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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15,5-12.17-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5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을 때나 겟세마니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 때처럼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루카 9,30)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루카 24,4;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날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부활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나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마르 1,12; 마태 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으로, 메시아인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후자는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러니 이는 예수님을 인류 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나는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들은 말씀에 응답하고 있는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으로 변모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십자가의 친구로>
오늘 1독서와 복음은 신비 체험을 한 아브라함과 제자들 얘기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미리 체험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왜 미리 체험하게 하실까요?
죽으면 어련히 보게 될 하늘나라이고 그때 보면 될 것을 왜 미리 보게 하실까요?
오늘 베드로 말처럼 땅에 내려갈 생각은 않고 계속 거기 머물라는 뜻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님은 이 산에서 내려오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신비를 보여주신 뜻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슴에 안고 수난의 현장으로 가라는 뜻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일 겁니다.
신비 체험이 없고 그래서 그 신비를 가슴에 안고 살지 않으면,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갈 것입니다.
신비를 가슴에 안아야 등에 십자가를 질 수 있는데, 신비를 가슴에 안지 않으면 십자기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자기의 배를 하느님으로 여기는 사람인데 여기서 배란 막말로 하면 200주년 성서의 번역처럼 배때기이고, 위를 채우거나 욕심을 채울 때의 그 배입니다.
우리는 위를 가득 채웠을 때 배불리 먹었다고 하고, 욕심을 가득 채웠을 때도 배를 채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식욕을 비롯하여 모든 욕망을 신으로 섬긴다는 뜻이며, 우리가 사순 시기에 하느님을 새로이 모시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과 반대로 포식을 하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을 인생 즐거움으로 삼는 것과 같은 뜻일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라는 시편을 모를 겁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수치'란 '배'처럼 성서학적으로는 다른 뜻 곧 할례를 자랑삼음을 뜻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영성적으로 다르게 이해하면 십자가 지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김으로써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코린토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라고 얘기했지요.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자주 얘기하는 '땅에서 하늘을 사는 것'과 반대입니다.
하늘은 쳐다보지 않고 그저 땅에 돈이 떨어져 있나 보듯 그저 세상만 보고 삽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과 연결시킬 때 십자가의 원수는 정반대의 두 원수입니다.
하나는 땅만 보는 원수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만 보는 원수입니다.
땅만 보는 원수는 오늘 필립비서가 얘기하는 세속적인 사람이고, 하늘만 보는 원수는 오늘 베드로처럼 현실 도피적인 하늘바라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사는 사람은 앞서 얘기했듯이 하늘을 가슴에 안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사는 하늘 시민인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이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 안에 또는 주님 앞에 굳건히 서 있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초막을 지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일에 유혹도 은총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유혹을 많이 받으셨죠?
사순절을 맞아 희생 봉사, 극기 절제의 삶을 살려고 하니까 왜 그렇게 없던 일이 생기는지…
그래도 나름대로 절제된 삶을 통해서 기쁨을 간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 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 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 (루카 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피정을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한마디로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바뀐 것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바뀌었습니다.
나의 얼굴도 기도하는 가운데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흰옷을 입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상징이고 예수님으로 온몸을 무장한다는 의미(로마13,14)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옥좌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 는 질문과 함께 그 대답이 나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묵시 7,13-17)
결국 흰옷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이미 흰옷을 입은 사람이니 만큼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 줌으로써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위로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명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시편에 보면 (“오직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야훼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오니”)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 27,4)하며 자신의 갈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바람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루카 9,35),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손에 펴들고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 삼아 주님의 초막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로 얻는 믿음: “괜찮다, 사랑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올라보면 이 세상이 작아 보이고 별것도 아닌 일에 아웅다웅하며 살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사십니다.
우리가 잠시나마 에덴동산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아의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오르는 방법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율법, 곧 하느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엘리야는 성령, 곧 하느님의 사랑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충분한 사랑을 주면 자녀는 생존 걱정을 내려놓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집착이 작아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께 은총과 진리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괜찮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때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면 주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기도하면 또 엘리야도 보내주십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사랑한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측에 따르면 20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분당보다 넓은 크기의 1조 5천억 원짜리 궁전을 짓고 있고 자동차와 비행기 등은 수천억 원씩 개발비를 투자한 특수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100세까지 대통령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법을 개정하며 계속 대통령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되고 국방력과 경제가 나아졌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제가 좋아진 기업들의 많은 주식을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기와 같이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푸틴이 어렸을 때 ‘생존의 문제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아니면 그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지금 생존의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고 빈민 공용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며 유도와 같은 운동을 하고 소위 불량배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였는지 당시 강한 권력을 지녔던 소련 정보부 KGB에 들어갑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 곁에서 정치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뇌물수수 등 비리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옐친 대통령의 오른팔이 되어 결국엔 대통령에 오릅니다.
그러고 나서 법을 개정하며 20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인지도가 점차 하락하자 아마도 전쟁을 통해 이미지 전환을 꾀한 것 같습니다.
푸틴은 히틀러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아버지의 엄청난 기대와 그에 미치지 못할 때 행한 무자비한 폭력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푸틴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힘과 재산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살아남아야 하는 마음은 대통령을 그리 오래 해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푸틴이나 히틀러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랄 때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가 결합한 것입니다.
양식은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양식을 먹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아버지에게 이 양식을 먹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책임질 테니 죽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야 남을 해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먹고 사는 거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 때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타볼산에 데리고 올라가셔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1달러 프로젝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페이팔을 큰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돈이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양이었습니다.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하루 1달러, 한 달 30달러로 생활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냉동 햄버거를 사서 30일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와 조금 먹을 것만 있으니 행복했습니다.
‘하루 적어도 1달러는 벌겠지!’라는 생각으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푸틴도 최고 부자고 일런 머스크도 최고의 부자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생존이 두려워 모으는 사람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자해서 부자가 된 사람과는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
일런 머스크는 이번 우크라이나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인터넷망 시스템을 공급하였습니다.
신기하게 푸틴과 싸우는 편이 된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누구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나라가 가난해질 것이라 해서 산아제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엄청난 낙태가 이뤄졌습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 생존에 대한 불안함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어머니께 들었던 것 같은 말이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요즘에 하면 무슨 조선 시대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 지금만큼 풍요로울 때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조선 시대가 지금보다 나라의 믿음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 없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니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에는 “괜찮다.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코헬렛의 지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와 재화를 베푸시어 그것으로 먹고 자기 몫을 거두며 제 노고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모든 인간.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정녕 하느님께서 그를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하시니 그는 제 인생의 날수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코헬 5,9.14.16.18-19)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이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도록 일만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몫을 마련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하시며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니, 나는 죽음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제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잡목과 칡넝쿨,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소나무 한 그루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가련한 아이 같았습니다.
잘 드는 톱으로 잡목을 잘라내고, 굵은 칡넝쿨과 가시덤불을 과감히 쳐주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말라 죽어버린 가지들도 깨끗이 잘라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본래 지니고 있었던 어여쁜 자태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그루를 끝내고 다른 나무로 옮겨가려는데, 말끔하게 단장한 그 나무가 제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관심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쁘게 단장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나무가 제게 한 말은 저 역시 날이면 날마다 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말씀 같습니다.
얼마 전 건장하고 기품있는 청년 한 명을 만났습니다.
어떤 부모님이신지 모르지만 교육 참 잘 시키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그 청년은 20년 전 저희가 운영하던 청소년 복지시설에서 동고동락했던 유명한 개구쟁이였습니다.
이제는 멋진 신사가 되어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에피소드들을 끝도 없이 나누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런 청년들을 만난다는 것은 살레시오 회원으로 가장 큰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그 청년을 보는 순간, 지난 세월 별로 한 것도 없이 죄만 산더미처럼 짓고 부끄럽게 살아왔다는 울적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나도 가뭄에 콩 나듯이 좋은 일도 했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 만남, 그 존재는 순식간에 제 삶을 화사한 봄날로 바꾸어주었습니다.
변화되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일이라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 안 바뀐다는 것 또한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고 동료들을 바라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삶을 바꾸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언제나 작심삼일입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렇게 큰 변화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타볼산 위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앞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큰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간 스승님을 탁월한 랍비 정도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영도자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한 인간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신 스승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밝혀주신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도 거룩하게 변모되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인간적, 육체적인 성장과 변화도 추구해야겠지만, 영적인 성장, 거룩함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참사랑은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2베드 1,16-18).
사도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증언’을 직접 들었습니다.
사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통해서 여러 번 예수님의 신성을 이미 체험했는데, 그 체험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관한 체험들이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수난, 죽음,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누리실 영광을 미리 체험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본모습을 목격한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한 일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지를 미리 본 일이기도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영광’을 청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요한 17,1.4-5).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그 영광’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언젠가는 제자들도(신앙인들도)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17,24)
여기서 ‘영광을 보다’는 ‘영광을 누리다’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예수님의 영광만 체험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신들이 누리게 될 영광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루카 9,28-32)
여기서 ‘이 말씀’은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을 가리킵니다(루카 9,22).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고 부활 후에 드러날 당신의 본모습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예언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나타난 일도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일들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그 일들에 관해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과 예수님께서 누리실 영광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도들이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다는 말은 그들이 ‘황홀경’에 빠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황홀경에 빠진 모습과 잠이 덜 깬 모습이 겉으로는 비슷합니다.)
또 이 말은 ‘밤늦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잠에 빠진 것에 대해서 믿음과 간절함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그들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루카 9,33)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말은 “이대로 영원히 살면 좋겠다.”, 또는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도 황홀하고 행복해서 한 말입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라는 말은 그가 한 말은 ‘황홀경’에 사로잡혀서 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루카 9,34-36)
구름이 일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겁이 났다는 말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증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앞의 23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려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부활절을 잘 맞이하려면 사순시기를 잘 지내야 합니다.
사순시기를 생략하고 부활절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지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왜 십자가를 생략하면 안 되는가? 왜 지상의 인생을 건너뛰면 안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하느님께서 정하신 이치가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고, “단련과 정화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1베드 1,5-7).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단련과 정화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배웁시다 - 위로와 격려, 치유의 봄비같은 하느님>
새벽 잠깨어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고 나오니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가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메마른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가 마치 위로와 치유의 봄비같은 하느님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래 전 써놨던 시가 반갑게 떠올랐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참으로 충고와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치유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모두가 고단하고 지쳐있으며 마음이 갈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하느님입니다.
다음 마태복음처럼 어느 한편의 일방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바로 메마른 온누리를 차별없이 적시는 봄비같은 참으로 보고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면모는 오늘 주님의 변모 체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또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봄비같은 하느님 체험입니다.
어제 오늘 복음에 기반한 사순 제1저녁기도 세 후렴들도 봄비처럼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1.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도다.”
2. “주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과 같이 부셨도다.”
3.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도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요 내용에 대한 소개입니다.
흔히 영성생활을 수덕 신비 생활로 정의합니다.
금욕과 절제, 극기의 수덕(修德)생활(ascetic life)의 기반 위에 자리한 신비(神祕)생활(mystic life)이라는 것입니다.
신비생활에 앞선 철저한 수덕생활입니다.
불교의 삼학(三學)인 계정혜(戒定慧) 순서와도 일치합니다.
뿌리없이는 꽃이 없는 이치와 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사순 제1주일 복음이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이겨내시는 예수님의 수덕생활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오늘 사순 제2주일 복음은 수덕생활에 잠시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 변모 신비 체험입니다.
부활의 영광이라는 신비 관상 체험을 앞당겨 체험케 하심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용기백배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체험은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체험과 흡사합니다.
하느님은 이런저런 일로 지쳐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계약을 맺으심으로 아브라함의 영육을 새롭게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일련의 하느님 신비 관상 체험은 광야 여정중의 아브라함에게는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진짜 힘은 이런 하느님 신비 관상 체험입니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위로와 격려, 치유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래서 깨어 있는 절제와 금욕의 수덕생활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주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 평소 얼마나 주님과 깊은 친교 관계의 기도생활에 충실했던 아브라함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변모 체험 역시 기도중에 선물처럼 주어진 신비 관상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인 세 애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의 은총으로 예수님의 변모를,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하면서 내적으로 새로워졌을 것이며, 앞으로의 광야 여정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미사를 통한 이런 주님의 봄비 같은 신비 관상 체험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음 결론 같은 말마디가 우리에게는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다음 하느님 말씀은 산상 신비 변모 체험에 집착하는 베드로에게는 천둥같은 경각심을 주는 가르침이였을 것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평범한 광여 여정의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며 우보천리 한결같은 자세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물론 베네딕도 규칙의 맨 앞에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의 들음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한 경청에 이은 순종입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의 학인답게 말씀을 경청하고 실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제2독서 바오로의 말씀이 현대인의 타락한 실상을 보여주며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어제 읽었던 주님의 충실했던 제자 두 분, 50년 전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의 영적 스승이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에 관한 김경재 목사의 인터뷰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김재준은 북간도에서 은진중학교 교사를 할 때도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이면서 월급 70환중 최소한의 금액인 22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데 썼다고 한다.”
“선생님은 80이 넘은 고령에도 10가지 생활 좌우명을 책상앞에 놓고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로 살았다.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 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느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서 지낸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산(하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함석헌과 김재준은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고, 지성이 맑고, 역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투철했기에, 장준하, 안병무, 문익환이 이들 스승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들은 두 스승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그들이 스승을 모신 것에 비하면 우리는 개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 두 스승뿐 아니라 세 제자들 역시 70년대 시대의 스승이자 사표(師表)였고, 지금은 세상을 다 떠났지만 저 또한 20대 청년시절 이분들로부터 유익한 가르침과 감화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일상의 한결같은 수덕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배웁니다.
이런 수덕생활의 실천에 꽃처럼 피어나는 선물같은 신비 관상 체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신비 관상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다음 주옥같은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필리 3,20-4,1)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창세 15,18)
어제도 보았듯이 계약에는 당사자가 있고 당사자 간의 쌍방의 의무가 조건으로 제시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람에게 큰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럼 아브람의 의무는 무엇이었을까요?
명시적으로 언급 안 되고 있지만, 유추해 보건데 그냥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고 하니까요.
"에이, 설마요..." 하지 않고, "예, 고맙습니다. 그리 믿습니다. 아멘." 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신 재산의 일부를 상속으로 나누어 주시겠다는데, "예, 고맙습니다." 하며 감사하면 될 일이지요. "말로만 그렇게 하시고 나중에 딴소리 하실거죠?" 하거나 "에이, 줄려면 더 많이, 더 좋은 것, 그거 말고 딴 것 주세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에서 하느님은 부르시고 주도하시며, 아브람은 믿고 따릅니다.
그런데 '할례'와 같이 계약 이행을 위한 인간 편의 의무를 요구하시지 않고(창세 17,9-14) 하느님 편에서만 후손과 땅에 대해 약속하십니다.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기 이전에 당신께서 호의와 자애로 이루어 주실 미래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예' 한다면 계약은 성사되고, '아니오' 한다면 그 복을 걷어차 버리는 것이 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창세 15,7) 하시는 말씀에 꽂혀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마치 이제 떠나게 될 우리 벗들에게 속삭이시는 말씀, 약속의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벗들을 이곳에서 빼내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더 좋은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자꾸만 들립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시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체험을 하게 해 주실 겁니다.
아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 3,21)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하였으니까요.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기도를 특별히 강조하는 사가입니다.
타볼산의 변모 사건을 다루면서도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높은 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오르신 이유를 분명하게 '기도하시러'(루카 9,28)라고 꼭집어서 이야기할 뿐더러, 영광스러운 변모 자체도 '기도하시는 중'(루카 9,29)에 일어났다고 밝혀줍니다.
루카에게 있어 '높은 산'은 바로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가 예언하는 우리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는 것도 '기도' 안에서,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일까요?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나요?
머리를 새로 하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멋진 새옷을 장만해 입고 그럴 때가 아름답지요.
그러나 사람이 진짜 아름다울 때는 기도하고 난 후가 아닐까요?
깊이 기도하고 난 후의 수행자의 모습은 맑고 티없는 순수 영혼의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모든 번뇌와 근심걱정을 다 내려놓았으니 맑고 청아한 피부와 눈매, 사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한 마음이 풍겨내는 향기야말로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멋져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도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변하였답니다.
바로 '기도' 때문이지요.
기도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하느님을 체험한 까닭입니다.
벗님 여러분은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나요?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시나요?
그래서 온갖 미용에 좋다는 음식이나 화장품에 관심이 많으시나요?
성형수술이나 보톡스, 백옥 주사에 맘이 가나요?
그런 데보다 기도하는 데에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해 보세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관상하는 이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답니다.
오늘 기도 후 맑은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흐뭇해 하시는 기쁨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하늘의 시민'(필리 3,20),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알아듣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기쁨이요 화관으로 여기는 필리피인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필리 3,18)로 제발 살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 길은 반드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요?
어리석게도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필리 3,19)이라고.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하늘의 시민'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저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벗님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될 벗님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벗님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아! 사랑하는 여러분!
(필리 4,1 참조)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꿈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꿈은 해몽을 잘 해야 합니다.
안 좋은 꿈이라면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면 됩니다.
좋은 꿈이라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지내면 됩니다.
안 좋은 꿈이라고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꿈이라고 경고망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도 가끔 꿈을 기억 할 때가 있습니다.
이가 빠지는 꿈을 꾼 경우도 있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꾼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이가 빠지는 경우도 없었고, 하늘을 나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앓던 이가 빠진다는 말처럼 이가 빠지는 꿈을 꾸면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 새로운 만남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꿈은 해몽이 중요합니다.
구약성서에서 꿈과 관련된 인물이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을 잘못 해몽하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곡식 단은 우뚝 서 있고, 형들이 만든 곡식 단이 자신이 만든 곡식 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 열한 개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기분이 좋았을지 모르지만 형들은 동생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습니다.
결국 요셉은 그 꿈 때문에,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꿈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꿈 해몽을 잘 하였고, 그 덕분에 이집트에서 파라오 다음으로 높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뭄 때문에 굶주리는 형제들을 돌보게 됩니다.
요셉의 배려로 야곱과 가족들은 모두 풍요로운 이집트로 올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도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결국 꿈은 해몽이 중요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꿈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남자를 모르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됩니다.
참된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요셉은 꿈에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꿈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사히 고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꿈은 해몽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아브람은 70이 넘은 나이었고, 부인 사라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땅은 부유함의의 상징입니다.
땅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정든 땅, 고향 땅인 ‘우르’를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람 당시에 우르는 지금 뉴욕의 맨하탄과 같았습니다.
완벽한 도시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현대적인 도시였습니다.
안전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정든 땅, 고향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이민족들의 땅이었습니다.
결코 안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 듣고서 낯선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500년이 지난 지금 하느님의 축복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자손들은 21억 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이 세운 교회는 가나안을 넘어 온 세상에 퍼져있습니다.
아브람의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늘었고, 땅은 크기를 잴 수 없을 만큼 늘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루어집니다.
아브람의 결단이 있었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꿈은 해몽이 중요하듯이,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쁜 강아지, 고양이를 키우는 애견인, 애묘인이 참 많습니다.
동물을 예뻐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모든 사랑을 동물에게 쏟아붓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그래서일까요?
한때 ‘강아지 번역기’라고 해서, 강아지의 짖는 소리를 통해 어떤 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능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지금은 시판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많이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대화하고 싶고,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런 상품을 구매했겠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개나 고양이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아닌 그 동물이 되어야 동물의 언어를 할 것이고, 동물의 마음을 알고 자기 마음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사람임을 포기하고 그 동물이 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전혀 다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함께 나누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감히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담소를 나누십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고,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죽음으로 완성하면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실 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구약시대의 유산이 신약시대에 인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머물면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속 머물겠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구원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지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듯(창세 15,18 참조), 우리와도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계약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기”(필리 3,21)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데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계약을 통해 얻은 은총을 온전하게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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