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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 소감-배점수 작가❤ [종합문예유성에서 시, 동시, 시조 3개 부문 등단]
2024년 6월 이후 신인문학상 당선자분들의 당선 소감문을 한 분씩 올리고 있습니다. (사)종합문예유성 문예지 제22호 신인문학상 당선자 명단 발표 PPT는 (사)종합문예유성 문예지 제22호 출간 전에 올리겠습니다. 2024년 7월, (사)종합문예유성 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신 배점수 시조 작가님의 당선 소감문 올립니다. 신인문학상 등단작과 입선작, 심사평은 (사)종합문예유성 문예지 제22호에 실리며 2024년 9월 초에 출간됩니다.
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 소감 - 배점수 시조 작가
시와 시조는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하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은이의 마음과 혼이 축약되어 있기에 지은이의 해석이 가장 중요하고, 지은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해야만 그 시와 시조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평 탱자는 꿈을 접고 가평 탱자로 살아온 한과 그 한을 승화시키겠다는 다짐을 적은 한풀이 시조이다.
사실 난 나주고등학교 1학년 때 나주시의 금성시 초대시장 박일출 시장의 학생 리더 표창장을 받았다. 지금의 나주시는 시로 승격하면서 영산포읍과 나주읍의 세 싸움으로 도읍의 유래를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1년 간은 금성시로 명명했고, 시장도 요새처럼 시민의 손으로 뽑는 시장이 아니라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선 시장이였다. 근데, 배점수는 그 표창장을 받는 순간 '내가 시민사회 활동을 할 적에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시민한테 인정 받은 사람이 시장이 될 것이다. 난 그런 금성시장이 될 것이다!'라는 다짐을 하고 금성시장이 되기 위해, 후에 나주시로 변경되었지만 나주시장이 되기 위해 나주 고등학교 학생회장이 되었고, 그 당시 대통령이 육사출신들이라 육사를 지원했으나, 외가쪽에 빨지산 경력이 있다는 연좌제로 육사를 진학하지 못했다.(엄마가 이 세상에 안 계시기에 40년이 지난 오늘에야 내가 왜 육사를 진학 못했는지를 밝힐 수 있다.) 첫 째로 그 한이 있는 가평 탱자이다.
그러나 나주시장의 꿈은 포기하지 않고 해병대를 지원해서 체력과 정력을 다지고, 아버지의 농업에 대한 한을 풀어보기 위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1991학번으로 진학해서, 나주로 향하기 위한 체력과 정력과 사회적 스팩을 쌓기 위한 방송대 학생회 활동과 결실련 '우리 쌀 농산물 지키기 대책위원회' 농민 활동을 활발하게 펼칠 적에 내 사랑하는 마님을 1993년에 만나서, 1994년 10월 23일 결혼하게 된다.
방송대 농업학과 일년 후배이면서 동갑네기인 마님을 만나 세 가지 약조의 조건으로 결혼에 합의했다. 첫째는 "난 고 1때 나주 시민한테 인정받은 나주시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20대는 서울서 뒹굴고, 30대부터는 고향 나주에서 헬스클럽 하나 차려놓고 농민 활동으로 나주시장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데! 30이 되어 나주로 가겠는가?" 하고 내 마님 후보자한테 물으니까, 그 당시에는 나이는 같으나 하늘 같은 방송대 학생회와 메벗 산악회 1년 선배인 내게 순순히 "네!" 하고 다짐했다. "좋아, 그럼 두번 째! 난 결혼을 해도 밥 세 끼 이외에 더 이상의 부는 축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결혼을 하겠는가?"라고 내 마님 후보자한테 물었다. 그런데도 망설임 없이 내 마님은 "네!" 하고 대답을 했다. 내게 꽁깍지가 단단히 쓰인 모양이다. "세 번째! 난 알다시피, 안산 고려선원이라는 절에서 1년간 행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머리를 길렀지만 앞으로 만년 행자라는 생각으로, 이 오탁악세의 사바세계를 진흙에서 연꽃처럼 뒹굴다가 갈 것이다. 해서 우리가 결혼해서 혹 아이들이 생기면 그 아이가 독립을 하거나, 혹 독립을 못하더라도 우리 나이 55세가 되면 난 다시 내 은사 스님이 살아계시면 은사 스님께, 혹 은사 스님이 살아계시지 않으시면 내가 본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교가 살아있는 태국으로 가서 출가를 할 것이다. 그래도 나와 결혼을 하겠는가?"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근데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어찌 이 여인을 마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서 결혼을 하고 마님으로 모셨는데, 난 사기를 당했다. 하하하하! 충북 제천이 고향인 마님은 "농촌으로는 갈 수 있는데, 자기 하는 꼴을 봐서는 대전 이남으로는 내려갈 수 없어! 나주로 가면 자기는 허구한 날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서 난 외톨이가 될 것이 아니야?" 하고 마님은 첫 번째 약속부터 어긴 것이다. 이미 이쁜 딸네미와 멋진 아들을 낳은 후의 일이라 나도 또 다시 협상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두 아이를 볼모로 삼으니까 이젠 내가 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까 내 마님도 이해된다. 가평에 와서도 야구와 운동에 미쳐서 밖으로만 싸돌았는데, 나주에 갔더라면 오죽했을까?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나주로 못 가고, 나를 중심으로 만든 방송대 메벗 산악회 2년 후배인 1993학번 신상철 형의 뒷산 화악산에 반한 내 마님의 손 따라 내가 더 반해버린 가펑으로 1998년 5월 1일에 2년 간 집을 짓고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가평 생활에 적응하느라 별짓을 다 했다. 더 이상 남을 위해 내 땀을 허비하지 않겠다고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매일우유 가정 배달 대리점을 2000년도에 시작했다. 그 땀 값은 고스란히 인정받아 경제적 안정도 되찾았다.
가평에서 가평탱자가 되었구나! 하는 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0년에 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마라톤 동아리를 만들어서 국민생활육육상연합회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2002년에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히는 운동인 야구 동아리를 만들어서 2003년 국민생활체육야구연합회를 만들었다.
국민생활체육야구연합회를 만들었으나 야구할 곳이 가평군 내에는 없어서, 당시 양재수 군수님을 설득하는 '자라섬 개발 제안서'를 작성해서 오늘의 자라섬 개발의 시초인 자라섬 야구장을 만들고, 2004년 사회인 야구 대회인 자라섬 리그를 개막하면서 땅콩을 심던 중국섬은 자라섬으로 명명하게 되었고, 이를 본 인계진 감독이 야구장을 기반으로 2004년 가을에 자라섬 째즈 페스티벌을 하면서 자라섬은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이 만든 봉사 단체로는 이쁜 딸 혜련이와 멋진 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각 장애인 봉사 단체인 흰지팡이회와 다른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가평군 가족 봉사단을 만들어 그 중 가족 봉사단은 가평군자원봉사센타에 등록된 단체 중 최대 규모와 최고로 가입 경쟁이 치열한 단체로 자리 잡고 있다. 또 내가 어린 시절 못 이룬 야구선수에 대한 꿈을 내 아들 동혁이로부터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어서 어린이 야구단 창단준비원회를 가평국민학교장으로 퇴임한 이종석 교장선생님을 운영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운영했는데, 난 단순히 가평에 없는 것을 만드는 재미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이런 나를 정치적 출세를 목적으로 히는 행동으로 오인하고 날 견제하길 시작했다. 2007년 5월 경에는 가평에만 없어보였던 재가불자회 가평군지회를 만들어서, 사암연함회 가평군지회의 발족을 유도했고, 가평군 최초로 가평군 문화관광과 종교예산을 확보해서 가평군청 앞에 봉축탑을 만들게 했고, 사암연합회 스님들을 움직여서 가평군 예술회관에서 봉축법회와 연등행렬을 이끌었다. 해병대 전우회에서는 젊은 대원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젊은 해병대원들한테 막말하는 대 선배님들을 질책하는데 해병대의 권조를 아끼지 않고 젊은 해병대를 위한 해병전우회 내 잠수부를 양성해서 북한강 수중 정화활동 사업을 가평군 농업정책과로부터 얻어내어 젊은 해병들의 활동기반을 만들고, 정부보조사업의 투명한 집행을 위하여 각 사업별로 개별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고, 집행부가 바뀔 때마다 예산과 사업집행에 헤메이는 것을 보고 다음넷에 해병대 전우회 가평군지회 카페를 개설하여 자료를 투명화하고 일괄성을 기하려는 노력은 '전라도 놈은 빨갱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결말을 가져왔다. 그 당시 체크카드 용도를 모르는 해병대 선배님들은 내가 해병대 전우회를 이용해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고 오해를 했고, 그 신용카드를 남발해서 해병대 전우회를 말아먹으려한다고 말도 안돼는 생떼로 나를 몰아갔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사실은 내 이름을 대고 외상으로 일천여만 원의 북한강 수중 정화사업을 최초로 해병대 전우회 가평군전우회가 완수하여, 모든 해병대 전우회의 월 만원씩 내는 회비를 없애서 젊은 해병과 신입해병들의 입회비라는 문턱을 없애기로 했는데, 그 공로는 흔적이 없고 철저하게 왜곡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누구의 작품이였을까? 가평 사회는 날 왜곡하기 시작했다. 난 산천은 좋으나 보는 하늘이 작아서 가슴이 작은 가평 사람들이 싫어졌다. 이것은 어디부터 시작했을까? 그때부터 배점수는 가평사회에서 유자가 아닌 가평탱자가 된 것이다. 나중 이의 근원을 찾아냈었다. 주변에서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해서 응징을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부처님 말씀의 뜻을 담은 보왕삼매론을 되새김하면서 그냥 넘어갔으나 가평 사회에 대한 애정은 사라졌다.
때 마침 7년 전 막내가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나도 마님과 결혼 전 세 번째 조항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어도, 충분조건은 갖추었기에 20년 간 가평의 산골에 좁아진 가슴을 보링하려고 가평을 떠나,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 첫 귀절의 도시인 동해시부터 바다로 바다로 108일 씩 유랑을 시작하여 7년을 싸돌다가 잠시 가평에 한 점을 찍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다. '그래도 한반도의 무게중심인 가평은 내가 본 내륙에서 최고요, 바다로는 동해 바다가 내게 있어서는 최고로다! 그러나 좁은 가평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 남반부에만 머물지 않고, 지구와 우주를 아우르는 가평 탱자가 되자!'라는 의미로 가평 탱자라는 시조를 짓게 된 것이다.
참으로 장황한 시조 부문 당선 소감을 나열했다. 이 소감문을 몇번이나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맨정신에 쓸 수가 없어서 아침부터 두견주도 몇 사발했다. 그러나 다시 깨어 정리해본다. 아무쪼록 이 장으로 이끌어주신 가평의 한량중의 한량 박원동 교수형님과 지도해주신 정지향 교수님! 그리고 이 마당을 만들어 멍석을 깔아주신 글로벌유성문학 황유성 총장님께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이제는 한 보다는 진취적인 시조를 지을 수 있는 가평 탱자가 될 것을 다짐헌다.
연꽃처럼 행복한 걸인 가평탱자 배점수(((!)))
(((!))) 은 활짝 핀 연꽃을 기호로 그려봤습니다 (((!)))
🥇(사)종합문예유성 신인문학상 원고 응모 안내🥇
https://band.us/band/70659938/post/169127
🔰글로벌문예대학교 2024 가을학기 신입생모집🔰
https://band.us/band/70659938/post/165477
🥇제5회 "집현전" "국자감" 문화예술제 공모전🥇
(문학 부문은 디카시 백일장이며, 디카시만 응모 가능)
https://band.us/band/70659938/post/170032
첫댓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덕분에 다음넷에 있는,
먼지 덮인 다음카페를
열어보았습니다(((!)))
제가 가평에 애착을 갖고 활발허게 활동을 할 적에는 이 다음 카페가 가장 중요한 소통 수단이였는디!
카페는
등급관리와 게시글 방 관리가 있어서 참 좋았는디!
등급별
이사회
대의원회
총회를 운영할 수도 있었고!
회계관리도 헐 수 있었고,
사업별 자료와 회계관리도 헐 수 있는 밴드에는 없는 홈페이지와 같은 기능이 있었는디!
많은 단체를 맹글 때마다
다음 카페를 맹글어서 운영법을 알려주고 카페지기를 양도해주었는데 시방은 다들 먼지에 덥혀 있지 않을까?
총장님 덕에 다음카페에 대한 추억을 돌아봅니다(((!))))
총장님의 열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
편한 밤 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