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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선 헌신의 자리 (막3-86)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찬양 : 모든 걸음 되시네
본문 : 막15:42-47절
☞ https://youtu.be/4mUSqNjsZnw?si=vCuVq7MX4TyJJ46p
어제 중보기도세미나는 실제로 교회에서 중보기도팀을 이끄시는 목사님의 강의가 있었다. 자신의 실제 사례와 적절하게 접목하여 강의를 얼마나 깔끔하게 해 주시던지 모두에게 큰 은혜의 시간이 되었다. 수고하신 목사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린다. 그리고 이렇게 한분 한분 세워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오늘도 작은교회 심방은 계속된다. 이제 오늘 다녀오면 3 교회가 남는다. 끝이 보인다. 정말 최전선에서 열정으로 달리시는 목사님들의 삶과 사역을 응원하는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린다.
오래된 농촌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을 방문한다. 가파도에서 섬 교회를 멋지게 섬기시다가 부임한 후 곧 바로 코로나를 만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포기해야 할 시간이지만, 묵묵히 교회를 지키며 대책없는 농존교회의 현실에 대책을 만드시며 버티시고 새롭게 변화를 만드신 목사님이시다. 참으로 뜨거운 박수가 필요하신 분이시다.
오늘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마지막에 두 여인이 예수님을 모신 무덤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 아침 빌라도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두 사람의 모습이 비교되어 묵상된다. 43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외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반역자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죄인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아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그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마가는 그가 존경받는 공회원이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에 더해 누가복음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소개를 보여주고 있다. 눅23:50-51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는 공회 즉 산헤드린 의회에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결의할 때 찬성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다수의 불법한 일을 막을 수 없었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의 의견은 소수의 의견을 묵살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이란 실망스런 결과에 그리고 모든 시선이 주목되는 상황에서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가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를 지내고 있다. 이것은 요셉의 결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인도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반해 빌라도는 총독으로 재판의 결정권을 가진 자로서 무고함을 알고도 정치적 안전을 더 우선적인 것으로 여겨 군중의 의견에 굴복해 버린 사람이다. 분명 예수님을 구할 힘이 있음에도 그는 정치적 계산서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내준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가 없는 인생의 한계점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런 요셉과 빌라도의 선택은 단순히 그들의 결단에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구속의 언약을 성취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되었음을 주목하게 된다. 주님 ~
오늘 이 두 사람을 묵상하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를 돌아볼 때 빌라도에게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도 두려움이 존재했을 것이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면 여러 가지 다가오는 불이익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셉은 당돌하게 그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의 준비한 무덤을 내어놓으며 예수님의 장례를 책임지고 치러내었다.
이 무덤에 대해 마태복음 27:60절은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당대 상류층에서 사용하는 형식으로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무덤이다. 당시 돌을 깎아 만든 무덤은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드는 새 무덤의 제작 비용이 현대의 고급 주택에 비견될 수 있었다고 하니 요셉의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임을 본다. 사람들에 의해 당하는 비난과 공회원으로서의 명예와 자신을 위해 만든 새 무덤을 다 주님을 내어놓은 것이다.
반면에 빌라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할 정도로 철저히 자신의 정치적 안전을 우선 고려하며 예수님의 시체를 내주고 있다.
요셉의 헌신을 성경은 기쁨으로 축복하고 있지만, 빌라도의 모습은 사도신경을 통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엄청난 심판을 받고 있다. 분명 두 사람 모두에게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실망스런 현실을 만난 공통점도 있지만, 그 결과가 이토록 달랐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는 아침이다.
오늘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주님이 물으신다. 사실 어제 오래전에 잡은 오늘 일정을 착오해서 심방이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오늘은 좀 여유롭게 쉬면서 목회사관학교를 준비하려고 했다. 또 멀리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에 피곤함으로 조금은 불평이 솟구치려는 날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나를 경고하시는 것 같다.
무엇이든 어려움이 다 있다. 놀아도 피곤하다. 오늘도 이어지는 작은교회 심방에 체력이 바닥났으니 힘겨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는 일정이다. 아니 주님이 명하신 일이다. 기쁨의 순종이 필요하고, 최선의 헌신이 들어가야 한다. 마음이 없는 형식적 헌신이 되면 안 된다.
진실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헌신이 필요하다고 주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주님이 맡기신 교회를 충성되게 섬기신 목사님과 사모님 두 분의 열정적 헌신을 뜨거운 박수로 응원하고 기쁨으로 돌아오는 날 되기를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다양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충성하지 못할 이유, 기뻐하지 못할 이유, 헌신하지 못할 이유가 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그렇게 이유를 넘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주신 그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직도 인간적 두려움에 움찔하고, 주님의 소중한 일을 감당하면서 계산서를 놀리는 어리석음도 여전합니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오늘도 거룩한 성령님 도와주소서. 나의 힘으론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없으니 보혜사 성령님 도와주셔서 오늘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 되게 하소서.
<중보기도 제목>
웨이브리즈: 플랫폼이 새로운 도약을 이루며 주님 뜻 이루게 하소서.
목회사관학교: 진짜 목사가 세워지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재정적 필요: 100명의 새로운 후원자와 3억의 출자금이 공급되게 하소서.
박정제 목사와 팀원들: 성령을 충만하게 하소서.
스페이스 알 사역: 왓이프 개척학교를 통해 젊은 세대 사역자가 세워지도록
틴케이스 공간: 젊은 세대를 세우는 공간으로 소중히 쓰임 받게 하소서.
작은교회 부흥: 2024년 작은교회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게 하소서.
충주 라마나욧: 세워지는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