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
그동안 친일파는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개인의 외형적 행적에 초점이 맞춰져 규정돼 왔다. 그러나 친일 행위 범위를 사상적으로 확대해 근대 개항 이후로 잡아야 한다.
대부분의 친일 규정이 중일 전쟁 이후의 행각을 주축으로 하는 까닭에 사이비 문화 통치 시기의 끔찍한 문화적 친일이나 그 이전의 사상적 친일로 인한 독립 정신의 와해, 민족해방투쟁의 분열을 초래한 각종 사이비 독립 노선 등등은 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2. 해방 뒤 친일파 청산 좌절의 원인과 그 민족사적 교훈
해방공간은 첫째 식민지 정치 지배 세력을 독점한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인 경찰관 90%가 이탈하는 등 국가 억압 기구가 와해됐고, 둘째 산업자본의 93%와 농지의 18%가 일본인 소유여서 이들 생산수단의 소유 관리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며, 셋째 당시 사회의 헤게모니를 지주·자본가·친일 관료가 아닌 노동자·농민이 장악하는 등 친일파를 근본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 구조적 조건은 미군정이 반공·반소·반탁·반혁명을 기조로 하는 남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 정책 기조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민지 통치 구조를 유지, 강화하고 친일파를 보호, 육성함에 따라 와해됐다. 즉 (1) 일본 고위 관리를 미군정 고문으로 존속시키고, (2) 직간접의 친일 경력 인사들이 행정 고문, 민주대표회의 등 미군정과 관련된 기관의 90% 이상을 채우며, (3) 일본 경찰·군대 출신이 경찰 간부직의 80%를 차지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한 뒤 미군정의 보호 속에 5·10, 5·30 선거를 통해 일종의 ‘괴뢰 국가’(국가 기구가 외세에 의해 수립되고 보호돼 그 민족의 이익이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하고 외세의 요구·이념 등을 대변하는 체계)를 형성해 지배 위치를 확고히 하고 반민특위 등 친일파 청산 요구를 좌절시켰다.
친일파를 제대로 올바르게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 민족정기와 민족 자주성이 짓밟히고 있으며 친일파 잔재 미청산으로 빚어진 역사적 퇴행은 민족사적 전환기인 현재의 통일 시대에 12·12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신과 5·6공의 반역사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명확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동국대 사회학)
3. 친일파 청산 좌절로 인한 민족사의 고난
해방 뒤 친일파 청산이 좌절됨으로써 식민지적 반봉건 사회가 그대로 유지됐으며 종속적 경제 구조와 파쇼적 정치 행태, 정치 구조가 정착되고 말았다. 친일파 미청산으로 발전된 자주독립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실현이 실패하는 등 민족을 파탄시키는 정치·경제 구조를 떠안게 됐으며, 더욱더 큰 문제는 이렇게 누적된 우리의 현실이 세계사적 도전에 대응하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할 주체와 철학, 환경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봉우 반민족연구소 소장)
- 이상 1993년 반민족문제연구소 토론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