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
흥선대원군은 서원은 부패의 온상이라고 생각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학문을 익히고,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사학기관이다.
고려 말기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시초로 하여 조선 중기에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에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백운동서원에 내리고, 읽을 책과 부릴 노비와 경비로 쓸 토지를 내려 주었던 것이다.
이것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한다.
그 뒤 각지에 서원이 설치되었고 기부받는 일이 허락되었다.
서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곳에는 글을 익히는 재실(齋室), 제사만 지내는 향사(鄕祠) 따위가 생겨나 서원 구실을 했다.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되었고, 여기에 든 유생은 벼슬줄을 잡기가 쉬웠다.
이에 따라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그 유학자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든든한 양반 밑천이 되었고, 향촌에서 존경을 받고 행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별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이나 제자들이 돈푼이나 있고 권력의 줄이 있으면 제멋대로 서원을 세웠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서원이 줄잡아 전국에 1000여 개로 불어났다.
유생들은 온갖 특혜를 누리며, “내 스승이 더 훌륭하다”거나 “아무 선생은 소인행동을 보였다”거나 하는 일로 파당을 짓기에 열중했다.
또 원회(院會)니 도회(道會)니 하는 구실로 몰려다니며 무위도식하는 무리로 전락했고, 서원의 원생에 끼지 못하면 행세를 못하는 현실로 변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서원의 증설을 금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서원 중에서도 가장 세도를 부린 곳이 청주에 있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과 과천(오늘날의 노량진 근처)에 있는 사충서원(四忠書院)이었다1) .
서원 중에서 가장 세도를 부렸던 화양동서원, ‘화양묵패’라고 하면 관 · 민 가운데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만큼 관가의 체포영장이나 고지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곳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에 묵패(墨牌)를 돌렸다.
다시 말해 먹을 조(彫, 도장의 일종으로 서원의 상징)에 묻혀 찍은 문서를 각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냈다.
그러면 관아나 부호들은 그 묵패에 찍힌 내역대로 경비를 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지 않으면 고을 원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며, 부호들은 “부모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느니, “부모에게 불효했다”느니, “자식을 잘 가르치지 않았다”느니, 좀 지체가 낮으면 “양반에게 대들었다”느니, “관가에 복종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명목으로 서원의 뜰에 잡혀 와 무릎을 꿇게 되었다.
붙잡혀 온 자들이 제대로 토지나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사형(私刑)을 하기도 하고, 관가에 고발하여 가두게 했다(서원에는 감옥이 없으므로).
일단 관가에 잡혀가면 서원의 통지가 있어야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
유생들은 서원의 임원 따위가 되려고 재물을 바치며 안간힘을 썼다.
거꾸로 서원에서 어느 부호를 점찍어 장의의 감투를 씌우면 싫어도 적당한 토지를 바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체포영장이기도 하고 세금고지서이기도 한 묵패가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화양묵패’라고 하면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묵패의 효력은 관가의 체포영장이나 고지서보다도 훨씬 큰 위력을 발휘했다.
관가의 것은 일정 지역에서만 통하지만, 묵패는 전국 어디서나 통하기 때문이다.
사충서원의 서독(書牘)도 그에 못지않았다.
사충서원에서 편지를 보내면 누구랄 것 없이 그 편지대로 시행해야 했다 .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앙의 사법기관인 형조나 한성부에 잡혀가기 일쑤였다.
화양동서원 밑에는 이른바 복주촌(福酒村)이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지정음식점 겸 여관이었다.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원회를 할 때면 전국의 유생 수천 수만 명이 몰려들었고 평소에도 수십 수백 명씩 드나드는 탓으로 이곳은 보통 이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이 복주촌을 상민들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원의 직영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종사하는 하인배까지 서원의 특권을 고스란히 누렸다.
곧 군역 · 부역을 면제받는 것이다.
돈푼깨나 있는 상민들은 이 원노자리를 사서 군역 · 부역을 면제받았고, 실제 복주촌에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 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 수가 얼마인지 확인할 기록이 없으나 상당한 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횡포는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이나 그 서원 계통의 위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전국에 걸쳐 자행된 폐단이다.
서원은 사회적 부정, 정치적 비리의 온상이었다.
더구나 권력을 끼고 자기네 계통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조정 일에 시비를 걸거나 붕당을 짓는 일로 조정과 민간이 평온할 날이 없었다.
서원을 부수고 신주를 땅에 묻어라
흥선대원군은 단계적으로 서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는 서원의 증설을 금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리고 서원의 관리권을 서원에 모시는 유학자 본래의 후손(本孫)의 손에서 빼앗아 그 서원이 있는 고을 수령이 주관하도록 했고, 그 경비도 최소한도로 줄여 관가에서 내도록 조처했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고종 1)에 조대비를 통해 이런 분부를 내리도록 했다.
우리나라가 유학을 높이고 도학을 중하게 여겨 4~500년 동안 문물을 드러내 놓고 밝혀 찬란히 갖추어졌도다.
그리고 사람이 옛 현인을 높이고 사모하여 서원과 향사를 세운 것은 본래 그 학문을 익히고 그 정신을 밝히려는 것이었도다.
조정에서도 이에 따라 액호를 내리고 토지와 일꾼을 준 것은 그 뜻이 훌륭했고 그 은혜가 두터웠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글 읽는 소리가 쥐죽은 듯 들리지 않고, 술이나 먹고 다투면서 이기려는 일이나 벌이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반이 넘게 정한 원노에 끼어들어가게 하고, 평민을 학대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면서 이익만을 찾아 나서도다.
서로 본받아 사사로이 서원을 이곳저곳에 세워 곳곳마다 서원이 바라다보일 정도이며, 공갈 협박을 일삼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도다.
서원 · 향사를 세운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는가?
옛날 현인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즐거이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이것을 크게 바로잡거나 누습(陋習)을 고쳐서 옛 현인 · 군자의 신령(神靈)에 사죄하지 않을 수 없도다.
이제부터 만일 서원 · 향사를 빙자하여 평민을 침학하는 자가 있다면 관가에서 잡아들여 죄상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각 고을에서는 감히 숨겨 두지 말고 낱낱이 잡아들여 아뢰어서 중률(重律)로 다스려 사류의 자리에 끼지 못하게 하라.
사액서원은 토지 3결을 갖추어 법에 따라 면세하는 이외에 만일 스스로 3결을 못 갖추었다고 함부로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수를 채우려는 자는 일체 적발하여 바로잡을 것이며, 원생과 원노는 비록 정식(定式)이 있으나 그 수가 지나치게 많은 폐단이 있으니 원노나 고지기 등 긴급한 일꾼들만 조정에서 정수를 정해 준 것 말고는 일체 뜯어고쳐서 군액에 채울 것이로다.
- 《고종실록》 권1, 원년 갑자 8월조
위의 조치들은 서원의 부정과 증설을 막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국의 썩은 유생들은 불만이 커지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즈음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척화정책을 펴고, 경복궁의 중건을 서두르며 왕권 강화를 다지는 한편,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수습하느라 서원정책에는 골몰하지 않았다.
이 틈에 유생들은 대원군의 비교적 온전한 서원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대원군이 처음에 서원의 폐단만을 시정하고 철폐까지 단행하지 않은 것은 몇백 년 묵은 뿌리를 쉽게 뽑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횡포를 일삼던 유생들이 반성은커녕 기승을 부리자 일대 용단을 내렸다.
전국의 서원 중에 횡포가 적은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헐어 버린 것이다.
헐어 버린 서원 가운데 당연히 화양동서원과 사충서원도 포함되었다.
철폐된 서원의 신주는 땅에 묻게 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철원매주(撤院埋主)’이다.
격분한 전국의 유생들은 사생결단으로 들고 일어났다.
떼를 지어 광화문으로 몰려와서 궁궐 앞에서 유학이 어떻고 교화가 어떻고 도학이 어떻다는 따위의 낡아빠진 문투로 엮은 상소문을 들고, 자기네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코웃음을 치며 유생들을 몰아냈다.
민란 중에는 발을 개고 서원에 앉아 있던 유생들은 이 일에는 몸을 벌벌 떨며 대들었지만 흥선대원군의 호령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원의 횡포를 막아 보려던 영 · 정조도 못한 일을 흥선대원군이 해낸 것이다.
서원의 유생들은 기가 한풀 꺾였고, 서원을 빙자해 백성들에게 부리던 횡포도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의 뛰어난 결단력이 아니고는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고, 그 영단으로 몇백 년의 고질이 영영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이 실세하고 난 뒤 유생들이 화양동서원을 다시 재건하는 따위의 운동을 벌인 것만 보아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가 얼마나 강경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의 혁신정치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