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2]
이재명(李在明, 1888?-1910)③
이재명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해였던 1909년 11월 평양에서 동지들과 만나서 이완용, 이용구(일진회 회장), 송병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고, 특히 이재명은 이완용을 직접 처단하겠다고 했습니다. 12월 중순에 서울로 왔고, 22일에 종현 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거행되기로 예정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처단을 위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가 추도식 후 인력거를 타고 돌아가는 이완용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인력거꾼이 이완용의 경호를 겸한 사람이었기에 그를 찔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지만 이완용은 중상을 입은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 힘에 부친 이재명은 이완용의 폐를 관통시켰으나 어깨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재명이 연속해서 휘두른 칼에 이완용은 허리 부위까지 찔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재명 역시 호위경관의 칼에 허벅지가 관통되었고 이재명은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어서 이 칼을 빼라!”고 소리쳤습니다.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온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완용이 죽었다!”고 외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완용이 죽었다는 소문이 시내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으나 세 차례 칼에 찔린 이완용은 아직 죽지 않았고, 그곳에 온 어떤 사람이 인력거를 제공함으로써 숨이 붙어 있던 이완용은 자택으로 옮겨졌습니다. 한성병원 일본인 의사,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 쓰네사부로가 급히 달려왔고 또 다른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함께 와서 이완용을 살려내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고비를 넘기자 다음날 대한의원으로 옮겨서 기쿠치 원장이 수술을 했으나 상태는 여전히 심각했습니다.
<참고도서: 박상우 장편소설 『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