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천재, 봉준호
201910234 박세진
코로나 시대, 예전처럼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닐수 없는 요즘 나는 유튜브나 드라마, 영화를 보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고 넷플릭스, 왓챠 등 수많은 OTT서비스를 통해 무료한 시간을 달래곤 한다. 그래서인지 "성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인물이 바로 올해 초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였다. 그는 세계 유명 영화제의 상들을 휩쓸었고 봉준호가 곧 장르라는 말처럼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특히 올 초부터 K-POP과 K-영화에 이어 K-방역까지 K붐이 일고 있어 봉준호 감독이야 말로 K-영화의 거장으로써 "성공"이란 단어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은 12살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갖고 영화광으로 청년기를 보냈다. 군대 전역 후 동아리 "노란문"을 만들고 첫 단편영화 "백색인"을 연출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11기로 졸업한 후 충무로에서 조연출과 각본 등으로 경력을 쌓다가 남들보다 일찍 장편연화 "플란더스의 개"로 데뷔하였다. 봉준호는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의 처참한 흥행실패로 위기에 빠졌지만 그의 재능을 믿은 차승재 대표가 다시한번 기회를 주었고 이후 한국역사상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살인의 추억"을 연출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살인의 추억" 캐스팅 당시 누구도 데뷔작을 실패한 감독의 영화에 선뜻 출연하겠다고 하지 않았는데 이때 배우 송강호가 무명시절 자신에게 먼저 안부인사를 해준 봉준호의 따뜻한 심성을 기억하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송강호와의 두번째 작품 "괴물"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봉준호는 한국의 대표 감독 반열에 올라선다. 이후 "마더", "설국열차", "옥자" 등을 연출했고 2019년 "기생충"으로 한국영화 100년 역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 노미네이트 중 4개부문 수상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어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케이스로 그동안 수많은 외국어 영화상 작품이 작품상에 도전했고 또 번번이 고배를 마셨으나 "기생충"이 그 한계를 완전히 부셔버리며 새로운 역사를 쓴것이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성공"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국립영화제작소의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이며 외할아버지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구보 박태원으로 가족력이 소위 말하는 금수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노력하는 천재였다. "쌓아놓고 공부했었죠. 알고 싶었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영화 "괴물"의 CG제작이 무산되어 막중한 책임과 압박감에 눌려 자살까지 생각했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여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그는 "절대 자동으로 돼서 나오는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성공을 보고 그저 "금수저"라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 지는 대목이였다. 나 또한 허황되었다 할수 있는 나만의 꿈이 있으면서 언제부턴가 다른 이의 성공을 보면 그 이유를 그사람이 아닌 그의 배경에서 찾고 있던 것이다. 나 또한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공부하고 터득해서 내것으로 만드는 그의 모습을 본받아 노력없이 결과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시기적절한 주제와 블랙 코미디적 요소, 여운이 남는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나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고 그의 영화를 볼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