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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peater
제1독서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9,17-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날이 올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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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심판 뒤에 구원을 맞이하는 메시아 시대가 오면, 하느님께서 포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어, 그들에게 억눌려 살던 힘없는 이들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듣게 되고 눈먼 이들도 보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하시지만, 당신이 누구신지를 아직 드러내지 않으려 하신다. 그러나 그분에 관한 이야기는 즉시 널리 퍼진다(복음).
오늘의 묵상
복음서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받고 얻고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나(마태 7,7-8 참조)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끈질기게 먹을 것을 청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루카 11,5-8 참조)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 대는 과부의 비유는(18,1-8 참조)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지요. 이러한 말씀을 읽고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를 시작하였다가,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지쳐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한 적은 없나요?
주님께서는 얼마 동안 기도하라고 기간을 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심지어 정의 때문이 아니라 다만 성가셔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이나, 우정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서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이에게까지 하느님을 비유하시면서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을 좀 성가시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귀찮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졸라 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끈질기게 들이미는 이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온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기도는 우리에게 이미 자비와 은총의 열매이고 하느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 노리치의 율리아나 신비가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기도가 너에게 아무런 맛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기도하여라. 네가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기도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 무미건조하고 병들고 나약한 기도라 하더라도, 전혀 의미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너의 기도는 나에게 기쁘다. 믿음으로 바치는 너의 모든 기도가 그렇다”(『사랑의 계시』, 173-174면).(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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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8─9장에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메시아’로 그리고 있습니다. 앞선 5─7장에서는 긴 설교문을 구성하여 ‘가르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강조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관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선발하여 파견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메시아적 신원을 밝히고 계십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그의 딸을 살려 주신(마태 9,18-26 참조)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눈먼 사람 둘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주십사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의 첫째 구절에서 언급된 이래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는 호칭으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기대처럼 원수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전사나 강력한 정치 지도자의 모습으로 당신의 메시아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정체성은 자기희생(8,17 참조)을 동반한 온유와 겸손(11,29; 21,1-11 참조)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소개하는 예수님께서는 다윗 가문 출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눈먼 두 사람은 연민과 치유로 메시아적 권위를 행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그 믿음 때문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은 치유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믿음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지금은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때입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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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비오 11세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 성인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삼십 일 피정을 한 뒤, 1534년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에 있는 성당에서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 회원으로 첫 서원을 합니다. 15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고, 1540년 예수회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쳐 인도 고아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545년부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뉴기니와 필리핀 인접 지역에서도 선교 활동을 하였고, 1549년부터 1551년까지 일본을 왕래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중국을 회두시켰더라면 일본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이르러 중국으로 향할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중국 본토가 보이는 광둥성 앞 상촨섬(上川島)에서 명나라 황제의 입국 허가를 기다리던 가운데 풍토병에 걸려, 결국 중국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언제나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회 회원들이 날마다 두 차례씩 하는 ‘의식 성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의식 성찰’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회원들이 많이 바쁠 때는 기도를 관면해 주기도 하였지만, ‘의식 성찰’만큼은 절대 관면이 없었습니다.
의식 성찰은 내 삶 전체, 내 존재 전체를 살펴보는 기도입니다. 눈을 떠서 점심시간까지 그리고 잠자기 전까지 나의 행동, 선택, 그리고 감정의 변화를 살피면서,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행동하였는지, 아니면 노예로 살았는지 살펴봅니다. 그렇게 살펴본 뒤,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끝에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답을 찾을 것입니다.(서철 바오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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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이사 1,1)는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영감으로 현실을 보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현실을 말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어제 독서의 묵시록 부분(이사 24―27장)에 이어, 이사야 예언서 28―33장은 불행 선언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신탁입니다. 비록 “불행하여라.”(28,1)라는 저주로 시작되지만 구원에 관한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을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먼저 레바논의 분명한 변화를 언급한 뒤, 사람의 시각과 청각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이사야는 악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이미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께서 지니신 변화의 힘을 사람들이 과연 신뢰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 하고 외친 눈먼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눈먼 이들은 “예, 주님!”이라고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에 “임마누엘”(마태 1,23)께 드릴 찬미는 눈먼 두 사람의 신앙 고백을 넘어 화답송의 시편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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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영적으로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하고 인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줄 작품을 예언합니다. 많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주님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예언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합니다. 피조물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변화의 은혜를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이익을 얻으려고 땅을 제멋대로 다루거나 착취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예언자는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보여 주신 충실한 사랑에 눈을 연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였던 것처럼 겸손한 이들은 주님을 유일한 안내자로 알아 모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친밀감을 느끼며 기뻐하는 가난한 이들이 겸손한 이들 곁에 있습니다. 믿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는 치유와 구원의 좋은 결실을 볼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 둘의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활동은 육체의 치유보다 더 심오합니다. 곧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믿음은 눈먼 사람 둘에게 육체의 눈을 열어 준 것이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눈먼 사람의 눈이 믿음으로 열린 것입니다. 마음이 끌리는 사물만을 보는 우리는, 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려면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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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이시여!” 하면서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러 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에 따라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이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메시아를 가리키는데, 평범하게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분이심을 그들은 알아봅니다. 오늘 독서 말씀대로, 귀먹은 이들이 듣게 되고 눈먼 이들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는 표지이기에, 그분께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시라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 하고 대답하셨습니다(마태 11,2-6 참조).
이제 더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이미 성취되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는 이미 오신 그분을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눈멂,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은 다른 어떤 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됩니다. 그분을 알아보았던 두 눈먼 이들처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오직 그분께만 매달리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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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들음’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고 계실 때,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이라며 구세주이심을 고백합니다. 볼 수도 없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한마디로, 듣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음’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는 이들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응하지 않으신 채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까지 따라 들어갑니다. 사실 눈먼 이들의 처지에서 특정한 사람을 따라가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집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들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때로는 돌부리에 걸리거나 사람들에게 부딪치면서도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흔적 을 ‘들으려’ 하는 이들의 애절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보게 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은 입으로만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귀를 빳빳이 세우고 그분의 소리를 들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소음 속에서도, 많은 거짓된 소리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까? 우리도 진정으로 눈을 새롭게 뜨려면 그분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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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이 적진에서 포위된 채 숨어 있었습니다. 양식이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들이 적군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꼼짝없이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곧 구출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달랐습니다. 한편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다른 한편은 힘 있는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이 구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국의 힘을 믿고 있던 한편은 미군이 적군들을 물리치고 곧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오늘일까 하고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실망해야 했고 결국 절망하여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믿음을 두고 있던 군인들은 늘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만이 마지막까지 살아 목숨을 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두 ‘눈먼 이’를 고쳐 주시면서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세상의 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 것에 먼저 믿음을 두고 삽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능력을 하느님보다 더 깊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보다 세상의 논리와 가치를 먼저 선택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늘 불안해하고 삶에 지쳐 가는 이유입니다.
한편 주님에 대한 믿음은 힘을 솟게 하고 평화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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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기적을 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목소리에는 애원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너무나 짧은 대답입니다. 주님 앞에서 무슨 긴 말이 필요할는지요? 그들은 즉시 눈을 뜹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큰아버지는 그를 양자로 삼고 사업을 물려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수도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36세의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됩니다. 성인은 고해 신부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위선과 착각을 꿰뚫어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겸손했고, 유머와 해학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선물했습니다. 영적 생활은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통념’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딱딱함과 ‘옹졸함’에 분명 변화를 일으켰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시대를 앞서 살았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모르면 볼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고집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눈 뜬 소경’입니다. 삶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언제나 많은 법입니다. 우선은 ‘홀로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할 때, ‘눈 뜬 소경’을 면할 수 있습니다.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서 안에는 인생이 처참하게도 산산조각난 두 인생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 회복이나 치유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 분위기상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나 복지 혜택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나 몰라라, 공동체도 그들을 소외시켰습니다. 더 억울한 일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각 장애를 죄에 따른 벌로 여겼습니다. 앞을 못 보는 불편함에 죄인 취급까지 받으니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삶은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산산조각 났으니, 더이상 내려설 곳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워 하거나 체면 차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두 눈먼 사람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이윽고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두 사람의 인생을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두 사람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셨습니다. 마침내 산산조각난 두 인생을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에 넣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산산조각 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크신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제 발로 서 있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주님 뜨거운 사랑만 기대할 뿐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공생활 기간 내내 지속되었던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활동,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불치병 환자들,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던 임종 환자들에 대한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여러 이론과 상상을 동원해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그곳은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울부짖음이나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곳, 우리의 모든 결핍과 아쉬움, 죄와 죽음이 모두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앞에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버리는 곳, 우리의 오랜 병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 그 자체로, 당신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에너지로 환자들을 치유시킴을 통해 그토록 은혜롭고 축복된 하느님 나라의 한 실상을 미리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적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섰던 불치병 환자들의 행렬들과 마주서셨습니다. 조금도 귀찮은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오랜 병고를 말끔히 치유시킴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한 인간이 더 이상 행복해할 수 없는 상태가 구원이 아닐까요? 그 상태는 아마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구원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 품 안에 머무는 것, 그분 큰 사랑 안에 푹 잠기는 것,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특별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31년 전 용산 성당에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 당시 본당 봉사자였던 자매님이 제가 달라스에 있는 것을 알고 연락했습니다. 딸이 지금 달라스에 있는데, 혼배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연락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도와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용산 성당에 있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따님은 달라스에 와서 자리를 잡았고, 혼인할 배우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관면 혼배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새로 개업한 가게를 축성해 주었습니다. 한국으로 휴가 갔을 때 자매님은 제게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던 적성 성당엘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적성에서 서울까지 2시간 넘게 운전해서 왔습니다. 저는 31년 만에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성당과 멀어질 뻔했던 딸이 저로 인해서 다시금 신앙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고마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세상은 사필귀정, 인과응보의 질서 속에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는 사필귀정과 인과응보로 자녀를 대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비록 자녀가 잘못했어도 어머니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기다려주고, 받아줍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어머니도 자비롭기 때문입니다. 본당 사제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30%의 교우는 그것을 알아주지만, 30% 교우는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40%의 교우는 본당 사제의 사목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당 사제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본당 사제에 대한 불만보다는 그래도 좋았던 점을 기억하기 마련입니다. 어머니가 멀리 외국에 있는 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그랬습니다. 딸에 대한 좋은 기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해도, 비록 우리가 잘못했어도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날은 딸을 위해서라면 몇 시간씩 운전해서 오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당신의
무엇
아니라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무엇
보다도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무엇
앞서서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무엇
넘어서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무엇
없어도
당신을
믿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 둘을 만나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소경들이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물어보셨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하시며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음악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 코드라는 것이 있어서 그 안에서 화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그 울림이 듣기가 좋고 적어도 부담 없이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 코드를 벗어나게 될 때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듣기에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도 분명 하느님의 코드 안에서 함께하게 될 때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누구를 증오하면서 그 사람을 벌해주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코드 안에서 그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코드는 사랑이고 용서이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하느님께서 사랑이라는 노래를 연주하시는 콘서트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지휘하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지휘에 따라 바른 음을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울려 퍼지게 될 때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은 그분의 사랑 안에 완성을 이루게 될 것을 믿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두 맹인을 고쳐주신 기적이 오늘 까지도 성경 통해 퍼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인류역사상 하늘능력을 직접 알게 한 일 확실합니다.
오늘이 예수님 탄생 후 2025년 지났건만 알게 되는 기적사실 맞아요.
이런 하늘능력자 예수님의 탄생일로 12월 25일을 지내고 있는 겁니다.
크리스마스란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미사라는 뜻도 알아야지요,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은 축하 감사 감축한다는 뜻이 앞에 붙은 겁니다.
세상 보기위해 눈뜬다는 기쁨과 이미 눈뜬 자는 하늘능력 볼 기쁨이죠.
안 믿으면 그냥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인간 생물체랄 수밖에 없습니다.
가톨릭알림 말: 예수님탄생 축하한다는 뜻에 최소한 동참해야 되겠습니다.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식스토 로드리게스는 2집 앨범까지 내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그의 열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팬 2명이 수소문하여 그를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가수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단 6장만 팔릴 정도였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못지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정치적 부패에 맞서던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사는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인기를 전혀 몰랐습니다. 저조한 음반 판매로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되었고 가수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가 라이브 무대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신비적인 가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음반을 발매한 미국에서는 그 어떤 인기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는 엄청난 인기와 모든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이 세상 안에서는 꼴찌의 삶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이나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실 것입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자비의 청을 목청 높이 외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커다란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소경을 눈뜨게 해 주셨는데 그 조건으로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묻습니다. 믿음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백 살 가까이 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져요. 남을 위해 살았던 갓만이 보람으로 남습니다(김형석).
라이벌 의식.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했던 병원이지만, 입소문이 나서 계속 확장해서 꽤 큰 규모의 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몇 명의 의사를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다행히 새로 뽑은 의사들은 모두 성실했고, 환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며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당연히 병원은 더 유명해졌고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몇몇 환자들이 원장님께 의사를 정말로 잘 뽑았다면서 새로 뽑은 의사들이 잘하고 있는 점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장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의사들을 하나둘씩 해고했습니다. 환자들의 사랑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만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동료 의사들에게 나눠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병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의사는 사라지고 원장에게만 아부하는 불친절한 의사만 남았습니다. 병원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원장의 라이벌 의식 때문입니다. 굳이 갖지 않아도 될 라이벌 의식으로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경쟁의식을 피해야 합니다. 그보다 나와 함께 할 협조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말 오랜만에 가까운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수도생활한답시고 바쁜척하며 미루다 미루다 보니, 거의 40여 년 만에 만나 뵌 것입니다. 사람 도리도 못하며 살았구나 하는 회한도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저희 이태석 신부님을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종교를 가지고 싶은데, 이태석 신부님 때문이라도 선택하라고 한다면 성당에 나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동료 수도자인 저보다 더 이태석 신부님의 생애며 신부님과 관련된 최근 돌아가는 동향을 더 잘 꽤뚫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남기신 삶의 흔적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과 영향을 끼쳤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비록 짧은 삶을 살다 가셨지만 참으로 우리 교회와 사회를 위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을 하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이태석 신부님께서 월간 생활성서에 기고하신 글을 묶은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생활성서) 이후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괄목할만한 필독서가 최근에 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신부 이태석’(김영사)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전기 문학의 대가이신 이충렬 작가께서 오랜 시간 공과 정성을 들여 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작가께서는 집필 과정에서 저희 살레시오회의 충실한 자문을 구하셨고, 여러 관련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분석하셨을 뿐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요, 이태석 신부에 대한 공식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감에 찬 이태석 신부는 제임스 신부를 따라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을 방문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빈 들판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리고 톤즈의 너른 벌판에서 의술만 믿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와 선교 사제가 되겠다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먼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러나왔다. ‘인간 이태석’이 무너지고 ‘사랑의 선교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 동방의 위대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을 그들과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의 누추한 잠자리 바로 그 옆에 머리를 눕혔습니다. 그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 특히 한센씨 병 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자신의 장상인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님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드리거나 식사하거나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선교활동에 미온적인 오늘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는 시절, 그는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한 평생에 걸친 목숨 건 봉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그분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세상의 끝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정성어린 기도로써, 성의 있는 나눔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업에 함께 참여하길 바랍니다.
부모에게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가 세상에 나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곧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 알아서 다 해 주셔야지 굳이 당신의 능력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주실까요? 이는 능력 있는 분의 특징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되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을 내어주시되 선악과는 바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어. 그래서 다 해주냐? 물론. 그러나 내가 하느님임을 잊지 마. 네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에게 선악과 하나는 좀 바쳐줄래?”입니다.
만약 부모가 다 내어주기만 하되 부모로서의 권위와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경계 없이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렇게 침범당해도 되는 줄 압니다.
『벼랑 끝, 상담』에 ‘시누이로 인한 피해망상’이란 사례가 있습니다. 남편의 위로 누나가 5명, 아래로는 여동생이 1명 있는데 아내는 시누이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깁니다. 특별히 큰 시누이는 돈이 많아서 결혼할 때 도움도 받았기에 거의 엄마뻘 되는 큰 시누이에게는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시누이들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닌 동생의 아내를 무시하고 깔보고 핍박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이 몇 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도 못하고 꾹 참다가 결국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시누이들도 물론 문제지만 피해자인 아내도 문제입니다. 큰 시누이가 들어와서 자신의 낡은 옷들을 시누이 맘대로 꺼내 버리고 자기가 좋은 옷 사준다고 나가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들만 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시누이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묵인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사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딸들에게 무언가 항상 못 해 준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선을 설정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미안한 마음이 자신과 자녀와의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은 자녀에게 집착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역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불완전한 부모는 있어도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어쨌든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 가르쳤다고, 딸만 많이 낳았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미안해하는 마음이 자녀들을 망칩니다.
부모는 에덴동산의 주인과 같습니다. 이미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만약 선을 넘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 할까요? 능력 있는 부모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겸손하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을 꼭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녀를 돕지 않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부모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어떨까요? ‘EBS 육아교육’에서 ‘의존형 아이를 만드는 엄마들의 심리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단어들로 문장 만들기를 하는 것인데,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일이니 아이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한국 엄마들은 자주 간섭을 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엄마들이 관여합니다. 어떤 아이들이 자존감이 큰아이로 성장할까요? 당연히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어준 미국 어머니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교육해 주어 세상에 내보내면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녀들이 ‘혜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해야지, 해주면 해 줄수록 더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교만해져서 아무리 많이 해줘도 부모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불만을 품으면 그것은 부모 탓입니다. 자녀의 교만을 너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부모의 능력을 믿고 부모에게 겸손하게 청할 때만 들어주어야 합니다. 남들은 눈이 다 보이는데 나만 안 보여서 하느님께 불만을 품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마십시오.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아무리 많이 해줘도 결국 그 자녀는 부모까지 잡아먹게 됩니다. 휘둘리지 않는 힘도 자존감입니다. 그런 자존감 있는 부모에게 자존감 있는 자녀가 태어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미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사람과 하느님, 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질서와 경계가 존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의 경계를 존중하시며 사셨습니다. 부모에게서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일을 보여주는 프로였습니다.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프로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찡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지극한 정성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의 이야기도 있었고, 몸이 아픈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었고, 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욥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성실했고, 하느님을 섬겼던 욥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재물도 잃어버리고, 자식들도 행방불명이 되고, 몸은 병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욥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모든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에게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남자를 모르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10월입니다. 한 달 사이에 구급차를 2번 탔고, 응급실에도 2번 다녀왔습니다. 동창 신부가 시카고에서 잠시 놀러왔습니다. 뉴욕 구경을 시켜 주려고 자전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다니려고 했습니다.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탔는데 15분 만에 자전거가 벽에 부딪치는 사고가 났습니다. 동창신부는 부상을 당했고, 구급차를 불러서 응급실로 갔습니다. 뉴욕 구경 대신 엘머스트 병원에서 2일을 머물다가 동창신부는 시카고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보호자로 구급차를 탔고, 응급실에서 동창신부와 함께 있었습니다. 다행히 동창신부는 보험을 들었기에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없었습니다.
이정도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2주 후에 이번에는 제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갔습니다. 파란불이라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좌회전 하는 차가 저를 미처 못보고 운전하였고, 저도 피하지 못하고 차와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운전하던 사람이 경찰과 구급차를 불러서 저는 빨리 응급실로 가서 사진도 찍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어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는데 플러싱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보험이 없다고 합니다. 난감해진 저는 방법을 찾으니 저의 자동차 보험에서 병원비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보험에 연락을 하니 저의 자동차는 회사 명의로 되어 있기에 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가 난 경우는 보험 혜택을 받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뉴욕 시에 치료비를 청구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변호사에게 의뢰를 해서 뉴욕 시에 병원비 청구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일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할 일입니다. 몸에는 큰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오면 생길 놀라운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비록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멸시 받고, 무시당하지만 언제고 주님의 날이 오면 여명의 눈동자처럼 햇빛이 환하게 드러나듯이 기쁨과 행복이 찾아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이가 걸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병고에 신음하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오늘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시련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게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기다림은 나와 만나는 모든 것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안開眼의 여정, - 기도와 회개, 믿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대림시기 제1주간 독서와 복음의 배치가 참 적절합니다. 이사야의 하늘 나라의 꿈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꿈을 꾸고 희망을 갖습니다. 꿈이, 희망이 없으면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삭막하고 궁핍한 시절일수록 하느님 꿈은, 하늘 나라 꿈은 필수입니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는 참꿈입니다. 이런면에서 예수님을 비롯한 이사야 등 헤아릴 수 없는 예언자들, 교회의 성인들은 꿈꾸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꿈의 사람들은 땅의 현실에 아주 깊이 뿌리내린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꿈의 실현은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인지요! 말씀의 주제도 ‘대역전大逆轉’입니다. 바야흐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이사야입니다.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언젠가의 그날의 꿈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대림시기 오늘 실현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내적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의 꿈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을 열렬히 찾는 우리를 찾아 만나 주십니다.
복음의 눈먼 사람이 상징하는바 바로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입니다. 주목할 바 이들의 눈뜨고자하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개안에 앞서 전제되는 바 간절한 믿음의 표현이 이런 갈망이요 열망입니다. 무지에 눈먼 사람들,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참고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동방영성에 말하는 마음의 병에 대해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참으로 인간에게 근원적 뿌리 깊은 질병이 마음의 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는 마음의 병, 바로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ignorance’의 병에 이어 줄줄이 이어지는 마음의 병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forgetfullness’,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짐hardness’, 마음의 ‘눈멈blindness’과 ‘오염contamination’, 그리고 ‘무분별imprudence’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의 만남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근원적 마음의 병들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불행과 비극은 이런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하여 평생 하느님을 모름으로 자기도 모르는 채 평생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눈뜬 맹인으로 살다가 참으로 허망하게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불가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이나 교만, 허영, 위선, 질투 등 모든 부정적 영적 현실은 거의 모두가 인간 무지의 눈멈에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무지를 깨우치시고자 부단히 “들어라!”, 귀를 열어 경청할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요, 부단히 “보라!”, 눈을 열어 제대로 실재를 직시할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불치의 근원적 마음의 질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에 눈멀면, 하느님과의 만남 빼놓고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가 절대적입니다. 바로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믿음도 증대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놀라운 것은 두 맹인의 갈망이자 열망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바로 성소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이런 영적 갈망과 열망은 늘 생생해야 합니다. 갈망의 영적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 욕망만 남은 동물로의 전락이 그를 기다립니다.
이런 갈망의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바로 이런 맹인의 심정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두 맹인의 간절한 자비송이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바칠 겸손한 갈망의 기도도 이 기도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집요하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두 맹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절히 찾고 청할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주님을 찾고 만나고 싶은 열망이 없으면 주님을 만날 길은 요원합니다. 마음의 소원이 간절할수록 청원도 단순명료합니다. 눈이 열려 제대로 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무지에 눈먼 우리가 청할 유일한 소원입니다.
“내가 그런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그대로 맹인의 믿음이 집약된 “예, 주님!”이란 말마디요, 이에 감격,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주님을 감동케하는 우리의 믿음이요, 바로 이런 믿음이 눈뜸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두 맹인은 눈이 열렸고 주님은 헛된 인기와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함구할 것을 명하시지만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퍼뜨리니 말그대로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역시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활짝 열린 성인은 복음 선포의 사도가 됩니다. 만 46세 중국 선교를 꿈꾸며 병사하기 까지 참으로 치열한, 가열찬 삶을 살았던, 이냐시오 로욜라와 예수회를 창립했던 성인입니다.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 성인은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개종시킨 교우들 수만해도 1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하여 성인은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로 불립니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같은 예수회의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되었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참으로 개안의 여정에 항구했던 성인이요 무지의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자 마지막까지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열정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입니다.
개안의 여정입니다. 한 번 눈이 열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의 병이 깊기에 평생 개안의 여정에 항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계속 눈이 열려야 합니다. 육안은 날로 어두워져가도 영안은, 심안은, 혜안은 날로 밝아질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참된 내적자유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을,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렸을 때 다음과 같은 감격의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눈을 열어 주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 천국을 살게 하시며 개안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는 중에 눈먼 사람 둘이 자신을 향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집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눈먼 두 사람도 함께 들어가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는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복음의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치유를 하시지는 않습니다. “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 혹은 오늘의 내용처럼 먼저 믿느냐.” 등으로 확인을 하십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대답에 따라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이러한 확신에 대해서 언젠가 제가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남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에 대한 확신은 자신이 찾아 얻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에서의 두 눈먼 이들은 예수님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들은 적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에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분을 통해서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는 공부나 누구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훌륭한 사제의 강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 생활을 하면서 일본에서 혹은 한국으로 휴가를 갈 때 마다 많은 신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다는 확신 등등. 복음에서 두 눈먼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예 주님” 그들의 대답은 다른 누구가로부터 들어서 혹은 교육을 받아서 나온 대답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한 답입니다. “예 주님”
저는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주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매 순간 하느님의 명을 받고 저를 보호해 주시는 수호천사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하느님으로부터 매일 매 순간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느린 걸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느릿느릿
걸으셨답니다
눈먼 사람 둘이
더듬더듬 걸음으로도
따라올 수 있도록
그분의
느린 걸음은
자비로운 걸음이지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 두 사람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셨고,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영화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에서 인간으로 나타난 하느님이 방주를 짓겠다고 집을 떠난 주인공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에게 다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이런 명대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 물어보도록 하지요.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할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뿅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미 그에 대한 응답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믿으며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하느님이 이미 마련해 주신 것들을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셨습니다. 1537년에 사제가 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셨습니다. 그 뒤 그는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땅이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하셨습니다.
1622년에 시성된 성인은 흔히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립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여행하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자신들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그들에게 진정 믿음이 있는지 하문하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28절ㄱ) 그러자 그들이 “예, 주님!”(28절ㄴ) 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29절)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사명을 실현하는데 필수적이지 않은 갖가지 청원들에 시달려 소명이 훼손되거나 지체되는 것을 방지하시기 위하여,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30절) 하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 중에 급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청을 우리에게 듣고 들어주시는 것이 달가워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소망들이 혹여 개인적인 만족과 행복에 그치고 말고, 주님의 하느님 나라 구현이라는 지상 소명에 저해되는 것은 아닐까 저어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즐겨 들어주시고 그러한 수용과 허락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기쁨과 행복을 선사해 주시지만, 모든 이들을 향한 구원 소명이 내 개인의 치유와 행복을 통해 증폭되고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 채, 자칫 내 개인적인 안이와 편의로 안주하고 사그라들지는 않을까 망설여집니다. 우리를 통해 놀라우신 일을 일으키시고 선사해 주시는 주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퍼져나가기를 간구합니다.
사제의 영성, 하느님의 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이다. 예수회 창립 멤버이다. 종교개혁과 분열 사이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싸움이 치열할 때, 성 이냐시오 성인과 함께 복음전파의 방법을 교육에서 찾았다. 그들의 방법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로 세상을 향해 떠났다.
성인은 동양의 사도이다. 포르투칼 리스본을 떠나 인도 고아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낯설고 물설은 선교지 고아에 도착, 복음을 전했고,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뉴기니에 복음을 전하고 일본을 향해 복음화에 매진 중국 본토의 복음화를 위해 항해를 계속하다 안타깝게도 풍도병에 시달려 도착 전 선종한다.
그의 삶은 주님의 향한 발걸음이 생의 전부였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던 석학이다. 그는 이론적 바탕은 예수님의 지극한 인류구원 이라는 하느님의 힘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가 지녔던 힘을 하느님의 힘이라 하고 사제의 영성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끊임없는 행진을 계속하는데 깊이가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그의 삶은 살아계신 하느님, 예수님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으리라.
우리는 사제로서 과감히 선교지로 떠나 보았는가? 다 살고 난 다음의 떠나려는 날갯짓의 여정은 실천하는데 보탬이 되지 않을 뿐더러 이런 질문은 자신에게 실천 없는 자신을 보게 되어 깊은 공허함만 남게 될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시여! 저희 사제들이 살아계신 하느님, 예수님 만나 그 분과 온전히 복음화를 위해 열정을 살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하늘 보고파 외치는 맹인 영혼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눈 먼 사람들은 세상을 못 보고 안 믿는 사람들은 하늘 못 보니 같죠.
전자는 물리적인 세상모르고 후자는 초월적 하느님세계를 모르니까요.
하늘보고 싶다 외치는 영혼 맹인들 많지만 안내자들 너무나 적습니다.
눈 뜨고 싶은 하늘 맹인들 어딜 가야 하늘 뜻 배워 눈 뜨냐 외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매해 몇 명씩은 하느님자녀 되게 선교합시다.
그래서 그들이 눈뜨면 하느님가족 내 형제 자매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인터넷 메타버스 비대면 시대지만 영혼 눈뜨게 해 하늘가족 늘립시다.
컴퓨터나 모바일로 이 시대에 맞는 ‘인터넷교리’ 배우도록 안내합시다.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모진 고난과 풍파 속에서 흔들림이 있을지라도
땅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는 믿음은
그 순간을 견디어 내고 지켜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청하는 이들의 발걸음
그 발걸음들에 주님의 뜻이
당신의 은총의 축복의 열매 맺음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Let it be done for you according to your faith.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9, 27-31(대림 1주 금)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이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 오늘 화답송 후렴).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그 믿음에 저의 믿음이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마음 속에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한 그 눈 먼 이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었을까? 치유를 바라며 예수님을 따라다닌 병자들은 마음 속에 어떤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런 믿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나를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께서 나를 꼭 치유하실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전자는 ‘믿음의 영역’이고, 후자는 ‘바람의 영역’입니다.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은 당장 자기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조바심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알아서,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 먼 사람들이 시력을 되찾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한 것은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분의 능력을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을 내고 두려워하다가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제 풀에 지쳐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하느님께서 자기 삶에 일으켜 주시는 놀라운 변화들은 알아보지 못한 채 실망과 좌절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지요.
주님은 두 소경에게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이루어지는지 아닌지에 대한 책임을 그들 탓으로 돌리시는 차갑고 무책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눈 뜬 소경들’과 달리, 그들은 보지 못했음에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즉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그 믿음은 주님이 머무르시는 집까지 따라 들어갈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콕 집어서 당장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좁고 얕은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며 그런 그분의 처분에 따르고 자비를 바라는 넓고 깊은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그분의 뜻과 같았기에,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라는 말 이외에 다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지요.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비좁은 ‘바람의 영역’에 갇혀 고집부릴게 아니라, 드넓은 ‘믿음의 영역’에서 헤엄치며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큰 물에서 헤엄쳐야 큰 사람이 되는 법이지요. 두 소경은 주님을 원하는 한 두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이 아니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피시는 ‘자비로우신 분’으로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훨씬 더 귀하고 좋은 것들을 이루어주실 수 있는 가능성을 무한하게 확장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믿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다음의 시편구절을 마음에 담고 꾸준히 암송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마음과 감성에 따라 사물을 본다. <마태 9, 27-31> 12월 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바른 마음으로 보는 것과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슬픔을 품고 보는 것은 모두 가련하게 보이고 기쁨을 품고 보는 것은 모두 행복하게 보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듯이 아름다운 금강산도 기쁨에 젖어 보는 것과 슬픔에 젖어 보는 것은 다르게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 그대로 의식하고 봐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만사는 사람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고 보려는 마음에서 서로 다르게 보입니다.
비록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주님에게 “바로 보게 하소서” 하며 주님이 보는 것같이 보도록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어느 날 왜관에서 김천에서 대구까지 가는 급행 버스를 타는데 자리는 하나도 없고 서서 가야 할 입장이어서 남자가 있는 자리 앞에 서서 가는데, 앉은 신사가 김천에서 타고 오다가 피곤해서 잠이 들었습니다. 서 있는 저에게 머리를 기대어 잠이 들었는데 저는 서 있고 자기는 앉아 있으면서 나를 힘들게 하여 몸을 살짝 피하려니 잠이 깰 것 같아서 할까 말까 하다가 속으로 ‘이 사람이 예수님이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더 가까이 몸을 대고 더 편하게 잠을 자도록 했을 거야’ ‘아니야, 나를 괴롭게 하는데’ 하다가, 예수님 마음을 가지고 다시 보니 예수님으로 보였습니다. 몸을 더 가까이 대주고 대구 종점까지 간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마음 가진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진실과 사랑으로 보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답게 보고 평화와 기쁨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이고 행복한 세상에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시간, 장소,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웃는 눈, 자비로운 눈, 사랑이 가득한 눈, 자유로운 눈, 평화로운 눈, 기쁨이 넘치는 눈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슬픈 눈, 분노하는 눈, 복수심이 가득한 눈, 미움을 가진 눈, 불의와 부정을 행하는 눈, 시기와 질투의 눈, 거짓과 욕망에 가득 찬 눈을 없애 주시도록 자비를 구합시다.
“왜 사느냐?” 하면 “행복하려고 삽니다.” 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십시오.” 하겠습니다.
성경의 하느님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증명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저는 “마음이 가난한 눈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이다.”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의 눈을 지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떠나는 것이
다시 만나는
참기쁨이다.
새로운 만남을
복음으로
만들어내시는
기쁨의
하느님이시다.
만남과 떠남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고
간절하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붙들어
가두어놓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떠남이 있다.
복음을 위해
떠나는 이들이
있기에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이어주는 기쁜
소식이 된다.
하비에르
선교사의
발자국이
우리를
위로한다.
생명과 바꿀
선교의 길에서
생명의 길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삶을 내어드리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한다.
선교는
가장 간절한
기도이다.
간절한 기도는
이국땅에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기도가 있기에
목숨을 걸
하느님이 계시고
선교가 있기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게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이들에게
기다림의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다.
기다림이
선교이고
기다림이
사랑이다.
이 위대한
선교사의
발자국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다시 배우는
대림이다.
제빵을 배우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빵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빵을 먹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일 케이크도 먹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 청년에게 누군가가 묻습니다.
“너 빵 싫어하잖아. 그런데 빵을 만들어?”
이런 질문을 아마도 많이 받았나 봅니다. 청년은 그냥 시큰둥하게 대답합니다.
“안 좋아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요.”
우리는 안 좋아하면 못한다고 단정 짓곤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저 역시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또 많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안 좋아했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하긴 누가 이런 말도 하더군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애초에 다르다.’
아무튼 많은 이가 한쪽으로만 판단하고 단정 짓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의외의 결과를 늘 만나게 됩니다. 오히려 반대 방향에서 해결책이 나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 못하는 자신을 믿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보다 자신을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은 어떨까요? 이런 믿음을 통해, 하지 못하는 자신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왜 치유를 받아야 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치유 받으면 뭐가 좋은데?”라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이렇게 물어보시지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에 대한 물음에 “예, 주님!”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부족한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생텍쥐페리).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신학생 때 신부가 되면 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정말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저만 했을까요? 당시 제 동창들과 이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내가 신부가 되면 이렇게 살 거야.”라고 말했고, 모두가 이대로 실천했다면 이 땅에 성인 신부가 엄청나게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쉽고 편한 것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신학생 때 그렇게 되고 싶었던 본당신부였고 그래서 나름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미사 대수도 늘리고, 고해성사도 하루도 빠짐없이 30분 이상 주었습니다. 성사 활동에 충실했고, 그러면서도 외부 특강과 방송 그리고 책도 출판했습니다. 이런 저를 향해 다른 신부들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너 그렇게 살면 후임 신부는 어떻게 살라는 거니? 그 성당에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적당히 살아.”
신부 되기 전에는 분명히 열심히 살라는 말을 선배 신부님들께 들었는데, 이제는 적당히 살라고 합니다. 무엇이 맞을까요? 치열할 정도로 열심히 사신 예수님, 왜 이런 모범을 보이셨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산조각난 내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시는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고마운 후원자께서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신간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비채)를 보내주셔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60여편의 주옥같은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참으로 매력적인 책입니다.
정호승 선생님께서는 스물 세 살에 등단하셔서 지금까지 총 13권의 시집을 통해 천 여편의 시를 쓰고 발표하셨다는데, 그중 당신께서 늘 가슴에 품고 다니시는 최애시(最愛詩)가 한편 있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산산조각’입니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서에도 인생이 처참하게도 산산조각난 두 인생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온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 회복이나 치유는 꿈도 꿀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 분위기 상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나 복지 혜택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나몰라라, 공동체도 그들을 소외시켰습니다. 더 억울한 일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각 장애를 죄에 따른 벌로 여겼습니다. 앞을 못보는 불편함에 죄인 취급까지 받으니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삶은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산산조각 났으니, 더 이상 내려설 곳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체면 차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두 눈먼 사람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이윽고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두 사람의 인생을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두 사람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주워모으셨습니다. 마침내 산산조각난 두 인생을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에 넣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산산조각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크신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제발로 서있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주님 뜨거운 사랑만 기대할 뿐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연한 칭찬도 받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주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눈먼 사람 둘은 영적으로는 믿음의 눈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자 이렇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혹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비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단히 이르십니다.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도대체 다윗의 자손이 당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이 알려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기에 이렇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분명 그 함구함도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상대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느낄 때 사랑은 그 순간에 끝장납니다. 사랑은 겸손과 단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시각을 잃지 않기 위한 쉼 없는 싸움입니다.
영화 ‘러브 & 드럭스’(2010)는 제약회사 말단 직원과 어여쁜 한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약회사 말단 직원인 남자 주인공은 점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본사 이사까지 노리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당 아르바이트하는 여인은 파킨슨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갑니다. 여자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 맞지 않음을 깨달아갑니다. 남자도 약을 파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여자친구 하나 고쳐주지 못하는 것에 피폐하여 갑니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 때문에 망가지는 남자를 볼 수 없어 떠나고, 남자도 그 이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본사로 가기 위해 이사를 해야 하는 날, 남자는 처음 여자와 사귈 때의 동영상들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 떠나면 영영 그녀와의 행복한 시절은 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버스를 타고 가는 여자를 잡기 위해 차를 몰고 갑니다. 버스를 세우고 그녀에게 고백합니다. 그녀가 오히려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라고.
이렇게 사랑이란 상대가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임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나를 칭찬하고 들어 높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내가 상대의 발을 닦아주려고 해도 상대가 나의 발을 닦는 분위기에서는 그러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로, 또 당신을 왕으로 떠벌리려는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발을 씻어주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메시아로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로, 왕으로, 하느님으로 찬미해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사랑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 영광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받을 영광은 받으십니다. 하지만 내가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것과 “당신들이 나를 그리스도라 인정하시오!”라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 자신을 열등하게 여기는 사람만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느냐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몸을 바치기로 한 하나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요즘처럼 날이 좋은 1992 가을에 찾아왔다. 당시 나는 성남 중원구 상대원동에서 빈민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방문하여 돕는 것이 내 담당이었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사는 집의 주소를 알게 되었다. 종이에 적힌 주소를 찾아 도착한 곳에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 있었다. 어둡고 곰팡내가 가득한 지하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 열려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일 뿐이었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방바닥에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누워 있었다.
아저씨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20대 때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다고.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더니, ‘옆집 사람들이 기억해서 주면 먹고 아니면 굶어요’라고 했다. 당신 한국의 사회복지는 많이 발전하지 못해서, 이런 분들은 도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30여 년 동안 혼자서 그렇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갈 수도 없는 화장실을 대신한 아저씨의 요강을 정리하고, 방 청소와 설거지를 했다. 그 후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렸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이 음성이 예수님의 메시지임을 확신했다. 이 음성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상상이나 환청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그날부터 특별히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안나의 집을 찾아오는 사랑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나는 매일 예수님의 상처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숙인 친구들을 볼 때마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고 기쁘다. 또한,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님의 상처를 모실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저도 노숙인 무료급식 처에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소경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넘어서 ‘저들이 누구인가?’로 가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로 보일 때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시작되는 터닝포인트입니다.
사랑은 누가 먼저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당연한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항상 모든 이들을 아버지처럼 대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아무리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는 것을 즐기면 사랑을 위한 경쟁에서 먼저 패배하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라디오와 친숙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플랫폼, 영시의 다이얼, 두시의 데이트, 이브의 연가, 영화 음악실’이 생각납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60년대와 7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대부분은 잔잔한 멜로디의 서정적인 음악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시작되는 프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 늦은 밤에 공부하는 학생, 밤을 잊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프로였습니다. 아직 텔레비전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밤의 플랫폼에 나오는 ‘이사도라’라는 음악이 좋았습니다. 진행자의 따뜻한 목소리도 좋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영시의 다이얼에서는 ‘In the yeat 2525'라는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경쾌하면서 가슴이 뛰는 음악이었습니다. 이사도라가 애잔하다면 2525년에는 신비로웠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두 음악을 들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2525년’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Zager와 Evans가 1968년도에 발표한 음악입니다.
“2525년에 인류가 아직 살아있다면 알게 되겠지요. 3535에 인류는 더 이상 거짓과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고와 말과 행동이 그날 먹은 알약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4545년에는 이도 필요 없고, 눈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먹지도 않고,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5555년에는 팔도, 다리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기계다 다 할 것입니다. 6565년에는 남편도 아내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유리관에서 얻을 것입니다. 7510년에는 하느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인간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8510년에는 하느님께서 과거의 인간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9595년에도 인간이 계속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지구의 혜택을 인간이 모두 착취하고, 되돌려 준 것은 없습니다. 서기 10,000년이 되면 인간은 수십억의 눈물을 흘리겠지요. 인간의 지배는 끝나고,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지겠지요.”
2,500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사람이 암울한 미래를 노래했다면 먼 옛날 예언자는 희망의 미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살던 시대는 시련과 고난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정든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들을 높이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합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신다고 합니다. 높은 산은 깎여지고, 깊은 골짜기는 메워진다고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핸드폰의 기능을 잘 몰라도, 음악을 잘 못해도, 운동을 잘 못해도 우리는 모두 신앙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인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설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성탄’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서 존엄하고, 소중한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하느님의 선물로 이 세상에 왔지만, 하느님의 집인 천국으로 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생명의 문화를 알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좀 더 깊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처럼
눈먼 사람의
눈을 열 수는 없어도
눈뜬 사람으로서
눈먼 사람의
마음을 열 수는 있지
눈멀었기에
모자란 사람이라
거리두지 않고
눈멀었어도
온전한 사람으로
품음으로써
마음의 병의 치유와 구원, - 주님과의 만남; 기도와 믿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합니다. 마음의 병은 몸의 병과 직결됩니다. 마음의 병이 없는 건강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몸의 병이 많다는 것은 마음의 병이나 죄도 많다는 증거입니다. 마음 속 죄의 잔재는 마음의 병으로 몸의 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 1독서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또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똑같은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됨을 봅니다.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바뀌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현되는 내적치유와 구원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이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오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그대로 마음 병의 치유와 구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눈먼 현실로 인해 이들이 겪었을 내적 마음의 병고는 얼마나 심각했을까요?
여기서 잠시 동방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마음의 병에 대한 설명을 나누고 싶습니다. 몇 년전 나누었지만 오늘 말씀 묵상중 새롭게 생각났습니다.
1.가장 기본적인 병은 ‘무지ignorance’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모르는 병이 무지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가 진짜 마음의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2.‘망각forgetfullness’입니다. 마음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기도상태 안에 머무르는 것을 잊었습니다.
3.‘완고hardness’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닫혀 딱딱하고 단단히 굳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듣고 싶고 하느님과 일치를 갈망해도 마음을 뚫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에, 육체적 쾌락에, 재물(돈)에의 욕망에 사로잡힐 때 에너지는 소모되고 주의력은 분산됩니다. 하여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open’ 기도가 절실합니다.
4.‘눈멈blindness’입니다. 육신의 눈이 멀쩡해도 마음의 눈이 멀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이는 이와 반대로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의 눈은 활짝 열려 주님을 찾았습니다.
5.‘오염contamination’입니다. 마음이 세상 죄악이나 탐욕에 오염되어 순수를 잃을 때 이 또한 마음의 치명적 병이 됩니다.
6.‘무분별impludence’입니다. 마음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의 상실, 이 또한 치명적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이 여섯인듯 하나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무지라는 마음 병의 치유에 결정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마음의 병에서 자유로운 이들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병들이 잔존하는한 죄와 병도 만연되어 우리를 병들게 하고 건강도 약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치유할 것이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이 치유되면 몸 역시 치유되기 마련입니다.
답은 단 하나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과 관리가 백배 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건강하다 싶을 때 끊임없는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건강하든 아프든 한결같이 기도에 충실하는 것이 제일의 예방이자 처방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복음의 눈먼이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눈먼이의 간절한 믿음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표현됩니다. 동방 영성 또한 마음의 병의 치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언제 어디서나, 살아 있는 그날까지 숨쉬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바로 우리가 미사전례가 시작되면서 바치는 자비송입니다. 오늘 눈먼이들이 바치는 기도가 바로 자비송의 원형입니다. 병자이자 죄인인 우리 모두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이 자비송 하나일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겸손, 겸허, 겸비하게 하는, 자기 비움의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눈먼이들의 치유와 구원에 반드시 전제되는 바 이들의 믿음과 기도입니다. 다음 감동적인 아름다운 장면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하며 끝까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눈먼이들에게 주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그런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텃치tough’하시며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이르시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기적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기도와 믿음이 치유의 구원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께 믿음의 은총을 청하면서 한결같이 기도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치유되는 마음의 병에 육신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마음따라 가는 몸이 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몸따라 가는 마음이 되어 자유를 잃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병을 치유하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아름답고 힘이 되는 화답송 시편 구절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1.4). 아멘.
육체의 눈 고치셨으니 영혼도 쉽겠지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눈먼 두 사람을 보게 하신 예수님은 영혼의 눈도 뜨게 해주실 겁니다.
의료장비 하나 없이 말씀으로 육체의 눈 고치셨으니 영혼도 쉽겠지요.
치료비 안 받으셨고 믿느냐란 질문에 ‘예, 주님!’이라고만 했던 겁니다.
예수님 사랑 때문에 눈 고친 걸 자기들 잘나 고친 줄 알면 오산입니다.
은혜 입은 자들께 입조심 단단히 타일렀건만 자기자랑에 정신없었겠죠.
오늘도 예수님 때문에 살면서도 자기 멋에 빠진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나 선배들이 겸손보다 자만심 봉사보다 대접받기 좋아하죠.
예수님께 ‘나의 빛, 나의 구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고하면 되겠건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눈먼 사람 둘을 만나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눈 먼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셨고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하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요즘 같으면 의술이 발달하면서 눈먼 사람들의 경우 다시 눈을 뜨게 하는 개안 수술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러한 의술이 없는 가운데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을 바라는 경우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 먼 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렇게 기적을 바라며 청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눈 먼 이들에게 질문하신 것은 당신의 치유능력에 대한 믿음을 물어보신 것이 아니시라 그러한 당신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주실 하느님의 능하심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예전의 가요 중에 ‘말하는 대로’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래에서 보면 마지막 가사 이렇습니다. “지금 바로 내 마음속에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이 노래가사를 쓴 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분명히 ‘그대 믿는다면’이라는 가사가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는다고 했을 때 무엇을 믿느냐가 관건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헛된 욕망을 믿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해질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헛된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곁에 늘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말씀 하신대로,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생각대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수도 서울에 왔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강남구, 15층 ‘미세먼지 양호’ 덕분에 쾌청한 서울을 본다. 다시 고개를 드는 코로나 상황에, 검찰, 언론개혁의 과제를 놓고 큰 터널을 지나고 있다.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한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악폐가 검과 언과 유착되어 그 뿌리의 깊이가 커서 문제풀이가 쉽지 않다. 또 기다리면 이 상황도 쾌청해 질 것이다.
희망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있기에 이 세대가 악해도 구세주께 대한 신뢰로 희망하며 기다린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눈 먼이들의 눈을 뜨게하고 믿음의 사람이면 누구나 눈을 뜨고 올바름을 보게 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그분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문제를 풀어 주신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혜를 만나고 지혜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다.
역사는 순환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과거의 사건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교훈이며 역사는 가르쳐 준다. 대림절, 오실 주님을, 와 계신 주님과 그 사이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있다. ‘이 땅에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 눈을 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실현해 가자.’ 서울이 나라의 중심이다. 이곳은 대통령을 비롯해 지도자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국민을 사랑하고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의 지도자들이 많이 생겨나 이 나라가 지혜로 다스려지길 기도하겠다.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금요일>(2020. 12. 4. 금)(마태 9,27-31)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류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길’을 몰라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류를 구원하려고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어둠’은 죽음과 멸망을 뜻하고, ‘빛’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빛’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지상에서의 인생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그런데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또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나중’이란 없습니다. 세속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27-31).”
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을 보면, 눈먼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예수님께서 외면하시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어떤 집으로 들어가시자, 눈먼 사람 둘이 따라 들어가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에는 자기들의 눈을 고쳐 달라는 뜻도 들어 있고,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달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들의 말을, 몇 푼의 돈을 구걸하는 말로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런 일’이라는 말은, 눈을 고쳐 주는 일과 새로운 인생을 주는 일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너희는 믿느냐?” 라고 물으셨을까?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아셨을 것이고, 또 그들이 믿었으니까 간청했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믿느냐?” 라는 질문은, 그들의 믿음을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한 질문이고,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입니다. 믿음은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더욱 강해집니다.
만일에, 고백하지 않고 믿음을 감춘다면, 그 믿음은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라는 말씀은, 그들이 믿고 청한 것들을 당신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눈먼 사람 둘’을,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어떤 시련과 고난을 만나서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몸의 장애를 고쳐 주신 일이기도 하고, 새 인생을 살 기회를 주신 일이기도 하고, 구원의 길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눈을 고친 그들이 할 일은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위기를 만나서 눈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빛 가운데 하나이신 분이 아니라, ‘유일한 빛’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가, 즉 예수님을 거스르는 짓을 하다가 눈이 멀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3,7-12).”
바오로 사도가 엘리마스의 눈을 멀게 만든 일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생명의 빛을 보는 것을 막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깨달으라는, 또 그것을 깨달았다면 회개하라는 일종의 충격요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엘리마스의 시력을 영구히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한동안’만 못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 ‘한동안’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참회의 시간’으로 준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의 힘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가 믿느냐?"(마태 9,28)
눈 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자비를 청합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들어가기까지 하는 걸 보면 절박하기 그지없어 보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치유야 예수님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루실 수 있지만, 믿음은 그 치유를 끌어내는 진정성입니다.
"예, 주님!"(마태 9,28)
그들 역시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확고하게 답합니다. 그들이 그저 속는 셈 치고 한번 떠보기나 하려고 예수님께 따라붙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들으면서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능력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청하며 간절히 매달린 것이지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은 그들의 닫힌 눈에 손을 대시며,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지와 그들의 믿음이 만나 하느님의 모상이 회복되는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주님까지도 움직이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그날은 눈과 귀에 실제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이 치유되는 기쁨의 날이 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완고하고 우매한 백성이 회심하는 구원의 날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눈이 열려 하느님을 알아보고, 귀가 열려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체가 곧 구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이사 29,23)
이기심과 경계심으로 가리워진 눈은 이웃의 본모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작품이고 자녀이며 모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지요. 모르니 함부로 이용하고 착취하고 소외시킵니다. 그러기에 타인을 도구화하거나 무시하는 이들은 아직 눈멀고 귀먹은 사람입니다.
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볼 수 있는 사람인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이고 작품이며 모상이라 보는 이는 모든 존재를 경외심으로 대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시선을 가진 이들을 통해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납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어라."
이 말씀은 희망도 주시지만 한편으로 두려움도 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느 면을 바라보고 있고, 또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숙고해 보면 알 수 있지요. 믿는 대로 된다니, 우리의 믿음부터 성찰하고 정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주의나 자포자기, 비아냥과 냉소는 믿음을 오염시키고 불순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과마저 그 지경이 되어 버리게 만들겠지요. 반면 순수한 신뢰와 희망, 단순한 의탁과 신의에서 우러나는 믿음은 그 열매를 그대로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바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우리의 눈을 열어달라고 간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직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완고함을 녹여 주시어, 세상 모든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이는 만큼 우리는 서로의 고귀함을 알아보고 주님께 더 큰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이 소경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심을 믿으면 오류라는 눈멀음이 사라지고 곧 참된 빛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눈먼 이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얼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주시며 아무에게도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멀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 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루카 8,39)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 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자비와 치유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아픈 사람이 많습니다. 겉은 멀쩡해도 속으로 힘든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음의 어둠에 시달리며 신음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마음속 어둠은 어디서 생겨날까요? 죄입니다. 죄가 어둠을 만들어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고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마음에 자리를 틉니다. 거기에 또 다른 죄가 쌓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죄가 힘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만 마음속에 계속 떠오르고 내가 겪은 억울한 일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계속 생각하고 곱씹으며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을 지내다보면 마음은 어두워지고 표정은 굳어지고 입은 험해집니다. 죄의 수렁입니다. 남의 죄만 생각하며 세월을 보내면 결국 어둠에 떨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죄만 생각해서는 어둠에 파묻힐 뿐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구해내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우리는 어둠으로 눈먼 사람이 됩니다. 마음속 어둠은 주님의 빛으로 비추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죄의 어둠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려고 오십니다. 그분께 가까이 갑시다.
주님 손의 작품인 우리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눈먼 이들이 보게 되는 오늘 복음인데 이 복음을 읽으면서 나는 눈이 멀쩡할까 돌아봤습니다. 물론 이 성찰은 육신의 눈이 멀쩡한지에 대한 것은 아니지요. 저의 육신의 눈은 물론 나이 먹으면서 시력이 떨어진 상태지만 그 까짓것은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고 그저 불편한 정도이며,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 않고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진정 봐야 할 것을 보는 눈이 있는지, 믿음의 눈은 있는지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은 인간 예수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줄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예수가 한낱 인간이 아니고 주님이며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아보는 눈이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고 물으시자 "예, 주님"이라고 그들이 답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눈이 보게 한 것입니다.
저도 이 면에서는 눈이 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능력의 주님을 믿고, 실제로 제가 그 많은 일을 겁 없이 벌이는 것은 누차 말씀드렸듯이 이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성찰이랄까 반성을 한 것은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의 눈입니다. 인간을 불신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 말입니다.
이런 성찰을 한 이유는 오늘 이사야서의 마지막 구절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주님 손의 작품들인 인간.
이것은 이사야가 여러 번 얘기하는 것으로 지난 대림 1주일 독서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요.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 64,7)
인간에 대한 저의 눈은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을 때 <꼴 보기 싫어하는 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문제는 보기 싫어하는 눈이 아니라 보기 싫다고 보지 않는 눈, <보기를 포기한 눈>입니다. 보기 싫은 것은 인간으로서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문제는 싫다고 보지 않으려는 또는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도 문제이고 미성숙함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떻게 보고싶은 것만 보고 삽니까?
그런데 더 문제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꼴 보기 싫다고 하고, 꼴 보기 싫다며 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인간을 꼴 보기 싫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작품임을 알아보는 눈이 멀었거나 아무리 하느님 작품이어도 꼴 보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 이전에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인간을 사랑치 않는 것 이전에 하느님을 사랑치 않는 겁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인간은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의 작품임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내 중심으로 인간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형제를 꼴 보기 싫어하다가 하느님 손의 작품으로 보다가 하는 겁니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요? 그럴 것이라고 저를 믿어줘야겠지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말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고, 새옹지마처럼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이 내게 복이 될지 훗날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28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29절)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눈이 먼 것이 아니지만,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띄는 것만 볼 뿐입니다. 그리고는 그 것이 왜 내 눈 앞에 띄게 되었는지, 내 눈 앞에 띄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정작 본다고 하지만, 우리의 내일을 보지 못합니다. 어찌 보면 불안하기도 한 하루하루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믿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내일 어떤 일을 닥치더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깨우쳐 주시고, 지켜주시고, 채워주시라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우리의 내일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갑시다.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오늘 수도원 발코니에 나가 새벽 하늘을 보았습니다. 까만 하늘에 별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맑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라바날 수도원’에서 보았던 남녘 별자리 그대로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들이 등장합니다. 단순히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자비’라는 단어에 이 사람들의 염원과 희망이 들어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고 하시며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사실, 눈은 있지만 볼 수 없는 눈들이 많습니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집착해서 참으로 꼭 봐야 하는 것에는 눈을 감은 눈들이 참 많습니다. 참으로 볼 수 있는 눈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눈에는 진리만 보입니다. 난무하는 거짓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빛 자체이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 눈은 빛으로 밝혀져 잘 볼 수 있습니다. 대림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때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빛으로 오시는 주님께 시편 말씀으로 고백합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도다.”(시편 27,4).
온전한 눈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자< 마태, 8/27-31> 12/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눈이 아두운 사람은 선과 악을 구변모사고 밥돠 낮을 구별 못하니다 더 걱정되는 사람은 선한 것과 악을 구별 못하는 사람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악을 선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선을 악으로 보고 버리면 나라를 주님의 나라로 이끌지 모합니다. 눈이 빛과 어둠을 구별 못하면 눈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아둠 속을 해매입니다. 권력에 눈이 어두어지면 온갖 부정으로 권력을 쥐려하고, 돈에 눈이 어두어지며 돈만 보이고 사람의 정의나 의로움은 보지 못하고 명예에 눈이 어두어지면 자기인격이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 이름만 눈에 보입니다. 이들은 사람보다 권력을 앞세우고 불의인지 정의인지 구별못하고 거짖으로 명예를 얻고 자기 위신을 새우는 사람 눈이 먼사람입니다. 병이나 자연적으로 눈이 먼사람은 누을 뜰 수 있는 날이나 있지만 세속적 가치에 눈이 어두우면 평생 어두운 감옥에 갈 때 까지 장남으로 살게 됩니다. 자비로운 하님의 일입니다
주님이 눈이 먼 사람에게 “ 너희 믿는 대로 되어라.‘ 히시며 눈을 뜨게 하셧다 하십니다
어떤 아는 나이가 어려서부터 보아야할 것을 보지못 하고 어떤 이는 성헌 눈울 가지고 나이가 들러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적 눈먼이는 교육으 통하여 볼 을 보게되지만 어른이 되어 자기만 보고 자 하는 것을 보려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집나다 나이 들어 자기 지식의 범위만 진리고 그밖은 진리가 없다고 하며 편견을 가지고 살면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불행 중에 살게됩니다. 가난한 마음이 없으면 자기의 아집과 거친 마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부모 형제를 보지 않으려 하고 눈감고 나는 모르는사람이다 하고 마음이 거칠고 딱딱한 사람은 다른 이와 결합하는 것을 손해보는 것으로 알고 자기를 지키려는 사람은 하느남 나라에 살지 못하니 자유 평화기쁨 속에 살지 못합니다. 참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우리에게 양쪽 눈을 주신 하느님 한 쪽만 보지 말고 양쪽을 보라 하시었습니다. 각자의 눈은 넓고 깊고 높이 낮이 보데 되어 있는데 한쪽만 보면 진실의 존합을 이루이 못하니 짝는을 가지 사람고 같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바로 보지 못하면 바로 보는 것이 할 수없습니다.대화를 통하여 너와 나의 관계에서 서로 바라보는 경우가 생갑나다 교화안에 완짝눈을 가진 사람 눈먼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있는 모두가 오해애서 생가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믿음도 한 쪽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모습이 완전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이애기를 하고 싶으면 내 마음을 열고 겸손과 온유로 하느님을 대하면 하느님은 내존재의 전부로 알아듣고 하느님을 마음속에서 살고 있게 됩니다.
주님이 12살 성전에서 잃었을 때 한쪽 눈으로 길거리 시장터 어린이 노리터 찾았지만 없어 성전에 왔을 때 주님의 말씀은 눈먼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 왜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모르셨습니까.” 이는 우리가 사람의 일만 찾으며 눈먼 장님이 되지만 하느님의 일을 찾는 사람은 눈든 사람이 됩니다.
부모 형제를 알아보는 것도 한쪽만 보면 보아자 않지만 양쪽을 보면 알어보게 됩니다. 잘못한 일 잘한 알을 어울러 보면서 ㅈ신의 의무를 찾아 실천하여야 합니다. 인연에 있어 실수나 잘못은 지나가는 일이나 한맺은 인연은 세상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절대적 인연을 맺은 이들과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함승수 신부님
냉동 창고에서 일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 청년이 퇴근하기 전에 다음날 판매할 식자재를 냉동 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가 작업을 하는 사이 그만 냉동창고 문이 닫혀서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은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었는데 밤 늦은 시간이라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상태여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그렇게 냉동 창고 안에 갇혀버린 청년은 결국 다음 날 아침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누워있던 곳의 바닥에는 "너무 춥다. 나는 곧 얼어죽고 말 것이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청년을 발견했을 때에는 냉동창고의 전원 플러그가 빠져있는 상태여서 냉각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담당직원이 정기점검을 위해 플러그를 빼둔 것이지요. 결국 그 청년은 춥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자신이 정상작동하는 냉동고에 갇혀있다고 믿었기에 얼어죽은 것입니다. 좀 슬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일은 자신이 믿는대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믿음은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 안에 그 믿는 바를 실현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 먼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보통 끈질긴 사람이 아니었지요. 앞이 보이지 않는 불편한 몸으로 한참을 예수님 일행을 쫓아가더니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까지 쫓아들어가서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바랬던 '자비'가 평상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청하던 몇 푼의 돈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치유되어 시력을 되찾는 것을 넘어서서 영적으로 구원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을 굳게 믿으면 그 믿는 것을 당신이 실현시켜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 마음을 간직하며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밑바탕에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근원적인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감당하기 벅찬 고통과 시련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나를 가장 좋은길로 이끄실거야'라고 믿으면 우리가 믿는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 가톨릭 사목에는 노동사목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사회교리에 기반한 사목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노동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뉴스에도 종종 나오고 하다보니, 우리 안에서도 오해가 많습니다. 종교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가톨릭 외의 것이거나, 잘못된 가르침, 행동은 절대 아닙니다. 역대 교황님들도 사회교리에 기반하여 회칙을 반포하셨습니다. 레오 13세 교황님은 1891년 최초의 사회교리 회칙 `새로운 사태'를 통해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빈곤과 갈등의 원인과 해결책, 국민을 위한 국가의 의무 등을 제시했었습니다. 또한, 1931년 비오 11세 교황님은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을 맞아 그 성과를 평가하고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촉구한 `사십 주년'이란 회칙을 발표했고, 1963년 성 요한 23세 교황님은 냉전시대 인권보장과 세계평화 등에 관한 `지상의 평화'를 내놓았습니다. 이어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1967년 인류 평화를 위협하는 현대의 문제점들로 식민화, 빈부격차, 문화 간 충돌 등을 지적한 `민족의 발전', 198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기념하는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회칙을 각각 선보였다. 그리고 10년 뒤 1991년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는 `백 주년'이란 회칙을 다시 내놓았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2009년 `진리 안의 사랑'에서 교회의 사회교리적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노동계가 무조건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은 지금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어디로 가실까라는 문제의 답입니다. 2,00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분명 지금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그들 곁으로 가실 것입니다. 그때에도 그랬습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 특히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처음에는 반겼을 것입니다. 구세주라는 소식을 듣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구세주의 모습과 다르자, 기다리던 구세주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누구의 모습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눈 먼 이들의 눈에 손을 대시어 그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복음 안에서 이것은 영적인 눈을 뜨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손길을 받고 영적인 눈을 뜬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눈을 굳게 감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입니까? 아멘.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겨울의 맑고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마음의
시간이다.
올바른
믿음은 먼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한다.
빛으로
다가오시는
믿음의
빛이시다.
아픔이
있는 자리에서
믿음은 희망이
된다.
믿음의 회복이
치유의 기쁨이
된다.
믿음은 성숙을
향해 나가야 한다.
믿음의 목적은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은총이다.
믿음은
다시 보게되는
내면의 자유를
또한 새롭게
선사한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보게되는
삶의 새로운
의미이다.
소외되고
단절된
우리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우리의
참모습을 다시
보게된다.
보아야 할것을
제대로 볼 때
찬미와 기쁨으로
대립과 파괴
불안과 불편
왜곡과 분열은
믿음의 힘으로
해소될 것이다.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믿음은 뜨거운
내적체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다시 제대로
새롭게 보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