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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 질문이 아니라 간청해야 (막9:21-29)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중풍병 걸린 하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백부장이 하는 말이 “주여,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예수님은 그 백부장을 향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보면 비슷한 내용입니다. 병 걸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아이 아버지와 그를 상대하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앞서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백부장과는 달리 이번엔 믿음 때문에 책망받는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셨고, 아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본문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책망받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먼저 24절에 기록된 아이 아버지를 보게 되면 책망을 받자마자 “곧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인즉 예수님께로부터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책망을 받는 순간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께 응답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할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구나.’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간청했던 겁니다.
그 결과, 그렇게 믿음이 있기를 간구한 아이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그의 아들이 고침 받는 응답이 있게 하셨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28절을 보면 예수님을 향해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 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질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말인즉 제자들은 병든 아이가 왔고, 그 아이가 예수님께 고침 받고 돌아간 순간까지도 응답받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병든 아이가 왔다가 예수님께 고침 받고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는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책망받았으나 끝내 응답을 받은 아이 아버지와 모든 일이 끝난 후까지도 도무지 영문을 몰라 했던 제자들 사이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간청했느냐?’와 ‘질문했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보면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을 향해 초지일관 간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고, 24절에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향한 간청은 그게 곧 기도입니다. 따라서 아이 아버지의 간청은 예수님께서 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부합되는 행동이었던 겁니다.
이에 반해 28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묻자 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는 질문만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에겐 안 된 것에 대한 질문은 있었을지라도 되기를 원하는 간청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대답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물론, 본문에서만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제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책망과 가르침을 놓고 보면 제자들의 실패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째서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이 마태복음에는 1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전에 마태복음 10:1절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하신 말씀과 함께 그들을 각 동리로 전도하러 가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각 동리로 전도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해당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심과 동시에 당부하신 말씀도 있었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잠깐의 여행을 떠날 때라도 여비라든가 비상금, 기타 필요한 물품 등을 꼼꼼히 챙기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사람이 세상에서 의지할 게 없어야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린 거고, 믿음적으로 보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금품이나 소지품을 금지시키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던져져서 생존하고,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선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하나님이 같이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던 겁니다.
‘믿을 건 하나님뿐이다!’
이런 생각이 믿음인 거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구, 그게 곧 기도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볼 때 앞서 귀신을 쫓아내 본 경험이 있던 제자들이기에 본문의 상황에서도 당연히 같은 방법을 시도했으리란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안되는 겁니다. 순간 제자들에겐 요즘 말로 ‘어? 왜 안 되지?’ 하는 멘붕이 왔을 겁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이번엔 왜 안됐는지를 질문했던 겁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린 이미 29절에서 ‘기도해야만 응답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습니다. ‘기도만 하면 돼!’
그런데 이 말이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론 이 말처럼 무책임한 말도 없습니다. 왜냐?
솔직히 저나 우리 각자가 이제까지 기도했음에도 응답되지 않은 일들이 한, 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응답받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해답은 ‘기도하면 돼.’인데 실생활에서 우린 왜 기도하는데도 안 되고, 못 하는 일들이 있는 걸까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9절 한 절 말씀만 봐선 안 됩니다. 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향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고 책망하시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이 아버지는 황급하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아이 아버지가 급히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을 믿는다는 걸까요?
처음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인들 할 수 있을까?’를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다가 책망을 듣는 순간 ‘예수님이시라면 할 수 있다.’를 전적으로 믿어야 함을 알게 됐다는 겁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응답이 있기 위해선 기도하는 게 방법이지만, 내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가 되게 하기 위해선 우리에게도 ‘누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당시 제자들도 문제 해결을 위해 이전에 했듯이 이번에도 기도했을 겁니다. 앞서 각 동리에서 자기들이 기도했더니 귀신들이 항복했던 걸 떠올리며 이번에도 자기들이 기도만 하면 될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선 제자들이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누가 할 수 있나?’에 대한 믿음입니다.
앞서 누가복음 10:17절에서 제자들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고백했는데, 이 고백만 놓고 보면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항복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이면!’이란 말에 답이 있습니다. 귀신들은 제자들이 기도했기에 항복한 게 아닌 겁니다.
당시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도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턴가 그 능력들을 당연시 여기고 또한 그런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겁니다.
처음 귀신과 맞닥뜨려야 했을 때만 해도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이 주신 권능에만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던 절박함이 사역이 반복되면서 점차 무감각해진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향한 기도’가 ‘세상을 향한 주문’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번에도 기도하면 되겠지.’
그러나 이번엔 안되었습니다. 이유는 ‘누가 할 수 있나?’에 대한 믿음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할 수 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믿음의 고백 같지만, 사실은 교만한 말입니다. 내가 기도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기도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기는 믿음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이시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간청하면 나도 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응답받는 기도의 올바른 순서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본문 2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 외에는’이라고 하셨을 때의 기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21: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으며, 마가복음 11:24절에서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에서 언급된 ‘믿고’와 ‘믿으라’가 의미하는 게 뭘까요?
결과적으로는 ‘소원했던 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결과 이전에 원인부터 살펴보자면, 소원했던 대로 되는 원인이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예수님인들 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던 아이 아버지가 즉시로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을 때 아이 아버지의 믿음은 ‘나는 할 수 없다. 제자들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고백인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을 향한 아이 아버지의 간청이 처음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던 것이 끝에 가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로 바뀌게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믿음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단지 ‘해결해 주소서.’ ‘응답해 주소서.’라고 요청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앞세워 예수님이 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게 되어야 이게 응답받는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자 순서인 겁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세요. 축복의 시작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못 했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불안해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적으로 응답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누구에게요?
주문처럼 기도했던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믿고 간청했던 아이 아버지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본문을 통해 우리도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당연시 여기는 겁니다.
당연시할 것 하나, ‘예수님이 이 정도는 해결하신다.’입니다.
당연시할 것 둘,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도 역사하신다.’입니다.
다시 말해 응답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고 믿기에 그 결과를 당연시 여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이 당연시 할 것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믿으세요. 그리고 그렇게 믿으신다면 이제부턴 매사에 응답을 못 받을 줄로 믿지 말고, 응답을 받을 줄로만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믿었으면 일단은 기도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듯이 기도가 그렇습니다. 기도 제목이 수백 개라도 어느 하나든 기도해야만 응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슬을 실에 꿰는 게 내 일이듯이 기도 제목을 믿음으로 기도하는 건 내 몫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고, 처음부터 믿음대로 되며, 기도한 대로 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믿음이든 기도든 자꾸 연습하면 잘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피아니스트가 독주회를 계획하고부턴 하루 최소 16시간 이상씩 연습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참에 한 번쯤 점검해 보세요. 내가 기도하는 시간은 하루에 얼마쯤 되나?
하루 중 내가 믿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
이제부턴 세상 것을 위해서만 연습하고 노력하지 말고 믿음과 기도를 위해서도 연습하고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자꾸 연습하다 보면 어느 한순간의 기도가 응답과 연결이 됩니다.
믿음을 자꾸 연습하다 보면 어느 한순간의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된 겁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할 수 있을까’를 염려했던 아이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할 수 있다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왜 안 되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응답이 있으려면 ‘누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다는 확신하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리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할 수 있다.’를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할 수 있으신 예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믿고 원하는 게 무엇이든, 무엇을 바라고 소망하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되냐, 안되냐를 질문했던 제자들은 빈손으로 돌아섰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예수님께 매달려 해달라고 간청했던 아이 아버지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턴 예수님을 향해 이제까지 안 되었던 것들에 대해 왜 안됐느냐고 질문하는 대신 도와주시기를 거듭 믿음으로 간청해서 할 수 있으신 예수님이 해 주시는 은혜와 응답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