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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Andy Warhol)의 그림을 떠올려보자. 그저 당신 생각나는 대로 한 장 고르면 된다. 마를린 먼로(Marilyn Monroe)의 얼굴들이 색조의 변주 속에서 나열되고 있다. 다른 그림에선 코카콜라 병들이 기나긴 행진을 하고 있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 앞에서 우리는 후, 입김으로 불어 날린 손오공의 머리카락처럼 많은 분신(分身)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 많은 여배우 가운데 누가 진짜인가? 저 많은 콜라 병들 가운데 어느 것이 원본인가? 원본이 있다기 보다는 오직 모사품들의 행렬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원본과 모사물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식의 가짜, 원본과 복제가 구별되지 않는 영역 속에서 바로 시뮬라크르가 서식한다.
시뮬라크르라는 말의 뜻 기원이 부재하는 복제물
프랑스어로 시늉, 흉내, 모의(模擬) 등의 뜻을 지니는 시뮬라크르1)(simulacre)는,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라틴어 단어는 영어 안에도 그대로 흡수되어서 모조품, 가짜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요컨대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이다.
‘기원 없는’ 복제로 존립하는 쌍둥이 타워처럼 어느 것이 원본이고 복제물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시뮬라크르의 세계이다. <출처 : NGD>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복제물이 복제물일 수 있는 것은 원본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원본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만 복제라는 말은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현대 철학에서 시뮬라크르 개념이 가지는 독특성이 있다. 그것은 기원이 부재하는 복제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사라진 뉴욕의 쌍둥이 타워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의 특성으로 시뮬라크르 개념을 제시했던 프랑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 d)는 이 건축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쌍둥이 타워는 두 개의 펀치 테이프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그것들은 서로 복제되고, 이미 복제 상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쌍둥이 타워가 ‘이미’ 복제된 상태 속에 있다고 했을 때, ‘이미’라는 말이 강조하는 바는 복제는 원본 뒤에 이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앞서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 까닭은 쌍둥이 탑의 복제는 원본 없는 복제, ‘상호 복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기원 없는’ 복제가 쌍둥이 타워가 존립하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원본이고 복제물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날마다 이런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기원도 원본도 없이 정보의 무한 복제의 연쇄가 빠른 조류처럼 흘러가고 아바타가 우리의 삶을 싣고 가는 인터넷 속에서 말이다.
플라톤주의에 반대하는 철학 기원·역사·합목적성에 대한 부정
현대 사회나 팝아트 같은 예술 장르 분석에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시뮬라크르 개념은 사실 반(反)플라톤주의적인 현대 철학 일반의 근본 성격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바탕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현대 철학의 세 가지 주제가 기원의 부재, 역사의 부재, 합목적성의 부재이다.
기원과 역사와 합목적성은 아마도 플라톤의 신화를 통해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원본적인 모범적 진리인 이데아와 더불어 있었다. 그런데 이 세상으로 오는 동안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면서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
그래서 이승에 있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자들의 목적은 다시 저 모범적인 고향, 이데아계를 어떤 식으로든 되찾는 것이다. 모범적 기원의 상실은 역사라는 과정을 만들어내며, 역사라는 과정은 궁극 목적으로서 저 잃어버린 기원을 되찾을 때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적 모델은 이후 그대로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플라톤적인 잃어버린 기원이 잃어버린 낙원의 신화로 바뀌면서 말이다. 시뮬라크르를 사유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들뢰즈(Gilles Deleuze)는 [플라톤과 시뮬라크르]라는 글에서 이 점을 설명하면서, 왜 시뮬라크르가 위험스러운 것으로 경시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으나, 인간은 죄 때문에 신과의 그 유사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으며,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되었고 감성적 실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덕적 실존을 상실했다……. 이러한 설교는 시뮬라크르의 악마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원과 역사와 합목적성이라는 세 악기가 연주하는 철학에서 모범적 기원으로의 회귀를 부정하는 시뮬라크르는 이렇게 악마적인 것으로 위험시되었다. 그렇다면 현대 철학은 왜 이토록 위험스러워 보이는 시뮬라크르를 높이 떠받드는 것일까? 가령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시뮬라크르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들뢰즈).
시뮬라크르에 대한 몰두의 이면에는 아마도 기원적인 것, 원본적인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경계가 담겨있을 것이다. 원형적인 것, 본질적인 것, 순수한 것을 탐구하는 구도자적인 제스처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삶과 멀리 떨어진 형이상학적 주제로만 보이는 기원의 신화는 실은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으며 우리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원형적인 순수한 인종은 누구인가? 그것은 백인이다. 원형적인 성, 보다 우월한 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다 등등……. 그리고 이러한 기원이 누리는 영광의 배후엔 늘 기원보다 열등한 주변부가 영광의 그늘로 자리 잡는다. 순수한 원천에 대한 향수와 자만심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거기엔, 순수하지 못한 것이 섞여든 유색인종들, 혼혈아들, 불법이민자들이 있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긍정은 바로 순수한 원형적 모범의 기준을 벗어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환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죽음, 저자의 죽음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고 심지어 영토를 만들어 낸다”
텍스트를 모방해서 이차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주체라고 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보드리야르. <출처: Pablosecca at en.wikipedia.org>
시뮬라크르 개념이 담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근대적 주체의 부정이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이래로 철학은 인간 의식을 존재자들의 존재함과 의미의 근거로서 확립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원본 없는 복제물로서의 시뮬라크르는 바로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이 주체의 지위를 부정하는데, 이 점은 텍스트 이론에서 ‘저자의 죽음’이란 주제로 변주되면서 매우 재미있는 성찰들을 낳기도 했다.
가령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직접적인’ 존재들의 현실적 삶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는, 글밖에는 없다.” 우리는 현실적 삶과 그것을 영위하는 인격적 주체가 있고, 이 주체를 원천삼아 글이, 텍스트가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현실적 삶이 따로 있고, 이 삶을 원천으로 글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쓰인 글과 우리의 삶은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사본인지 모른 채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가령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자신의 말과 글과 행위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지식은 또 다른 지식의 복제이며, 우리의 삶은 또 다른 삶의 모방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주체라는 원천이 있고, 이로부터 텍스트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모방해서 이차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주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 점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토는 더 이상 지도에 선행하거나, 지도가 소멸된 이후까지 존속하지 않는다. 이제는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고 심지어 영토를 만들어 낸다.”
텍스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지도가 이른바 기원에 해당하는 영토에 앞서며, 심지어 그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주체가 텍스트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모방해서 주체의 삶이 생겨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원도 목적지도 없는, 시뮬라크르들의 무한한 연쇄 속에 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 모범도 원본도 없는 복제물들의 파편을 가지고서 어떤 삶을 꾸며나갈 수 있을까?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아바타와 RPG 게임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놀라운 생산자들 속에서 표류하는 우리가 오늘 날 던져야 하는 윤리적․ 정치적 물음이란 이런 것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참고자료
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116?svc=cafeapp
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18?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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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당신/문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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