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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8일(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주님의 수세 주일)
이사야 58:13~14
주일성수의 축복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할렐루야! 오늘은 2023년 두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주현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절기를 제정하여 지켜왔습니다.
교회의 절기들은 축제일과 무 축제일로 구성되는데, 축제일에는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저마다의 특별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해마다 반복되는 교회력을 통해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양육을 받게 됩니다.
교회력이 일 년간의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 놓게 한다면, 우리가 매주 지키는 주일은 일주일간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 줍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력과 주일을 기억하고 지킴으로, 삶 속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묵상하게 됩니다.
몇 해 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진흥원에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인 500명을 대상으로 주일성수에 대한 실태를 조사했는데, 응답자 중 29.1%만이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주일에 가끔 결석한다는 응답은 34.4%였고, 자주 빠진다는 응답은 34.7%였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취미생활, 경조사, 학업과 경제활동, 가족관계, 영적 침체 등의 순으로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결과를 가지고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주제 발제를 했는데,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땅에 부흥의 바람이 불었던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 시기에는 교회마다 주일에 세 차례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전에는 성경공부, 낮에는 예배, 저녁에는 부흥회를 열었는데, 저녁 예배는 영적인 부흥 즉,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부흥 집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박용규 교수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이 저녁 예배를 없애고 대신 오후 예배나 목장예배, 가정예배로 예배 형태를 변형시켜 스스로 영적 위기를 자초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주일성수의 위기라는 그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 주었던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이 매 주일 예배당을 가기 위해 몇십 리씩을 걸어야 했던 그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예배당에 가기 위해서 옷을 깨끗이 빨아 다려 입었고, 헌금으로 드릴 지폐를 다리미로 빳빳이 다려서 드렸습니다.
비록 그러한 선조들의 열정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는 맞지 않을 수 있어도,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이 드린 헌신과 열정을 필요 없는 것인 양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뜨겁고도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한다면,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다시 뜨겁게 일어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까? 주일을 지켜야 합니까? 안식일과 주일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은 그 배경 상 구약성경의 안식일 개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지금도 안식일 교회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구약성경대로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근거는 신약성경에 근거합니다.
마가복음 2장 27~28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특별히 주일은 안식 후 첫날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식 후 첫날에 모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일마다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찬을 나누며 부활의 주님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 보면,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주간의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인 주일을 가리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언급한 “주의 날”은 주일을 가리킵니다.
이상과 같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로 지켰고, 그것이 이천 년 교회 역사에 전통으로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주일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의미는 안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주일은 그 배경 상 구약성경의 안식일 개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첫 번째 의미는 안식입니다. “안식”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쉼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은 우리가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쉼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개념이 구약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창세기 2장 1~3절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 안식이 필요하셨을까요? 혹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심한 피곤을 느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셔야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처럼 힘든 일을 끝내고 쉬어야 하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일 곱째 날에 안식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안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안식하심으로 비로소 천지창조가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꾼이 쉬지 않고 계속 도끼질을 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쉬면서 도끼날을 날카롭게 갈아주어야 더 효과적으로 도끼질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머리에 지식을 주입한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학교 일을 잊고, 그저 학교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소중한 안식일이 왜 우리 인간에게 사라져 버렸습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평생 수고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인간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땅은 이전의 왕성한 생산력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죄에 빠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안식의 땅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한 인류의 비극적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동생을 돌로 쳐서 무고한 피를 땅에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인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라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역사의 악순환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담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는데, 그 아들 가인의 죄로 말미암아 다시 땅은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가인처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입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과 쉼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안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과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평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수고하며 유리 방황하는 우리에게 과연 참된 평화가 존재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바닷물로는 우리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유리 방황하는 인간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영적 목마름을 해결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선사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예수님은 우리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우리 영혼의 생수가 되십니다. 인간은 오직 우리영혼의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날이요, 주님으로부터 영혼의 생수를 공급받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지는 날이요, 내 영혼의 반석에서 물이 터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우리를 얽어매는 무거운 굴레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일은 우리에게 축복 된 일이며, 우리가 영적인 기쁨을 누리고, 유지하게 하는 비결이 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모두 건축한 후, 수문 앞 광장에 모였을 때, 그들은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을 전해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를 비롯한 영적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너희 여호와의 성 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 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9~10).”
주일의 분위기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슬퍼하며 우는 날도 아니고, 근심하는 날도 아닙니다. 주일은 살진 것을 먹고, 단것을 마시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는 날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이라는 책을 썼던 ‘마르바 던’은 안식을 가리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원죄적 성향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로 안식을 뜻하는 ‘사밧’이라는 단어는 ‘중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식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모으고 획득함으로써 만족을 누리려는 우리의 노력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은 우리가 낮에는 수고하지만, 한밤중에는 깊은 잠에 빠져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과도 같습니다.
단지 안식의 개념이 육신 적으로 먹고, 자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쉼을 얻고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며, 이웃과 음식을 나눔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중단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안식의 참된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주일은 우리의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창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안식일에 관한 구체적인 명령들이 기록된 곳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을 기록한 곳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입니다.
먼저 출애굽기 20장 8절 이하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그런데 출애굽기의 안식일 준수 명령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창조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안식은 창조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일 곱째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십계명을 기록한 신명기 5장 15절 이하에서는, 출애굽기와 다른 면이 강조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들을 인도해 내신 사건을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이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되어 있고, 신명기에서는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이 ‘하나님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받은 소중한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회상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구원역사를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우리 삶의 중심부에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때문에, 주일은 마치 우리 삶의 출발선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100m 달리기를 하거나, 200m 400m, 혹은 42.195km의 장거리 마라톤 경주를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흰색으로 그어진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출발해야 합니다.
이같이, 우리는 주일을 지키면서 과연 우리 삶의 출발선이 어디인지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은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내가 받은 소중한 구원을 묵상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6일 동안 세상에서 주님을 떠나 멀리 방황하더라도, 우리는 주일에 다시 구원의 하나님께로 돌아와 인생의 출발점에 서야 합니다.
게다가 구원의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삶에서 날마다 재확인되어야만 하는 감정입니다. 단지 우리의 머릿속으로 “이제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가 받은 구원에 감격하면서, 동시에 두렵고 떨림으로 남은 구원의 과정을 이루려는 진지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주일마다 출발선으로 돌아와 구원의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오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 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 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3~14절).
첫째로, 주일에는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 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부정적인 명령입니다. 주일에는 오락을 금하고, 육신의 정욕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주일에는 커피숍도 가지 말고, 영화도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문화 자체를 터부시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좋은 문화, 성경 적인 문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문화는 즐기고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율법적인 것이 성경 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안식일의 정신은 우리의 발을 금하고, 우리의 말을 사사로운 것에 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주일을 귀하여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 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면 …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일을 존귀하게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의 기업으로 길러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일을 존귀하게 여기고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려 주십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 8년간 재임하면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한 약속을 지키며 철저하게 주일을 지켰습니다.
한번은 소련의 수상이었던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 주일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흐루시초프를 예방한 후에, 자기와 함께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련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하게 찌들어 있던 때라 흐루시초프는 함께 교회에 나가자는 이야기를 듣고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핑계를 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주일에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소련의 수상이고, 이 나라의 귀한 손님이지만 주일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고 하는 귀한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이젠하워는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젊은 시절 소위 계급장을 달고 군대에 가서도 그는 꼭 주일이면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다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아이젠하워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던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스가랴 4장 6절 말씀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주일을 귀하여 여기고 거룩하게 지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듣고 앞으로 일평생 동안 주일을 성수 함으로, 주일성수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한 날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면, 여러분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땅의 높은 곳에 올리시고, 야곱의 기업으로 여러분을 길러 주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이 귀한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고 누리는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