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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들은 주로
고려사람 사이트에 있는 여러 작가들의 글을 한국어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오탈자 등 많습니다.
서구문명과 중국의 충돌
1839년 아편전쟁 등은 중국에 섬기던 조선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각종 호란을 일으킨 만주족을 멸하자는 생각은 사라지고, 청나라를 배우자는 실학운동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러시아 등의 중국 국경 침입으로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홍콩섬 등이 영국에 넘어가고, 연해주 지방이 러시아로 할양되었다.
조선은 제정 러시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동학란과 민란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세도정치의 폐단과 생활의 궁핍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경주의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이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그 세를 떨치게 되었다.
1864년 혹세무민 등의 이유로 창도자 수운 최제우 처형후에도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과 1919년 동학교도의 3•1운동 주도 등은 과거의 악습을 폐지하고 새로운 시대로 가려는 의지의 결과물이었다.
만주에서 발흥한 청나라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나라는 만주에서 발흥한 왕조다.
조선중기 이후에 명나라 대신 만주족∙몽고족의 청나라에 사대를 하게 된 조선왕조는, 사신을 보낼 때 몽고족의 원나라 시대부터 요동지방의 대도회였던 봉천(오늘날의 심양)을 거쳐 연경(북경)으로 이동하였고, 조선 사신들은 연행기라는 기록들을 작성하여 놓았다.
그리고 만주족이 중국까지 장악하고 중국 본토로 이주하게 되자, 간도지방과 오늘날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인구는 매우 적었다.
1658년경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등에 대한 봉금령을 내려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러시아가 동시베리아로 진출할 무렵부터 순차적으로 해제하였다.
간도∙만주∙러시아로의 이주 시작
한국인의 국외 이주가 활발히 시작되던 시기는 세도 정치(勢道政治) 아래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전국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리하여 고종(高宗) 4년(1867)경에는 간도 지방에서는 이미 한국인에 의한 토지 개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870년경부터 1910년경 동안 만주의 여러 지역에서 황무지 개간과 벼농사를 위하여 조선인의 이주를 환영했다.
1895년 청일전쟁 무렵의 만주
1895년경 만주 인구 대략 500만여명중 한족(漢族)은 이미 200만여명에 달했다.
청나라의 1895년경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협의에 따라 1897년 만주를 횡단하는 중동철도(동청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가 러•일전쟁 패배후 1908년경부터 60만명 극동이주 계획 등을 추진하자, 청나라는 이에 대응해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의 만주 이주 초기에는 산동, 하북, 하남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만주족의 만주 이민 정책
청나라 초기 만주지역에는 중국 내부와 같이 수십에서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 위에 성 등의 행정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천부라는 관청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 후반부터는 길림성, 봉천성(오늘날의 요령성), 흑룡강성 등이 생겨나고 그 아래에 수십에서 ~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이 생겼다.
이성량(李成梁. 1526년경 출생 ~ 1615년경 사망) 등은 명나라 시기 조선을 깔보던 자라고 예전 자료에 가끔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공부상서 김간(金簡. ?~1794년경 사망) 등과 같이 조선과 관련된 인물은 조선이 중국을 섬기던 시기에는 매우 드물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도 1912년 청왕조 멸망할 때까지 만주족의 청왕조는 일제에 적극 협조하거나, 고려인의 만주∙간도 이주를 강하게 저지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로의 이주 시작
1860년 북경조약과 연해주의 할양
1858년 애혼조약(愛琿條約, 아이훈조약)으로 아무르강(흑룡강, 흑수강) 이북지역을 중국(청나라)이 러시아에 넘겨준 데 이어, 1860년 러시아 외교관들은 중국 정부가 북경조약(露淸北京條約)에 서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군이 중국에 가한 패배를 이용하였다.
북경조약으로 중국은 우수리강 일대의 연해주지방과 남부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광대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그 결과 러시아가 한국과 약 14km의 짧은 국경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1861년경부터 연해주 개발을 위해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이주를 장려하였다.
한국인의 러시아 영토로의 이주는 1863년 9월 21일자 러시아 국경감시소에서 작성한 문서에 한국인 13가구가 연해주에 있다는 기록 등에서부터 나타난다.
1884년 조선•로시아(아라사) 의 조약체결
1884년에는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어 조선과 러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연해주 첫 이민자의 대부분은 한국 북부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의 고향 생활은 먹고살기 힘들었다.
땅이 충분하지 않았고, 비료가 필요 없는 비옥한 토지는 더 적었다.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양반•지주들은 피지배계층인 농민들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고 때로는 수확량의 50%에 달했다.
공식적인 세율은 훨씬 낮았지만 징수된 것의 상당 부분이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들어갔고 농민들은 각종 민란 등에 가담하면서 잘못된 지배체제에 저항을 강화하였다.
한국 북부지방 농민 가족은 강과 산으로 이루어진 국경을 넘어 거의 자유롭게 만주, 간도나 러시아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고, 만주, 간도,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국 마을 수가 증가했다.
한국인 이민자 수
1880년까지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에는 21개의 한인 마을이 있었고, 이 지역의 한인 인구는 6,700여명에 이르렀다.
(※ 이 무렵 연해주의 러시아 농민은 8,3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01년까지 약 3만명의 한국인이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살게 되었다.
(※인구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10년경 만주 거주 한국인은 대략 10만 9천여명이었다.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는 1910년 러시아인 17,000여명일 때, 한국인이 52,000여명 이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1917년경 러시아 영토에는 10만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농민이었다고 한다.
1921년경 간도에는 30만 7천명 이상이 거주중이었다.
(※인구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그들중 대다수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침략정책으로 말미암아 보다 나은 삶을 찾아왔거나 아니면 살해와 투옥을 피해 탈출해온 사람들이었다.
(※1945년 해방 전까지 일본인의 한국 내로의 이주가 증가하자 한국인의 간도∙만주∙러시아∙일본∙아메리카 등지로의 반강제적 이주는 더욱 증가하였다.)
※대략적인 수치이며, 일제의 기록을 주로 참고하여 사실과 다를 수 있음 | 연해주•러시아령 | 만주•간도 |
1880년 | 6,700여명 | |
1894년 | 만주 65,000여명 | |
1898년 | 23,000여명 | |
1901년 | 30,000여명 | |
1907년 | 46,000여명 | 71,000여명 |
1910년 | 52,000여명 | 만주 109,000여명 |
1917년 | 8만~10만여명 | 220,000여명 |
1921년 | 간도 307,000여명 | |
1924년 | 15만여명 | 330,000여명 |
1937년 | 17만~23만여명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
러시아의 한국인 이민 환영
처음 러시아 관리들은 한국인 이민을 환영했다.
한국인 정착민들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광막한 땅을 개간하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시베리아와 만주라는 거대한 무인지경의 원시림 지역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의 이주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직 건설되지 않은 1900년까지 특히 중요했으며 극동 지역에는 러시아 서부지역이나 유럽지역에서 온 농민이 거의 없었다.
제정 러시아 관리들은 한국 농민들의 노고와 그들이 개간한 땅의 엄청난 수확량, 새로운 한국 정착민들의 정직성과 준법성을 보고서에 열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한국인’의 영토내 정착이 결국 한국인으로부터 러시아 영토에 대한 한국 고대시대 영토 회복의 기초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국 이민자들은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대우 받았다.
그 결과 중국계 혹은 한국계 이민자에 대한 정책은 매우 일관성이 없었다.
시베리아 지역의 최고 군사⦁행정 책임자인 총독의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풍부한 토지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정직한 행정으로 간도∙만주∙연해주의 매력이 너무 강했고 당시의 기술로 국경을 봉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별다른 국경봉쇄를 시도하지 않았다.)
연해주 지방의 한인사회
한국 이민자 정착의 주요 중심지는 한국과 경계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해삼) 지역과 연해주, 아무르주 지역이었다.
연해주 지방의 도시중에는 한국 정착민은 전체 인구의 90%를 가까이 차지하는 곳도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극동 지역에서 많은 한국 학교가 운영되고 한국인 신문이 출판되고 출판사가 운영되었다.
또한 독립군들에게 러시아는 간도∙만주와 더불어 정치적 이민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사실상 한국을 장악했을 때에는, 러시아령내의 홍범도 등 독립군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러시아 영토를 떠나, 간도⦁만주⦁한국 땅으로 이동했다.
그후 일본군에 의해 패배한 독립군의 일부가 러시아 영토로 피신했다.
대한제국의 정규군 일부도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반대하고 러시아 영내로 왔다.
러시아는 간도•만주처럼 독립운동과 반일운동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문화의 중요한 중심이 되었다.
1910년 이후 한국에서 일제에 의한 토지약탈과 한국인의 해외 추방, 일본어와 일본인을 우선시하는 교육 등을 실시되었고, 다수 일본인들이 한국내 쓸만한 땅을 약탈하고 한국내로 이주하자 한국인 소작농들의 간도∙만주∙연해주 이주는 더욱 심화되었다.
만주의 혼란상과 친일파의 등장
그러나 간도∙만주 일대에는 청나라(1636년경부터 1912년까지 존속) 말기부터 한족(漢族)이 쇄도하였고, 만주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후 일본군(관동군)이 일부 주둔하고, 중국계 친일파(장작림, 장종창 등)와 마적단이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만주의 혼란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폭력이 우선이고, 주먹 센 놈이 법이고 진리다” 였으며
한국인 사회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한국어로 문학을 출판하고 교육 활동을 수행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였다.
제정 러시아의 한인 정책 변화
그러나 1907년 이후 차르 러시아 당국은 일본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밟았고 러시아 영토에서 너무 격렬한 반일 활동을 억제했기 때문에 대놓고 일제와 무장투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니항, 사할린섬 등지에는 한국인외에도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유럽인, 시베리아 민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1904년에서 ~ 1905년의 러일전쟁의 패전을 잊지 않았고,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러시아편을 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국인들의 반일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1909년 안중근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도움을 받아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였다.
이러한 상대적인 자유는 러시아에 대한 반일 저항의 많은 지도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빈곤과 일제의 억압에 의해 러시아로 쫓겨 난 한국 동북부지방 빈곤한 농민이었다.
정착민들은 주로 북동부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 등을 사용했는데, 이는 서울의 언어와는 달랐다.
그리고 남부 지방에서 동학교도 토벌, 일제의 의병 토벌, 사살령 등을 피해 탈출해 온 사람 등 다양한 한국인들이 연해주에 거주하게 된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한민족의 이주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민족말살 정책을 펼치자 더 많은 한국인들이 간도∙만주∙러시아 지역 등으로 이주하였다.
러시아 시민권 획득 시도
상당수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떠났다.
이민자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얻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러시아 시민권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상당수 한국계 이민자들은 기꺼이 러시아 정교회(로마 카톨릭교와 유사한 종교)를 신앙으로 채택했다.
러시아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은 자녀 교육, 땅을 얻고, 상업 등 사업을 하는 것이 더 쉬웠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의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짓거나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부유한 한국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가능하면 아이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냈다. 1917년까지 러시아 대학 졸업생들은 이미 한국인 정착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한국인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고립된 방식으로 계속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개선
러일전쟁 패전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1907년경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여 제정 러시아와 일본이 같은 연합군이 되자 관계가 급격히 개선되었다.
러시아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섬, 만주 하르빈 등에는 식량과 전쟁물자를 공급하려는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고 영사관 등이 개설되어 러시아내 반일세력인 독립군의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일제의 친일파와 밀정 양성
그리고 일제는 일본영사관 설치지역에 ‘○○조선인회', '조선인 민회’ 등을 조직하여 수천여명 이상의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관계계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도 ‘빵과 우유를 달라’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곡물, 수산물 등의 수입과 전쟁물자 조달이었지,
일본의 만주지역 이권 보장, 어업권 보장, 사할린섬 남부와 쿠릴열도의 영구적 할양 등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여 만주와 러시아령에 친일파를 양성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였고, 일본 상인의 무역활동 등을 빙자하여 이와 함께 대규모 간첩•밀정 파견 등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 영토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동휘, 홍범도, 최재형, 안중근 등에 대한 자료가 일본 기록에 남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의 대략적인 한인 정책
그러나 제정 러시아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붕괴될 때까지 일제 침략자와 같이 한국인들에 대한 말살 정책을 펼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내전에서 러시아령 거주 한국인의 상당수도 러일전쟁 때부터 같은 편이었던 백파(白軍)와 차르정부를 지지하였다.
1921년 6월 28일 벌어진 자유시 사건의 원인 중 한가지도
한인들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볼셰비키(적군, 赤軍)을 지지하였는지 아니면 백파를 한 때 지지하였는지를 놓고도 심각한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한인 사회
1917년까지 한인 사회는 이미 러시아 연해주 전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와 세계뿐만이 아니라 고려인과 연해주, 만주 거주 고려인들에게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군주제가 폐지되는 혁명이 발생한데 이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불려지는 공산혁명이 발생하여 레닌 등 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적군과 백군으로 나뉜 러시아는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유럽, 극동, 몽골 등에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1917년 12월경부터 만주지방의 대도회중 하나인 하르빈에서 중국 정부와 백파 러시아 장군이 볼셰비키 세력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내전기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인은 볼셰비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물론 러시아 정교회를 믿던 한국계나 제정 러시아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 중에는 러시아 백파(白波)를 지지하는 한국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백파가 러시아에 간섭한 외세중 특히 일제와 함께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자 대놓고 백파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러시아 중부와 극동에서 볼셰비키들(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등, 형제애, 자유라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공산주의)으로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즉시 일제와 그들을 피해 만주, 시베리아에 머물던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 잡았고, 이미 1918년경 러시아령 연해주와 아무르주에는 다양한 한국인 무장 조직이 출현하여, 모국 독립, 일제와 친일파 타도를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을 반대하고 약소 민족과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최초의 공산혁명에 동조하지 않고,
한인 사회가 다른 입장을 취하거나 러시아 내전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면 매우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례닌과 볼셰비키의 약속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셰비키는 소수 민족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차별을 종식하겠다고 입으로는 분명 약속했다.
한국인은 러시아 시베리아 접경지역의 민족으로 항상 본심에서는 연해주와 만주•간도는 아주 먼 옛날 자기 조상들의 고향으로, 심지어 강조차도 러시아나 중국의 명칭이 아닌 “까망강, 까만강(黑水)”이라고 부르며 삼국시대에나 쓰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민족의 자세를 이해하는 일제, 중국, 만주 친일파, 러시아 당국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무인지경의 광활한 연해주와 시베리아의 땅을 대지주가 아닌 가난한 한국인 소농(小農)에게도 균등하게 나누기를 원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볼셰비키의 연합 이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토지약탈, 노동력 착취, 강제징용,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등을 통한 민족 말살(몰살) 정책의 희생자였다.
러시아 극동(원동) 지역에서 볼셰비키의 적은 백파와 동맹자인 일본 침략군이었으며, 이는 볼셰비키와 한국인들을 공동의 적을 가진 동지로 만들었다.
특히 북경의 친일파외에도 장작림으로 대표되는 친일파가 서서히 득세를 하고 있던 만주와는 달리, 국적을 따지지 않는 볼셰비키 이념을 한국인들을 큰 열의를 가지고 받아 들였다.
나아가 토지의 균등분배와 생존권 보장은 볼셰비키 세력이 미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의 열망과 일치하였다.
새로운 이념이 등장한 혁명
이것은 한국 역사상 농업의 시작, 청동기의 전래, 새로운 기술의 전래, 다른 민족의 도래, 철기의 전래, 불교의 전래, 유교의 전래, 산업혁명, 각종 법과 제도의 정비를 가져왔던 역사시대에 기록된 것과 같은 새로운 혁명의 시작이었다.
과거 러시아 영토에서 한국인은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정의와 원칙에 따라 토지를 획득하거나 재산를 획득한 적이 없었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국가적 이념 아래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도 없었다.
연해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
볼셰비키에 한국인들은 당연히 협력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경부터 일본과 미국∙영국∙유럽 등 연합국의 간섭이 계속되었고, 내전과 대기근은 러시아 혁명기의 사회혼란을 가중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 일본 제국제주의, 러시아 제정 왕조 등의 이념에 따라 시베리아에서 싸움을 벌였고,
거의 대부분의 한국계는 일제와 협조한 콜차크 등 백파와 대립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연해주에서의 한국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1918년 4월 ~5월경 이동휘, 박진순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시기 연해주의 혼란상
청일전쟁(1894~1895), 의화단 사건(1899~1901) 기간 러시아의 만주 침략, 러일전쟁(1904~1905) 등으로 만주에서는 마적떼가 들끓고 ‘폭력과 주먹 센 놈이 법인 시대’가 전개되자 한국인의 러시아 이주는 가속되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의 레닌 등에 의한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계 친일파, 볼셰비키,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 사회주의혁명당(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고려인은 『에세리당』 이라고 부름), 무정부주의자, 입헌민주당(Конституционн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시베리아 자치파, 적군(볼셰비키와 여러 지지자들로 구성된 군대), 백군》
등의 약육강식의 혼란 시대가 도래하였고, 거기에 체코 군단의 반란과 일본의 시베리아 만주 침략, 14개국 연합군의 시베리아 침략 등의 무력 간섭, 러시아 대기근이라는 식량부족 사태가 겹쳐져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실로 과거에 경험하기 힘든 대흉년의 시기였다.
일제의 친일파 양성 목적
1918년 2월경부터 일제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의 일본 거류민들을 중심으로 의용 자경단을 조직하여 백파(반혁명세력)를 지원하기 시작하자,
한국인들이 누구를 지원해야 하는 지는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백파와 러시아계 친일파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본심은
시베리아•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의 영구 점령이었으며,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하고, 콜차크의 백파가 시베리아 지역을 한 때 장악하자 그들에 협조하는 러시아인과 중국인•조선인 등도 많았다.
러시아령의 한인사회도 백파 지지자들과 볼셰비키 지지자 등으로 분열되었다가, 백파가 일제 침략자와 작당하자, 일제에 대한 적대감이 큰 한인사회는 더 이상 백파를 지원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첫댓글 간도.만주.러시아로의 이주 시기가 상당히 오래됐군요 특히 간도이주는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 민란이 일어나던 때였군요 볼셰비키 혁명 시기의 연해주가 혼란했을 때 백파와 러시아켸 친일파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본심은 시베리아.만주.사할린.쿠릴열도의 영구 점령이었고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하고 콜차크의 백파가 시베리아 지역을 장악하자 그들에게 협조하는 러시아인과 중국인.조선인이 많았군요 백파가 일제와 작당하자 일제에 적대감이 큰 한인사회는 이상 백파를 지원할 수 없었군요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