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6c8pwIMu2Tc
(270회:서오릉)
1.일시:2023.3.18.토.
2.참석자(11):고경수와어부인.김승호.김창덕.류영철.박호봉.엄영섭.이규대.이청수.임용묵.황양연
3.코스:서오릉-주막보리밥집-귀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민족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로 알려져 있다.
왕이 비를 맞고 한 시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일은 나라의 큰일이다.
어떻게 살다가 이곳에 묻혔을까.
서오릉 숲속 잔디 위 능침의 공간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한 가치로 ‘신의 정원’으로 부르고 있다.
왕릉을 돌아보니 조선역사가 풍부해지는 것 같으니 그게 유식함이 아닐까.
책상머리에 앉아 업적이며 연표로 기억되었던 인물이 눈앞에 등장하는 특별한 역사 경험이다.
관광해설사는 명릉 앞에서 끝나고 능을 향해 걸으며 우리끼리 나름의 지식을 나누는 뜻 깊은 시간을 갖는다.
벤취에 앉아서 영철이가 들려준 야사는 야사이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본인이 손수 정리해서 보내준 글을 첨부한다.
다음 문화 유적지를 답사할 때 오늘 참가한 친구들 함께 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나름 이야기꾼들이 모였다.
1학년 때 빨간 교복과 베레모가 예쁜 창덕여고생들과 함께 왔던 서오릉을 다시 추억하고 싶다는 친구도 있고 아름다운 희빈의 미모가 그리워서(^^) 온 친구도 둘이나 있다.
황양×과 김승× 로 기억하자 …ㅋㅋ^^.
무덤의 주인공 다섯 왕릉의 왕과 왕비는 누구인가.
창릉(예종과 안순왕후), 경릉(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홍릉(영조비 정성왕후), 익릉(숙종비 인경왕후), 명릉(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이다.
여기에 왕릉은 아니지만 순창원(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 수경원(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 그리고 대빈묘(희빈장씨)가 있다.
이런 서오릉에 명릉과 익릉과 대빈묘는 숙종과 그의 왕비들이 있다.
14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46년간 숙종은 조선 후기에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임금으로 꼽힌다.
집권 붕당을 일시적으로 갈아치우는 것을 ‘환국’이라 한다.
경신년, 기사년, 갑술년에 펼쳐진 환국의 국면에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는데 여기에는 왕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환국 과정에서 왕비가 바뀌는데 희빈장씨가 왕비에 오르면 인현왕후가 쫓겨났다가 다시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며 희빈장씨가 쫓겨나는 일이 반복된다.
조선 역사에서 이 현상을 붕당정치라고 한다.
서오릉 뒤 둘레길 서어나무길 40분 정도 걷을 수 있는 1.92km의 거리가 있다.
서오릉을 감싸고 있는 봉산 숲에 서어나무가 많다.
단아하여 매력적인 나무,마음의 휴식을 주는 나무, 속삭이는 서어나무 아래에서 우리도 위로자가 되어주고 상처를 보듬어 주며 희망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자 한다.
능의 구성과 역사를 간략히 기술한다.
▲명릉(明陵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이야기
서오릉 입구 첫 왕릉이 명릉이다.
능침공간의 무덤 배치는 정면에서 왼쪽 릉이 숙종이며 왼쪽은 인현왕후릉이다.
인원왕후는 왼쪽 구릉진 언덕에 있다.
인현왕후는 35살에 다리에 염증이 생긴 면역질환으로 죽는다.
왕자를 낳지 못했으며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으로 쫓겨나고 복위되는 과정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숙종은 네 명의 왕비(희빈장씨를 포함할 경우) 가운데 왜 인현왕후를 제일 마음에 두었을까. 인원왕후의 상이 나면 묻힐 공간으로 익릉과 명릉 사이 언덕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1757년 2월 영조의 비였던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숙종의 사례를 따라 정성왕후의 무덤을 만들며 자신이 묻힐 공간을 마련했다.
그런데 다음 달 인원왕후의 상이 나게 되었는데 동시에 두 개의 왕릉을 조영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영조는 인원왕후의 무덤을 기존 명릉 옆에 만들었다.
인원왕후는 무수리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적극 옹호하여 영조로 등극시킨 켰음을 덧붙인다.
▲익릉(翼陵숙종비 인경왕후)이야기
익릉의 주인공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다.
10살에 입궁해 두 아이(공주)를 낳았지만 금방 여의고 자신은 천연두에 걸려 19살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인경왕후가 걸렸던 병이 천연두였으니 왕은 문병조차 올 수 없었다. 창덕궁에 머문 왕을 걱정하며 경희궁에서 혼자 병마와 사투를 벌이다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인경왕후의 아버지는 김만기, 작은 아버지는 구운몽,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이다.
▲창릉(昌陵예종과 안순왕후)이야기
예종은 즉위 2년인 1469년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의 어린 나이에 승하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을 통해 조카인 단종을 숙청하고 집권한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여 형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11년 후 세조가 승하하여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제위 14개월 만에 그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연산군 4년째인 1498년 안순왕후가 승하하여 이듬해 음력 2월 14일 창릉에 안장되었다.
▲ 경릉(敬陵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이야기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무덤이다.
조선 세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로 세조 1년 세자(의경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1471년(성종2)왕으로 추존된 덕종(德宗 1438~1457)과 덕종의 부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의 무덤이다.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였다. 일반적으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지만 경릉에서는 왼쪽에 왕릉, 오른쪽에 왕비릉이 있다. 왕릉에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렇게 석물들이 단출한 것은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죽어 왕릉으로 조성되지 못했고, 또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이 추존되면서 왕비로 책봉됨에 따라 능도 왕비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현재 마모가 심해 윤곽만 알아볼 수 있다.
▲홍릉(弘陵영조비 정성왕후)이야기
홍릉(弘陵)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달성서씨의 능이다.
홍릉 조성 시 영조는 자신의 수릉으로 오른쪽을 비워 두었으나 이곳에 합장되지 못해 현재도 왕후릉 오른쪽은 빈터로 남아 있다. 홍릉은 18세기 조선왕릉 석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원비 정성왕후 사후 계비 정순왕후가 영조와 함께 동구릉의 원릉에 있다.
정성왕후는 가장 오랜 기간 왕비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며 빈터로 된 이유는 계비 정순왕후의 질투 설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를 미워하여 일부러 동구릉에 조성하였 설이 있다.
▲대빈묘(大嬪墓)이야기
희빈장씨의 무덤 대빈묘는 1970년대 광주에서 이장해 왔다.
대빈묘는 왕릉의 격과 다른 일반 사대부의 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희빈장씨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희빈 장씨는 왕비에 올랐고 아들이 왕이 됐지만 광산김씨의 인경왕후, 여흥민씨의 인현왕후, 경주김씨의 인경왕후처럼 명문가의 사람이 아니다. 숙부인 장현이 역관이었다고 하니 중인 집안이었을 것이다. 경종의 생모다.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 곧 죽기 전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이나, 세자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희빈장씨의 장례를 치를 때 세자가 참여토록 했으며 그래서 대빈묘 앞에 서서 무덤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하지 않다.
장희빈 묘 앞에서 춤추면 남친 생긴다?
남친 없는 여성이 장희빈 묘 앞에서 절을 하고 학춤을 춘다.
이렇게 하면 남친이 생긴다는 말이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다.
▲순창원((順昌園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이야기
경릉(景陵) 왼쪽 언덕 위에 있는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조선 최초의 '원(園)'이다. 난간석과 병풍석은 생략하고 문인석,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순회세자는 1557년 왕세자로 책봉된후 1563년 13세의 어린나이에 죽었고 공회빈은 1592년 41세까지 살았다.
공회빈은 상중에 왜군의 침략으로 화재발생하여 시신 없이 장례치른 아픈 사연이 있다. 비슷한 사례로 선릉의 성종, 정릉의 중종의 릉도 왜놈들이 도굴 후 시신을 유실시켰는데 왜놈 2명 소환하는 과정에서 진범이 아닌 자들을 보냈으나 이 사실을 알게된 선조는 이를 묵인하고 얼버무려 처형하였다고 한다.
▲수경원(綏慶園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
명릉(明陵)과 익릉(翼陵)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내에 있었으나 1970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899년(고종 36)에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신축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어 비각과 비석이 서로 떨어져 있다. 영빈 이씨(1696~1764)는 영조의 후궁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후궁 가운데 으뜸의 격식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사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사랑이나 그리움으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인생일 거라는 생각의 시다.
사약을 들고 영월 청령포를 마주 보는 강 언덕에서 금부도사 왕방연이 비통한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
영철이가 보내준 야사에서 지혜로운 조선 왕후의 모습을 본다.
〔정순왕후이야기〕
영조는 첫째왕비 정성왕후가 죽자, 재혼할 계획으르 친히 간택에 임했다.
그의 나이 66세에 15,6세 아가씨를 맞이하려 한 것이다.
*여러 사대부 처녀들이 방석위에 앉았는데, 한 명이 자리를 피해 연유를 물어 보니, 방석 끝에 구분하기 위해 부친의 이름을 써 놓은 것을 보고 함부로 앉을 수 없다고 하였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무엇이 가장 깊은 가? 왕이 묻자 물이 깊다, 산이 깊다등의 대답들을 하였으나 사람의 마음이 깊다라고 하며 다른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 깊이를 예측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가장 예쁜 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화, 모란등의 답들을 하였으나 목화라고 대답해 연유를 들어본즉 일시적인 예쁨보다 목화 꽃은 솜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기 때문이라 하였다.
*때마침 비가와 앞의 월랑의 기와 수를 물어보니, 모두 손가락으로 세고 있는데 오직 그 처녀만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답을 맞추었는데 방법을 물어 보니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알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지혜가 돋보임으로 15세의 처녀가 왕비로 간택되었으니 정순왕후이다.
그녀는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로 지혜로왔으나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으로 신유박해, 규장각을 축소시키는 등 정조의 정책을 되돌리는 세도정치를 하였으나 물러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계비인데도 원비인 정성왕후 대신 동구릉원릉 영조의 곁에 안장된다.
2023.3.1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