비한 탄막사격을 집중했고 미 제999포병대대에서 적의 예상 포진지에 대포병사격을 실시하였다. 철모고지의 분견대, 89고지 분견대가 104고지로 철수하면서 F-51전폭기가 두매리와 무명고지에 폭격을 개시했다.
적이 다시 104고지로 밀려오면서 백병전이 벌어져 적이 물러났다. 29일부터 고지탈환작전이 시작되었다. 계속적으로 탈취와 피탈을 반복하기를 30일 결국 적의 전차포와 직사포탄 100여 발을 집중하는 중공군에게 고지를 내주고 104고지 후사면으로 물러났다. 이때까지 중공군 300명을 사살하고 23명이 전사했다.
다시 두매리 부근 전투는 '52년 초로 이어져 1월 3일부터 탈환작전이 개시되었다. 결국 다일 적 47명을 사살하며 점령했으나 다시 또 적에게 역습을 허용하여 피탈되고 말았다. 다시 1월 5일부터 역습을 재개하여 백병전속에서 몇번이고 탈취하고 탈취 당하는 반복을 거듭한 끝에 1월 8일 군단의 명령으로 전투를 종료하였다.
결국 국군 제1사단은 '51. 12. 28~'52.1.8까지 결국 두매리를 상실하였지만 기간 중에 적 사살 1,611명, 포로 4명의 성과를 올렸고 국군은 전사 129명, 부상 585명, 실종 2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12연대는 104고지를 중심으로 전초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나)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비무장지대지역으로 탐사제한
1)참전용사 김형필님 증언(제1사, '15)
본인은 '51. 12월에 두매리 부근 전투에 참가했다. 전투 당시에 우리부대는 역습부대로 들어가 고지 정상을 여러번 뺏고 뺏기는 혈전속에 전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나도 여기서 부상당했는데 중대원이 절반도 살아남지 못햇다. 당시도 전사자 수습을 노무자나 일부 우리가 했다. 그러나 워낙 쌍방간에 포탄이 퍼붓고, 우리 유엔공군이 폭격을 하기 때문에 그 참호속에 들어간 인원은 보이지도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104고지라 했다.
2)참전용사 박정효님(제1사, '15)
본인은 '51. 12월 28일부터 '52.1월 8일까지 12일간 두매리 부근 전투에 참여했다. 한번 빼앗긴 고지를 점령하는데는 우리는 단번에 점령하지 못하고 그 목전에서 후퇴하곤 했다. 내가 부상당할 때가지 중대원은 절반 밖에 남지않았다.
(2) 크리스마스고지(1090) 부근 전투
(가) 전투 경과(1차:'51.12.25~12.26. 2차:'52.2.11~2.13)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1951. 12. 25일 전후하여 어은산 일대의 중공군 제204사단이 백석산 북방의 국군 제7사단 최북단 전초진지인 1090(북) 부근 무명고지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하여 왔다. 후일 이 전투를 크리스마스 전투라 불렀다.
당시 국군 제7사단은 '51. 11월 중순 국군 제8사단과 교대하여 이곳에 투입된 후 이미 중공군 제204사단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한 바 있었다.
어은산 *1297
문등리
*1218 *984
*890
암동 수색 *B 내동
크리스마스 고지
*A
*1090(북)
내리
*1090(남) *1220 양구
*938 백석산
'51. 12. 24일 당시 1090고지 부근에서 적의 주접근로를 방어하고 있던 제3연대는 적이 1090고지를 공격할 것으로 알고 적의 기도를 사전 봉쇄하기 위하여 정찰활동을 강화하였다.
이날 적은 17:40분경 20여 명의 정찰대로 B고지 일대의 진전을 탐색하다가 물러 나더니 곧 120mm와 82mm 박격포탄 400여 발로 공격준비사격을 하고 1개 대대가 공격해 왔다.
적은 3중대가 있는 1090고지까지 왔다가 B고지로 퇴각했고 아군은 25일까지 4차례의 공격으로 B고지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군은 26일 다시 공격하여 탈환했으나 야간에 다시 피탈되었다.
다음날 27일, 아군의 강공으로 다시 무명고지를 확보하면서 계속적인 피아 쟁탈전이 지속되면서 '52년초에는 크리스마스 고지(B)일대에서 격전이 계속되었다. 아군은 클렘 업 작전으로 침묵속에 적을 유인 격멸하는 전술을 유지했다. 이에 따라 2월 11일 동 고지를 비워놓고 적을 기다렸고 적은 12~13일 계속하여 동고지 일대를 탈취하려 접근하였고 아군은 격퇴하였다.
이곳 전투에서 적은 200여 명이 사살되고 5명이 포로가 된 반면 국군은 31명 전사에 부상 117명 실종 21명이 발생했다.
이 무렵 포로 획득을 위해 중동부 전선의 미 제2사단에 배속된 네덜란드 대대는 공산군 전초기지인 평강 남방 10KM 별고지(430)를 공격하였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된 콜롬비아 대대도 김화지구 적 전초진지(400고지)를 기습하여 그들의 방어시설을 파괴하였다.
(나)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 비무장지대 안으로 탐사제한
1)참전용사 윤여민 증언(제7-5-11중대, '15)
'51년 겨울에 양구북방에 위치한 어은산 일대 크리스마스(1090고지)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피아간에 역습에 재역습에 주인이 시시각각 바뀌는데 10중대가 피탈되면 11중대가 탈환하는 형식의 전투다. 당시 제3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2) 참전용사 이재봉 증언(제8-16-3대, '16) : '51.2.17일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에 잇는 고지에서 10월경에 중공군을 상대로 ㅊ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중공군과 6일간의 전투 결과 중대원 중 6명만 생ㄷ존하고 대부분 전사했으며, 신병을 보충받아도 금방 전사자가 발생하여 피해가 컸다.
3) 배금석(제7-3-3대) : '50년 8월 30일에 입대하여 제7사단 제3연대 중화기 중대에 배치되어 백석산 전투를 했다. '52년 말 경에는 어은산 남방고지에서 방어 임무중에 새로운 부대오 교체하는 시기에 적이 기습공격을가해 아군 연대에 많은 피해가 났다.
4) 김희범(제7-3-1-2중) : '51.11. 13일에 입대하여 7사단으로 갔다. 양구 전방 문등리 위의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서 당시 눈이 어깨까지 내리는데, 중공군과 교전 중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 밤에는 적군이 점령을 반복하는 가운데 많은 전사자가 생겼다. 나도 여기서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제1중대 전경용 참전용사도 동일 증언)
나. 1952년 춘계전투
미 제8군사령관은 '52. 4월 1일 제한된 진격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계획으로 먼저 "촙 수틱 6"은 증강된 국군 제1개 사단을 미 제9군단 정면에서 평강까지 진격하여 현 제9군단 전선을 금성-평강선으로 하는 것이고, "촙 스틱 16"은 국군 제1군단으로 남강하구까지(고성)진격케 하여 전선을 남강선으로 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당시 휴전회담 성사와 맞물려 실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52년 봄의 상황도 '51년 말과 같이 제한된 전초진지 상에서의 전투가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1952년 4월 전선 상황도
신계
이천
북1군
사리원 시변리 575고지 국12
중39군 중42군 평강 금성 ↓ 중12군 662고지 북3군
중15군 ● ↓ 중68군 북2군 국11
미45사 ● ●x-머스고지
국9 미7 미40 국6 수도사 국3 국7 미25 국8
금천 중64군 국1사 김화 미10군=국1군
중65군 중63군 국2군=미10군
영1사 철원 화천 양구
개성 ● 고랑포 동두천 미9군=국2군 인제
● 두매리고지 포천 춘천
사천강 문산 미1해병 미1군=미9군 가평
부근전초진지
(1) 사천강 부근 전투
판문점 4km 미 해병 5연대
한 해병 1연대
전초소대(2/1)
사천강
개성 5km
*288덕물산 장단(1중대(-1)) 문산 6km
*천덕산 203 *28
*군장잔 213
'52년도에 접어들어 국군 과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수도 서울의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으로 전 전선에 걸쳐 부대를 재배치하는 한편 부대의 인원, 장비의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중동부 펀치볼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국군 제1해병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함께 3월 17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사천강 및 한강하류와 서해안 일원의 주저항선을 인수하여 서울에 이르는 적의 주접근로인 개성-서울가도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 제1연대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로부터 사천강 일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제3대대를 좌, 제1대대를 우, 제2대대를 예비로 좌인접은 미 제1장갑수륙 양용차대대와, 우인접은 미 제5해병연대와 연대하였다.
이때 적은 중공군 제65군 제195사단으로 사천강 서쪽의 덕물산-천덕산-군장산 등 주요고지를 점하여 강 동안의 아군의 전초기지를 감제하고 있었다.
1952. 4. 1일 22:00시에 2개 대대규모의 적이 사천강을 건너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일시적으로 전초선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적시적이 예비대 투입으로 역습을 하여 실지를 회복하였고 적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4월 5일에는 우리 해병이 적 전초기지를 기습하여 12명을 사살하는 등 전초선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이후에도 피아간에 기습전을 반복되었으며, 5월 18일에는 미 제45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9대대전투단도 연천 북방 아스널,이리고지상에서 연대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백병전으로 맞서 고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2) 575고지 전투
금성 1km
*495
*573
율사리 쌍령등
*414
율곡 *575 제7-6중대
방평리 *549 제7-2중대
*649 제7-수색중대
*690
*770 교암산
2연대 7연대 *765 제7-7중대
금성천 6사 = 수도사
이 전투는 국군 제6사단이, 사천강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중동부 전선에서 치른 전초전투다. 제6사단은 1952. 3. 28일 제2, 제7연대를 좌우 전방으로 하여 미 제40사단이 방어하던 금성천 북방의 봉화산(477)-사천리-계암-442-교암산(770)-765-690 고지를 연하는 미조리선상의 주저항선을 인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죽동에 확보, 전선을방어하였다.
사단은 제2군단으로 좌익으로서 좌로는 미 제9군단 예하의 미 제40사단, 우로는 수도사단과 연결을 유지하고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575고지를 포함한 전초진지 보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12군 예하 제31사단 일부와 제35사단 일부였다. 병력은 6,000명 수준이고 제32포병사단 제406포뵹연대의 직접지원을 받고 있었다.
575고지는 주저항선인 765-690고지 선에서 북으로 돌출된 요충으로서 율사리-쌍령등 일대를 감제하여 적의 수색활동을 제어하고 정확한 포격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52. 4월16일 적의 교란사격이 시작되었다. 2개 중대의 적이 침투를 개시했다. 국6-7연대장은 제27포병대대, 미 제300포병대대, 81mm박격포, 4.2" 박격포로 맞서며 일시적 진내진입을 허용했지만 적의 진출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살했지만 아군도 소대장 2명을 포함하여 24명의 전사자와 74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3) 662고지 전투
*627 금강천
*무명산
*439 북한강 천리
*679
*674
어운리 *572 *550 무명고지 *662 수색중대/23
10중대/23
북한강 *748
*629 *949 *973
22연대 23연대 2대대 1대대 23연 18연 18-3대대
이 전투는 1952년 초에 중동부전선 949고지 전방에서 제3사단이 클램 업 작전개념에 따라 작전 중에 중공군과 치른 전초진지 전투다
국군 제3사단(백남권 준장)은 '52. 1. 12일부터 국군 제6사단의 작전임무를 인수, 미 제9군단의 우익으로 게리선상의 949고지를 중심으로 북한강으로부터 석장리간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방어하고 있었다.
제23연대는 사단 중앙연대로써 949고지-739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제3대대 9, 10중대로 사단 전투지대에서 가장 중요한 접근로상의 무명고지(550)와 662고지에 전초진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정면의 적은 중공 제12군 제35사단 제104연대와 제68군 제203사단 제607, 609연대로써 자패리-북한강 돌출부-679-674-송정-암리를 연하는 선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3-23연대는 적을 유인하여 타격을 주고 포로를 획득하기 위해 2월 10일 04:00시 제9중대는 완전철수를 가장하면서 연대 수색중대 및 제10중대에 662-무명고지의 전초진지를 인계하였다.
침묵을 지키던 적이 드디어 2월 15일 01:50분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662고지의 수색중대 전초기지를, 적을 유인 격멸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오히려 전초기지가 다음날 새벽 피탈되고 말았다.
2월 16일 09:30분, 고지탈환을 위해 제3-9중대가 투입되어 백병전을 전개한 긑에 17:05분에 드디어 탈환하고 제23연대는 고지 주변에 3중의 철주망과 500여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때 '51. 11~'52. 4월까지의 지상전에는 약간의 기습작전이 전개 되었으나, 쌍방이 점령하고 있는 방어진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4) 호도 전투
호도 전투
호도
월사리 반도 진풍면
호도전투는 국군 해병이 해안봉쇄를 위해 실시한 도서 방어 전투였다. 이 전투는 해병 도서부대 제7대대가 서해안 호도에서 1952.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북한군 제6군단 예하 중대의 공격을 격퇴한 전투다.
북한군은 1952년 초, 아군의 대규모 상륙작전과 해안기습 활동에 대비하여 서해안 경비를 강화하였고 특히 석도와 인접한 장연.은율.송화.용강일대 해안지역에 사단 규모를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석도 대안인 서포리 반도, 월사리 반도에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점차 공세적 방어를 취하려 했다.
해병은 독립 제41, 제42중대에 이어 양도를 선점한 제43중대의 3개 도사 작전부대를 모체로 1952년 1월 15일 도서부대를 편선한다. 이 독립 제42. 제43중대를 제8대대로, 석도에 진주한 독립 제41중대를 제7대대로 각기 현지에서 증편하고 제9대대와 부대본부 및 직할 근무지원 중대를 신규 편성한다.
진해 신병훈련소에서 제9대대 편성을 완료하자, 제7, 제8대대를 제외한 이들 1,250명은 도서이동명령으로 '52.1.15일 이동을 개시하였다.
호도는 은율 앞바다 황해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섬으로 2개의 고지대로 형성딘 무인도였다. 도서에 식수가 전무하여 용수는 전략 석도로부터 공급되었고 대안의 월사리 반도와는 450M 거리에 있었다.
적은 '52.1.30일을 기하여 연일 포격을 실시하고, 2월 3일에는 상륙을 기도하는 적선이 출현하여 함포지원으로 격퇴한다.
적은 '52. 3월 25일, 호도에 30발의 포격에 이어 160여 명이 4척의 목선에 분승하여 호도를 기습하기 시작한다. 일부 병력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도 하였다. 적은 주로 밤에 기습하고 아군은 낮에 적을 기습하는 과저잉 반복되는 과정에 아군 항공기의 지원하에 적을 물리친다. 하지만 호도가 지리적으로 불리하여 전원 석도로 4월초에 철수시킨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39명이 발생하였고, 적 6명 사살에 포로 2명을 획득하였다.
4. 전초기지 유해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결과
전초기지는 지금 모두가 북한군지역으로 출입이 곤란하다. 다만 참전용사 일부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두매리지역은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 그 지역을 육안 관찰은 해보았다. 이 전초기지는 다음 휴전임박해서 또 격전의 현장이 되며 아군이 확보한 곳은 없다.
가. 사천강부근 전초진지 부근 : 나즈막한 산에 북한지역이 바로 눈에 잡히는 곳이다. 비록 비무장지대 안이라 해도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은 포탄 탄흔이 온통 갈려 있기에 어느 곳이 개인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일부 우리의 매복호가 있음) 분명 전투 유품은 널려 있다.
나. 두매리고지 부근 : 100m내외의 낮은 산들이다. 바라보이는 철모고지 등이 나무 하나 없이 맨몸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1사단의 기록은 이곳에서 129명이 전사하고 2명이 실종이라고 한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
전초진지 전투간 기록을 잠깐 비교하면, 제7사단의 X-머스 고지('51.12.25-'52.2.13)전투는 전사 31명. 실종 218명, 제1사단의 두매리고지전투('51.12.28-'52.1.8)은 129명 전사. 2명 실종, 제6사단의 575고지전투('52.4.16-6.14)는 58명 전사, 제3사단의 662고지 전투('52.2)는 미수집 유해 31명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