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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3대선시 특강
-2013년 12월 23일-25일, 동화사한문불전승가대학원-
信心銘
三朝 僧璨 大師
삼조
선불교의 관점에서 부처님의 법통을 정맥으로 계승한 가섭이 서천의 1조이고 2조는 아난존자다. 이법은 28조 달마스님으로 이어지는데 달마스님은 중국으로 와서 다시 동토의 초조(初祖)가 된다. 달마스님에게 법을 이어받은 2조 혜가스님 그리고 혜가스님에게 법을 이어받은 승찬스님은 3조가 된다. 신심명은 이 삼조 승찬대사의 저술이다.
승찬대사
승찬대사는 40여세가 될 때까지 불교의 불(佛)자도 모르고 살아온 나병환자다. 몸이 헐어버린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 나병환자로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별별 약을 다 썼고, 별별 도사를 다 만났다. 소문에 달마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2조 혜가스님이라는 도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람을 만나면 행여 도술로써 자신의 나병을 고쳐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감을 가지고 혜가스님을 찾아갔다.
그야말로 불교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오로지 병만 낫고자하는 마음으로 혜가스님을 찾아간 것이다.
“스님, 제가 이런 병을 앓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과거에 죄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저의 죄업을 참회시켜고 그 인연 그 덕으로 나병도 고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0여세가 된 나병을 앓고 있는 거사분은 2조 혜가스님을 찾아가 아마 이 정도의 말을 했을 것이다.
혜가스님은 달마스님에게 배운 바대로
“그대가 죄업이 무거워서 나병을 앓고 있다니 그 죄업을 한 번 나에게 보여주시오.”라고 하였다.
우리 어릴 때도 나병환자들에 대해서 동네아이들이 돌팔매질을 하고 밥을 얻으러 오면 구정물을 뿌려 쫓고 천대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야말로 이 거리 저 거리로 헤매면서 굶기도 하고 쉰 밥을 얻어먹고 배탈이 나기도 하는 처참한 상황과 수모를 40여세가 될 때까지 받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분은 ‘얼마나 심한 죄업이 있기에 이렇게 천대를 받는 병을 얻었는가’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몸속에 가득 있었다. 천 근 만 근 짓누르고 있던 죄업이라는 의식이 너무 확실해서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 보이듯 금방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혜가스님이 죄업을 해결해주겠다고 그 죄업을 내놓아보라는 말에 찾으려고 해도 찾으려고 해도 그 죄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앉았다 섰다 서성대면서 이리저리 아무리 찾아봐도 혼자 있을 때는 그토록 분명하던 죄업을 도저히 찾아서 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끙끙대면서 한 두 시간 이상을 죄업을 찾아 서성였을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죄업은 도저히 찾을 길이 없고 땀만 뻘뻘 날 뿐이었다.
“제가 죄업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도대체 어디 있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혜가스님에게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혜가스님은
“그래? 죄업이라고 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당신이 찾지 못하는 거야. 있으면 왜 못찾겠어? 죄업은 본래 없으니까 못찾는 것이야.”
라고 하였다. 이 한마디에 여름에 눈이 녹듯 홀연히 마음이 풀려버렸다.
그 사람은 견성성불이라고 하는 용어도 모를 때다.
마음이 열리고 시원해지는 정신적인 변화, 그런 감만 느꼈을 뿐이다.
견성이니 성불이니 깨달음이니 그런 용어를 갖다 붙일 줄도 몰랐을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견성오도를 하게 되어 심성을 본 것이다. 그 순간부터 몸도 가뿐해지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앓던 나병까지도 며칠 지나 슬슬 낫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자 시원하게 다 나았다.
“스님 제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이 거사가 혜가 스님에게 물었다.
“그래? 불. 법. 승 삼보를 의지하라.”
“제가 이렇게 마주 하고 있으니까 스님은 알 것 같은데 부처와 법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
불법승 삼보라는 말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사가 그렇게 물었다. 여기 앉은 분들보다 훨씬 불교에 대해서 어두웠던 사람이다. 그래서 혜가대사가
“마음이 부처고, 마음이 법이다. 자네와 내가 이렇게 마주 있으니까 내가 승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참마음이 승보다. 불보도 법보도 승보도 모든 것은 그대의 마음자리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가르쳤다. 바로 그 자리에서 거사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너는 스님들 중에서도 아주 빛나는 구슬이 될 것이야. 빛나는 구슬이 될 것이야.”
40이 될 때까지 세상사람들로부터 숱한 천대를 받던 나병환자인 사람에게 스님들 중에서도 아주 빛나는 구슬이 될 것이라고 혜가스님은 이야기 해주었다.
그래서 중 승(僧) 자 구슬 찬(璨)자 승찬이라고 하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신심명은 고급스러운 불교의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든지 한 글이 아니다. 그야말로 깨달음을 성취한 심성에서 그 깨달음에 대해 자기가 아는 대로 피력한 내용이다.
승찬스님이 깨닫기까지의 과정은 참 신기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만한 사연이기에 시간을 할애해서 들려드렸다.
그러한 승찬스님 과거 거사일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심명을 읽으면 훨씬 더 가슴에 잘 와 닿으리라고 본다.
혜가스님의 삶의 궤적이 신심명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니)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며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니
예부터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이 네 구절이 신심명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이라고 하였다. 신심명 전체의 심요한 내용을 푸는 열쇠다.
‘지극한 도’를 더 쉬운 표현으로 하면 ‘해탈감에 젖어 사는 삶’‘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불교적인 안목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삶은 어렵지 않다. 그냥 도라고 해도 좋은데 여긴 지극한 도라고 했다. ‘지극한 도’를 ‘행복’이라고 하든지 ‘영원한 행복’‘결코 변하지 않는 행복’이라고 번역을 해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인 삶, 가장 행복한 삶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싫어할 뿐이다.
이 중에서 누구는 나가라 한다면 간이고, 누구는 들어와라 한다면 택이다. 내 마음에 안드는 것은 간이고 내 마음에 드는 것은 택이다. 오직 그것을 싫어할 뿐이다.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마음을 싫어할 뿐이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 마음에 들고 안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고 마음에 안드는 것은 배척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괴롭다.
그러나 지금 마음에 들어서 선택해도 그 행복은 영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몇 시간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게 좋아서 선택해 놓은 사람도 머지않아 이혼송송을 하느니 마느니 황혼이혼을 하느니 마느니 한다.
우리가 하는 간택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 간택을 이제 좀 쉬자. 간택하는 것 좀 하지 말자.
유혐간택 할때의 혐은 싫어한다는 뜻이다.
2.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니라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이니라)
다만 증애하지 아니한다면 툭 터져서 명백하리라
다만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것이 없으면 툭 터져서 환할 것이다. 통연은 툭 터지다, 명백은 환할 것이다.
다만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것이 없으면 지극한 도, 가장 이상적인 삶, 영원히 변하지 않는 행복한 삶이 툭 터져서 시원하게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 불교 용어는 하나도 없다.오히려 도라고 하는 말은 도교용어다. 이 네 구절이 신심명의 전체적인 뜻을 다 함축하고 있다고 옛부터 말해왔다.
가능하면 우리가 이 네 구절을 큰소리로 천 번 만 번 읽고 써서 익숙하게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스님은 평생을 신심명만 쓰고 읽고 외우는 스님이 있다. 외워서 녹음해서 그 녹음을 귀에 꽂고 다닌다. 차에 있던지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그 스님은 계속 신심명을 쓴다. 대화하면서도 신심명을 쓰는 그 스님의 호도 이 신심명 안에 있다.
3.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하나니
(호리유차하면 천지현격하나니)
호리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나니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이라고 한 그 원칙에서 호리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 현격한다.
이상적인 삶 지극한 도와는 천지로 현격한 차이가 난다.
4.欲得現前이어든 莫存順逆하라
(욕득현전이어든 막존순역하라)
앞에 나타남을 얻고자 할진댄 순하고 거슬림을 두지말라
역시 같은 말이다. 지극한 도가 내 앞에 나타나게 하려면 순과 역을 두지마라. 순역은 증애 간택과 같은 말이다.
순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이고 역은 내 마음에 안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간택을 한다.
간택을 해도 결국은 또 실망을 하고 다시 간택을 해야 하는 삶을 우리가 늘 반복하고 있다.
5.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다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다)
어기고 순하는 것이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나니
어길 위(違) 따를 순(順) 위순도 순역이나 간택이나 증애와 같은 말이다. 말이 조금씩 달라서 그렇지 뜻은 같다.
우리는 평생 늘 갈등한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자녀들 은 이 학교를 보낼까 저 학교를 보낼까, 이것을 전공할까 저것을 전공할까 보통 사람의 삶은 갈등하다가 볼 일을 다 본다. 스님들이 방부를 들일 때도 이 절로 갈까, 저 절로 갈까, 출가할 때도 이 절로 갈까, 저 절로 갈까 심지어 요즈은 은사스님의 재산상황도 다 검색해서 출가한다는 말도 들었다. 우리 어릴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이 스님 상좌해라’ 하고 시키면 무턱대로 따랐다.
출가하기 전부터 속가에서 다 간택을 해서 스승을 정해서 들어온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크게 성공을 못한다.
어느 절의 어떤 스님들은 상좌를 오는 족족 받는 스님이 있었고 어떤 스님은 늘 간택을 해서 받는 스님이 있었다. 누구라고 실명을 대면 너무 재밌겠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다. 어기고 순하는 것이 서로 내마음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다투고 있다. 그것이 내 마음의 병이다.
6. 不識玄旨하면 徒勞念靜하리라
(불식현지하면 도로염정하리라)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갖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자 할 뿐이로다
여기부터는 공부께나 하는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는 소리다. 도로염정.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현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 마음의 실상이고 됨됨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서 한갓 수고롭게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 있다.
생각 아무리 고요하게 해봐도 생각은 금방 또 일어난다.
돌로 풀을 누르면 풀이 밖으로 안나오는 것 같지만 돌 밑에서는 죽지 않은 싹이 나온다. 이것을 ‘여석압초(如石壓草)’라고 한다. 마음 역시 눌러 놓아도 끊임없이 들고 일어난다. 일상생활에의 불만도 그렇고, 반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그렇고 마음속에서 다 싹이 트고 있다. 그런데 공부한다고 하는 입장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비워라, 없애라, 방하착하라, 놓아라 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마음을 조용하게 하는 것만이 공부인 줄로만 안다.
마음의 본래 됨됨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고 생각만 수고롭게 조용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마음이 조용해지지도 않고 조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이다.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마음이 일어난다. 응무소주의 응(應)자는 절대라는 뜻이다. 마음은 절대적으로 머무는 바가 없다. 끊임없이 흘러간다.
내가 이렇게 열강을 해도 ‘니는 열강해라 나는 집 생각할란다. 나는 친구생각 할란다’ 마음은 자기 멋대로 돌아다닌다. 그것이 무소주다.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이생기심이다.
그것이 마음의 본색인데 그것을 꾸짖을 필요는 없다. 안되는 것을 억지로 붙들어 매어서 조용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 빤한 것을 우리 이제 깨놓고 살자.
7.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다
(원동태허 하야 무흠무여다)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라고 남음이 없으니
우리 마음자리는 저 태허공과 같다. 절대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그대로 완벽하다.
필요한 만치 마음 작용을 일으켜서 원만하기가 저 허공과 같아서 조금도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우리 마음자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완전무결하다.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좋은 일 있으면 좋은 줄 알고 싫은 일이 있으면 싫은 줄 안다. 지금 이렇게 완벽한데 무엇이 부족한가.
지금 완전무결한 존재인데 무엇 하러 마음을 조용하게 한다, 붙들어 맨다, 눌러 내린다, 망상을 제거한다고 하는가. 그건 다 헛소리다.
불교는 무수한 헛소리로 산적해 있다. 무수한 헛소리로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이 불교다.
8. 良由取捨하야 所以不如라
(양유취사하야 소이불여라)
진실로 취사심을 말미암아서 그러한 까닭에 그와 같지 못함이라
진실로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미암아서. 취사 또한 상대적인 것이다. 위순, 간택, 순역, 취사 이런 말은 전부 마음에 드는 것은 취하고 마음에 안드는 것은 버리는 것을 말한다.
취사를 말미암아서 같지 못하다. 불여한 소이가 여기에 있다. 마음 생긴대로 되지 못한다, 지극한 도대로 되지 못한다.
9.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막축유연하고 물주공인하라)
유연도 좇지 말고 공인에도 머물지 말라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전부 인연의 굴레 속에 있다.그러니까 인연도 쫓아가지 말고 반대로 공에도 머물지 말라.
공은 너무 확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안 보인다. 그래서 공에다가 참을 인(忍)자를 붙여놓았다.
지극히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은 눈에 안 보인다. 지극히 싫어하는데 싫어하는 것도 안 보인다.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고통스러운 것도 눈에 안 보인다. 이것이 참을 인자의 뜻이다. 공도 그와 같다. 그래서 공인이다. 인자를 붙여서 공의 됨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공의 됨됨이 역시 사람의 어떤 감정이 밖으로 표현 안되고 참는 것과 같다.
유는 전부 인연으로 인한 것이다.
유를 쫓아가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
유도 공도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끝이 없다.
10.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일종평회하면 민연자진이라)
한가지로 바르게 마음에 품으면 민연히 사라져서 저절로 다하리라
한 가지로써 평등하게 마음을 품게 되면, 품을 회(懷)자다. 아주 평등하게 유나 공이나 전부 하나로써 취급해 버리면 민연자진이 된다.
민연(泯然)은 배가 물에 떠 있다가 물이 새서 그 배가 싹 가라앉는 것이다. 배가 있었는데 금방 수면에서 없어졌다. 그런 식으로 싹 사라져 버리는 것이 민연이다.
자진은 저절로 다 하는 것이다.
시비분별 취사선택 유무 유공 이런 것이 다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그런 차별 그런 분별 때문에 우리가 지도(至道)의 삶, 이상적인 삶이 되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하고 거기에 취사선택을 한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11.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지동귀지하면 지갱미동하나니)
움직이는 것을 그쳐서 그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그쳐 있던 것이 다시 더 움직이나니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는 대로 놔둬야 한다. 움직이는 것을 그친 데로 돌아가게 하려면 그친 것이 도리어 더욱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는 대로 놔둬라.
가만히 있는 것은 가만히 있는 대로 놔둬라.
움직이는 것을 왜 멈추려고 하느냐.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멈추려고 해봐야 더 요란스럽기만 하다.
불교에서 수행한답시고 얼마나 그 움직이는 것을 멈추려고 노력하는가.
지동귀지하야 지갱미동이라는 말은 그런 말이다.
신심명은 이렇게 다 된 소리만 한다. 초보자를 위한 말이나 중간과정의 말은 없다.
지극한 도의 자리, 완전한 행복의 자리에서 본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런 선문의 고준한 견해에 대해서 평소에 관심이 없던 사람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사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제일 쉬운 가르침이 신심명의 가르침이다.
참회해라, 죄업을 닦아야 된다, 업장을 녹여야 된다 하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그대로 완전하고, 현재 이대로 완벽한데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고보면 신심명의 이치가 제일 쉬운 것이다.
12.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유체양변이라 영지일종가)
오직 양변에 막힘이라 어찌 한 가지를 알 수 있겠는가
오직 양변에 막히니 어찌 일종을 알겠는가. 일종평회(一種平懷)도 있었지만, 하나라고 하는 것은 유다 공이다 하는 일종이 아니라 그 모두가 사라진 일종이다.
13.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일종불통하면 양처실공이니)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그 공능을 잃어버리나니
일종(一種)의 경지가 지도(至道)다. 지극한 도, 이상적인 삶이다. 그것이 통하지 못할 것 같으면 두 곳의 공(功)을 다 잃는다. 현상의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상대적인 것을 부정하면서도 또 긍정을 할 수 밖에 없다.
남녀평등을 이야기 하고 남녀를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또 분명히 남녀는 남녀대로 나뉘어져 있고 승속은 승속대로 나뉘어져 있다. 나뉘어져 있는 것과 평등한 자리가 융통 자재해야 한다. 거기에 걸리지 않아야 된다.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한다.상대적인 것을 다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처를 살려주는 것이다. 제대로 통했을 때만이 양처득공이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고 일종불통이면 양처실공이다.
14.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견유몰유요 종공배공이라)
유를 보내면 유에 빠지고 공을 쫓아가면 공을 등짐이라
유명한 말이다. 유를 보내려고 하면 유에 빠진다. 망상이 있다, 분별심이 있다, 죄업이 있다, 이렇게 뭔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보내려고 한다, 없애려고 한다. 그게 견유다. 예를 들어서 죄업이 있다고 죄업을 없애려고 하면 그것은 공연히 죄업을 떠올리는 것이다. 오히려 몰유가 되어서 죄업에 빠지게 된다. ‘나 저 사람 그만 생각해야지’‘저사람 그만 미워해야지’ 그 생각이 그 사람을 더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사랑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만 사랑해야지’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에 불을 자꾸 지피는 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견유몰유(遣有沒有)라는 말은 똑 떨어진 소리다.
있는 것을 보내려고 하면, 미워하는 마음을 보내려고 하면 미워하는 마음에 더 빠진다. 오히려 더 미워한다.
종공배공이다. 공을 쫓아간다 공 좋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쫓아간다면 오히려 공과는 등지는 일이다. 공을 놔둬야 된다. 공은 놔두고 유도 그냥 두는 것이 차라리 낫다.
사석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근래 내가 읽는 책이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 이라는 책이다. 요즘 나온 책인데 저자가 세계적인 의사다.
그가 말하기를 암병으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라 암을 치료하다가 치료약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다. 기가막힌 소리다. 그러한 사례들을 다 들어놓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방치하라. 중병일수록 방치하라. 어떤 중병도 거의 치료하다가 죽는다.
내 도반 하나도 내가 허리 수술했을 때 허리 수술해서 50프로 이상 마비된 것을 보고 자기는 절대 수술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병원에 와서 늘 나를 위문했다. 지금은 자기가 수술을 해서 허리가 기역자가 되어서 꼼짝을 못하고 있다. 치료하다가 다 죽고 치료하다가 다 몸을 다친다. 방치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 책은 결론을 그렇게 내렸다.
견유몰유 종공배공도 마찬가지다. 유다 공이다 하는 것을 그냥 방치해 버려라. 그러면 인생이 너무 쉽다.
지도무난이다. 유혐간택일 뿐이다. 오래 살려고 하고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다 간택이다. 그냥 내버려 둬라. 차라리 그대로 대접하라. 그런 말도 그 책엔 많이 있었다.
신심명과 같은 책이 퀘퀘묵은 천년이 넘은 고전이라고 해서 우리 현실과 거리가 멀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보다 앞서있다.
15.多言多慮면 轉不相應이다
(다언다려면 전불상응이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상응하지 못함이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하지 못한다. 설명이 많은 것, 약을 많이 먹고, 치료가 많으면 오히려 병을 더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전불상응이다. 오히려 병을 더하고 사람을 죽인다. 그런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16.絶言絶慮라야 無處不通이다
(절언절려라야 무처불통이다)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어느 곳이든지 통하지 못할 데가 없음이라
말을 끊고 생각을 끊어서 어느 곳이든지 통하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무처불통은 뒤부터 거꾸로 새기면 딱 맞다. 통하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방치하라. 그런데 이 신심명은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사는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다.
여기 이런 소리를 한다고 ‘세상에 아주 나쁜 놈이 있는데 그걸 그냥 방치하면 어떻게 되느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도 어릴 때 이런 것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수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상식이 통하는 자리에서 상식이 통하는 사람에게 하는 소리다. 차라리 방치하라.
17.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귀근득지요 수조실종이니)
근본에 돌아가서 뜻을 얻음이요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어버리나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그 취지를 얻게 된다. 비춤을 따라가면 그 종지를 잃어버린다. 수조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자꾸 밖을 향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밖을 향해서 내보내는 일이니까 비출 조(照)자를 썼다. 그러면 근본자리인 본심을 잃어버린다.
나는 가끔 ‘본심대로 살자’는 말을 잘 한다.
머리 굴리지 말고 본심대로 살자.
어떤 일을 처리할 때 뭔가 해결책이 잘 안 떠오르면 가만히 있으면서 본심대로만 해결하면 해결이 제일 잘 된다. 이리 해결할까, 저리 해결할까 요즘 표현으로 머리 굴리다 보니 엉뚱한 데로 된다.
그냥 제자리에 있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해결책이다.
귀근득지 수요실조 이런 구절은 우리 생활의 주옥같은 교훈이다.
18. 須臾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수유반조하면 승각전공이라)
짧은 시간에 반조하면 앞 경계가 공한 것보다 수승하리라
수유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돌이켜서 내 자신을 반조해 보면 앞의 경계가 텅 비어서 공한 것보다도 오히려 수승하다. 승각하다는 것은 수승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앞의 경계를 공하게 보려고 한다. 그냥 내 마음만 잘 돌이켜 볼 일이지 바깥 경계를 공하게 보든지 있는 대로 보든지 그러한 경계에 너무 끄달리지 말라는 말이다.
19. 前空轉變은 皆由妄見이다
(전공전변은 개유망견이다)
앞의 경계가 공하여 변해지는 것은 다 망견을 말미암은 것이니
앞의 경계가 공한 것으로 변하는 것. 공부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 나에게도 와서 ‘텅 빈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기도하다도, 또는 공부하다가도 ‘내 자신마저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한다.
느꼈으면 됐지 와서 왜 묻는가?
설사 내 자신마저도 없는 것처럼 느꼈다고 해도 그것은 다 망령된 소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저렇게 있는 것을 그냥 있게 놔두지 뭐하려고 공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보는 사람이 저 혼자 돈 것이다. 저 혼자 돌아도 산은 산대로 있다. 그야말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것을 텅비어서 없는 것처럼 본다면 자기 혼자 돈 것이다. 망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제대로 소화를 해야된다.
20.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니라
(불용구진이요 유수식견이니라)
진 구함을 쓰지 말것이요 오직 모름지기 소견을 쉴 지니라
진을 구하지 말라. 진이라고 하는 것, 진리를 구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는가? 오직 모름지기 견해를 쉬어라.
옳다느니 그르다니 하는 그런 소견 좀 쉬어버려라.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망상이고 그런 것을 왜 분별하느냐, 진리다 망상이다 하는 식견, 소견만 쉬어버리면 제일이다. 방하착하라. 쉬어버려라.
도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런 소리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깨닫는다.
이런 자리가 그야말로 깨달음이 참깨 쏟아지듯이 쏟아지는 자리다.
우리가 평소에 크게 도에 관심이 적어서 그렇지 관심만 많다면 이런 한 페이지 한 구절 속에서 몇 번이고 깨달을 수가 있다.
유수식견하라. 오직 모름지기 견해를 쉬라. 참 좋은 말이다.
21. 二見不住하야 愼莫追尋하라
(이견부주하야 신막추심하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아니해서 삼가히 추심하지 말라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너다 나다 하는 분별심, 그것이 이견이다.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아니하고 삼가히 추심도 하지말라. ‘추심한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것 저것 찾는 것이다. 이것저것 찾지도 말라.
22. 纔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
(재유시비하면 분연실심이니라)
겨우 옳고 그른 것이 있기 시작하면 분연히 마음을 잃어버리리라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있을 것 같으면 분연히 마음을 잃어버린다. 아주 복잡해서 본심을 잃어버린다. 분연(紛然)히라는 말은 복잡하다는 말이다.
시비에 한참 휘말리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왜 이러는가’ 싶기도 하고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하는 분별도 그만 잊어버린다.
지금 우리 나라 정치판이 딱 그런 상황이 되었다. 분연실심이 되어서 본심을 전혀 다 잃어버리고 있다.
23. 二由一有니 一亦莫守다
(이유일유니 일역막수다)
둘은 하나를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하나도 또한 지키지 말라
두 가지 견해 여야도 좋고 보수와 진보도 좋고 그 두 가지는 하나를 말미암아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마저도 또한 지키지 말라. 일역막수하라.
24.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
(일심불생하면 만법무구니라)
한 마음이 생하지 아니하면 만법에 허물이 없음이니라
옳은 마음이든 그른 마음이든 좋은 마음이든 나쁜 마음이든 어떤 마음 한 마음도 날 것 같지 않으면 만법이 아무 허물이 없다.
저건 소나무인데 이건 왜 감나무냐? 하고 시비할 거리가 아니다. 소나무는 소나무고 감나무는 감나무지 시비하는 것이 미친 것이다.
사실은 그와 같다.
사람이 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 전부 그렇다.
일심불생하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현재 이 세상 이대로 퍼펙트하다. 아무 것도 손댈 것이 없다. 우리 불자들은 그렇게 알고 바로 잡을 일은 또 바로잡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바로 잡으면 아주 쉽다. 잘 바로 잡아진다. 또 바로 잡히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 그것도 옳은데 뭐’ 하고 바로 잡아지지 않아도 괜찮고 내 마음이 정하는 대로 바로잡아 질 수도 있다. 바로 잡아진다고 해봐야 내 마음에 맞게하는 것일 뿐, 절대적으로 바로잡아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개 내 마음에 안맞다고 해서 틀렸다고 본다.
25.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무구무법이요 불생불심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음이요 생멸도 없고 마음도 없음이라
아무 잘못됨이 없을 것 같으면 무슨 옳은 법, 그른 법이 있을 수가 없다.일심불생할 것 같으면 마음도 아니다.
한 마음이 나야 망상이라고 하든 진심이라고 하든 하는 것이지 그 한마음이 나지 않는데 무슨 마음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불생이면 불심이다. 이런 데 대해서 고민을 하고 천착을 하고 토론도 많이 한 사람은 이런 한 마디에서 툭 터진다. 불생이면 불심이야. 안 나면 마음도 아니다.
그야말로 고무토막이고 거북털이요 토끼뿔이다.
거북털을 가지고 시비하는 사람은 없다. 본래 없는 것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다. 안 나면 마음도 없다.
26. 能隨境滅하고 境逐能沈이라
(능수경멸하고 경축능침이라)
능은 경을 따라서 멸하고 경은 능을 쫓아서 잠기어서
능(能)은 주관이고 경(境)은 객관이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서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서 잠긴다. 소멸과 잠긴다는 것은 같은 뜻이다.
우리는 항상 주관과 객관을 나눠놓고 시비 분별하여 옳다 그르다 하지만 쌍방에 다 허물이 있다. 객관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인 나도 허물이 있다.
그러니 주관은 객관을 따라서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쫓아서 없어진다.
27. 境由能境이요 能由境能이니
(경유능경이요 능유경능이니)
경은 능을 말미암은 경계요 능은 경계를 말미암은 능이니
경계는 주관을 말미암은 경계다. 너는 나 때문에 너고, 나는 너 때문에 나다. 똑떨어지는 소리다. 변명할 수가 없다. 나는 너 때문에 나고 너는 나 때문에 너다.
너라는 경계는 나라는 능을 말미암은 경계고, 나라는 능은 너라고 하는 경계 때문에 나라고 하는 능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이것을 갈대묶음 두 단과 같다고 표현했다. 갈대단 두 단을 서로 버티어서 의지하게 세워두었는데 하나가 넘어지면 같이 넘어진다. 그러면 두 단은 이미 다 없다. 주관도 객관도 그와 같다.
불교는 깨달은 분들의 말씀이기 때문에 한 구절 한 말씀의 무게가 천근과도 같다. 불자들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워낙 많은 가르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말씀이 크게 귀한 줄 모른다.
28. 欲知兩段인댄 元是一空이니라
(욕지양단인댄 원시일공이니라)
양단을 알고자 할 진댄 원래 이 하나의 공이니라
주관과 객관 그 양단을 알고자 한다면 본래 하나의 공이다. 너도 공이요 나도 공이다.
땅에 두개의 갈대단을 세웠다가 하나를 떼 버리면 둘 다 다 자빠진다. 없어져 버린다. 그와 같이 본래 하나의 공이다.
29. 一空同兩하야 齊含萬象이니라
(일공동양하야 제함만상이니라)
하나의 공이 둘과 같아서 만상을 가지런히 포함해서
하나의 공이 되면 두 가지 다 생명을 불어넣을 수가 있다. 만상을 가지런히 다 함유하게 된다. 한 가족으로 치면 그 가족이 다 같이 옳은 공동체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옳은 것도 살고 그른 것도 살고 다 살아난다.
우리는 늘 나만 살고 상대는 부정한다. 또는 상대가 살면 나를 부정한다. 나에게는 당신이 없고, 당신에게는 내가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딱 정해 놓고 사니까 그렇게 서로 부정하며 살았고 제함만상이 안되었다. 만상을 다 살릴 수 있는 소식이 안나왔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아주 작은 세포에서부터 태양보다 몇만 배 더 큰 별들이 있다.
세포에서부터 그런 크기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합성체다.
합성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30. 不見精麤 寧有偏黨
(불견정추 영유편당)
정과 추를 보지 아니할 지니 어찌 편당이 있겠는가
정과 추를 보지 아니하거니 어찌 편당이 있을 소냐.
정은 정미로울 정(精), 추는 거칠 추(麤)자다. 음식을 표현할 때 정추라는 말을 잘 쓴다. 한 상에 음식 다섯가지가 있으면 마음에 드는 음식이 있고 거친 음식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안보면 치우칠 까닭이 없다.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다 먹는다.
정과 추가 없는데 어떻게 편식을 하는가. 골고루 먹는다.
큰방에서 반찬 그릇을 돌리다 보면 어쩌다 밑에 있으면 맛있는 건 다 비워서 빈 그릇만 나오고 맛없는 것만 손도 안댄 체 넘어올 때가 있다. 거기에 정추가 너무 역력히 살아있다.
따지고보면 하나도 그게 정하고 추하고 할 것이 없다.
옛날에는 쌀이 귀해서 잡곡을 먹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잡곡이 쌀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가난하고 없어서 잡곡을 먹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잡곡이 쌀밥보다 훨씬 좋은 성분을 가졌다. 그래서 지금은 쌀을 팔아서 잡곡을 사먹는다.
그러니까 ‘이것이다’ 라고 가치관을 설정해놓고 고집을 세우고 하는 것은 참 문제가 많다.
끊임없이 되돌아 봐야 한다.
이런 말들을 방에도 붙여놓고 식당에도 붙여놓고, 부엌에도 붙여놓고 늘 오고가면서 한 구절 외우기도 하고 뜻ㅇ르 맞춰 보기도 할 필요가 있는 주옥같은 가르침이다.
내가 서두에서 승찬스님의 삶을 말했다. 그 삶을 상기해 볼 때 이 한 구절 한 구절이 피눈물 나는 내용들이다.
승찬스님 당신은 얼마나 자기 몸을 싫어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다 저렇게 사람노릇을 하는데 과거시험도 보고 벼슬도 하고 떳떳하게 여러 사람 앞에 가서 사람으로서 자랑도 하고 사는데 자기도 그럴 만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이라고 하는 병에 걸려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니 얼마나 자기를 증오했겠는가. 그리고 건강한 다른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40여년의 세월속에 부러워함과 증오함이 끊임없이 소용돌이 쳤을 것이고 갈등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신심명에는 정추, 간택, 순역, 위순 등등 상대적인 용어들이 깨 쏟아지듯이 많이 쏟아진다. 어느 경을 보아도 상대적인 언어가 이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신심명은 그 많은 상대적인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이러한 상대적인 것을 다 조화를 시켜라, 중화를 시키라고 한다. 그것이 중도다. 그것이 바람직한 삶이고 지극한 도다 라고 하는 내용이다.
신심명을 읽을 때 나는 승찬스님의 40년, 삶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인생을 떠올린다. 이런 구절 하나하나에도 ‘이런 말을 쓸 때 자신의 인생과 연관시켜서 썼을 거 아닌가. 아무리 도통을 했다 하더라도 이런 말들이 다 인생에서 나온 것이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31. 大道體寬하여 無易無難이라
(대도체관하여 무이무난이라)
대도는 그 체가 너그러워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건마는
큰 도는 체가 너그러워서 한계가 없이 툭 터졌다. 경계가 다 무너져버렸다. 그러니 쉽다 할 것도 없고 어렵다 할 것도 없다. 뭔가를 해야지 쉽고 어렵다. 할 것이 없는데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할 것이 없는 것이 대도다.
32. 小見狐疑하여 轉急轉遲로다
(소견호의하여 전급전지로다)
작은 견해는 의심하고 의심해서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작은 소견을 가진 사람은 의심하고 의심해서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 진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차를 몰고 가다가 큰길이 막혔다고 조금이라도 빨리 갈까 해서 샛길로 가면 오히려 길이 더 막힌다.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소견호의하야 전급전지라는 말이 우리 일상생활에도 딱 맞는 이야기다. 그럴 때는 본심이 필요하다.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조금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다 참고 있는데 자기도 참으면 금방 길이 술술 풀려서 빠져나가게 되어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수록 세 배 네 배 늦어진다. 인생사도 돈벌이도 급하게 갈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출세길도 마차가지다. 소임 한 번 맡았으면 진득하게 미련스럽게 그냥 하고 있다보면 금방 승진이 되는 것이다.
사회나 사찰이나 어느 분야나 사람이 사는 일은 똑같다.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한다고 빨라지지 않는다.
신심명은 주옥같은 가르침이다. 오늘 보니 더 좋다.
우리는 불교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불교라고 하는 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헤집고 그 속에 내가 가질 것이 무엇이 있는가 궁금해 하고 알아보려고 한다면 그 속에는 어마어마한 가르침이 있다. 신심명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잖은가.
33. 執之失度라 必入邪路여
(집지실도라 필입사로여)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감이여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버린다. 빨리가려고 집착하면 도를 잃어버린다.
필입사로다. 반드시 삿된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어디 운전하는 데만 해당이 되는 말이겠는가. 출세가도도 마찬가지고 돈벌이도 마찬가지고 모든 부분에 다 해당되는 말이다.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버린다.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돈 많이 벌려고 하면 결국 위험한 장사를 하게 되고 위험한 장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 쇠고랑을 차게되어 있다.
삿된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집착하기 때문이다. 집착하니까 법도를 잃어버리고 순리를 잃어버린다.
집지실도 필입사로라. 이 한 구절만으로도 십만원 회비를 낸 것을 충분히 건졌다. 참 대단한 말씀이다.
34. 放之自然이라 體無去住라
(방지자연이라 체무거주라)
놓아버리면 저절로 그러함이니 자체에 가고 머뭄이 없음이라
그래 좀 기다려 보자 하고 놓아버리면 저절로 그러하다. 여기 자연은 자연현상의 자연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이다.저절로 그렇게 돌아간다. 저절로 그렇게 되니 우리 심체는 가거나 머묾이 없다.
35.任性合道요 逍遙絶惱라
(임성합도요 소요절뇌라)
성품에 맡기면 도에 합해서 소요 자재히 번거로움을 끊고
성품에 맞게 놀면 도에 계합하고 소요자재하면 괴로움이 끊어진다. 뇌(惱)는 괴롭다, 신경쓰인다 라는 뜻이다. 번뇌망상이을 말한다. 그런 것이 소요 자재해서 다 끊어져 버린다. 성품에 맞게 본심에 맞게 본심대로 살면 도에 계합한다. 임성합도다.
36. 繫念乖眞하고 昏沈不好니라
(계념괴진하고 혼침불호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진실을 어기나니 혼침은 좋지 아니함이라
기도를 한다, 화두를 든다, 망상을 제거하려고 한다, 업장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런 것이 전부 계념이다. 매일 계(繫)자 생각 념(念)자 생각에 얽매이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어기게 된다. 계념은 이 생각 저 생각하는 것이니까 망상을 많이 하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혼침이다.
혼침 역시 좋지 않다. 괴진은 진을 어기는 것, 진짜 삶을 어기는 것이다. 생각 많이 하는 것이 크게 좋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혼침도 좋지 않다.
37. 不好아 勞神커든 何用疎親이라
(불호아 노신커든 하용소친이라)
좋지 아니한 것과 정신을 수고롭히는 것에 어찌 멀고 가까움을 사용하겠는가
좋지 아니한 혼침과 정신을 수고롭히게 하는 괴념 그 두 가지에 대해서 어찌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 할 게 있느냐. 다 나쁘다. 다 본래 도에는 안 맞는 것이다.
38. 欲趣一乘인댄 勿惡六塵하라
(욕취일승인댄 몰오육진하라)
일승에 나아가고자 할진댄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일승에 나아가고자 할진댄 육진을 싫어하지 마라.
색성향미촉법 육진 경계는 도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불교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유치원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반야심경만 하더라도 무안이비설신의라고 한다. 멀쩡히 눈이 있는데도 눈이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다고 한다. 색성향미촉법이 멀쩡히 있는데도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공갈을 친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렇게 공갈을 쳐서 그 경계를 뛰어 넘게 해야 한다.
일불승자리는 최고의 자리 궁극의 경지다. 우리 인간이 본래로 가지고 있는 궁극적 차원, 우리가 노력하고 노력해서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궁극적 차원이다. 지극한 도의 차원이라고 해도 좋다.
육진경계를 싫어하지 마라. 무안이비설신의 라는 말은 어린아이에게 하는 소리다. 무색성향미촉법도 다 어린아이들에게 하는 소리다. 육진을 싫어하지 말고 그냥 두고보라.왜 멀쩡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하면서 무색성향미촉법 무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가.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면 반야심경은 뭘로 보는가?
일승이전, 중간과정의 가르침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39. 六塵不惡하면 還同正覺이라
(육진불오하면 환동정각이라)
육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또한 정각과 같음이라
색성향미촉법 육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 있으면 좋다고 하고, 싫은 것이 있으면 싫다고 하는 것이다. 육진을 싫어하지 않을 것 같으면 또한 정각과 같다.
부처님이 태자로서 출가해서 6년 고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부다가야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 정각을 이뤘다. 그 정각이 불교의 출발이다. 육진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 그러한 정각과 같다.
우리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가지고 시시비비하느라고 정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밑에 아주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40. 智者는 無爲어늘 愚人自縛이라
(지자는 무위어늘 우인자박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조작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묶이도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 하는 일이 없다.그냥 두고 본다. 산이 푸르면 푸르고 봄이 되면 봄이 오는가 보다 하고, 여름이 되면 여름이 왔는가 보다 한다. 거기에 아무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무위다. 지자는 그렇게 두고 본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거기에 속박된다.
41. 法無異法 妄自愛着이로다
(법무이법 망자애착이로다)
법에는 이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해서
법에는 그른 법이 없다. 아무것도 이법이 없다.
밤나무와 감나무가 옳다 그르다 싸워봐야 무슨 해결이 나는가.
밤나무는 밤나무대로 훌륭하고 감나무는 감나무대로 다 장기가 있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도 서로 다를지언정 틀린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을 쓰는데 참 좋은 발견이다.
다르다고 해서 틀리다고 배척해서는 안된다.
다를 뿐 하나가 옳고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다.
법에는 다른 법이 없다. 그런데 내가 기준으로 삼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원동태허하여 무흠무여한 툭터진 삶, 지도무난한 지극한 도, 가장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42. 將心用心하니 豈非大錯가
(장심용심하니 기비대착가)
마음을 가져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될텐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려고 하니 어찌 크게 착각한 것이 아닌가.
43. 迷生寂亂이요 悟無好惡라
(미생적란이요 오무호오라)
미혹하면 고요하고 어지러움이 생기며 깨달음에는 호와 오가 없나니
미혹하면, 그런 도리를 모르면 고요한 것과, 또 반대로 어지러운 것이 생긴다.
깨달음에는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이 없다.
44.一切二邊은 良由斟酌이라
(일체이변은 양유짐작이라)
일체이변에 진실로 짐작함을 말미암음이로다
일체이변은 모든 상대적인 것을 말한다. 모든 상대적인 것은 진실로 짐작을 말미암은 것이다. 지레짐작 하여 자기 속에서 머리를 굴려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다.
감나무가 밤나무를 보고 ‘너는 왜 감이 안열렸느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이치가 툭 터져서 그대로 나오면 말할 것도 없지만, 사량분별로이라도 이런 구절을 되뇌이고 ‘그래 맞아’ 하고 무릎을 치고 혼자 읊조리기도 한다면, 이러한 이치가 우리에게 훈습이 된다. 일상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일체이변은 양유짐작이다.
사사건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라고 하는 것, 내가 그러니 저쪽 상대도 나를 그르다고 한다. 그런 것은 전부 지레짐작으로 요량하는 것이다. 진실로 짐작을 말미암은 것이다.
45.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
(몽환공화를 하로파착가)
꿈이요 환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
‘몽환공화(夢幻空華) 하로파착(何勞把捉) 득실시비(得失是非) 일시방각(一時放却)’ 은 내가 신심명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다.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인 것을/어찌하여 수고로이 잡으려는가/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다 놓아버려라’ 라고 번역도 내가 아주 잘해 놓았다.
하도 좋아하다 보니까 이 구절을 여러가지로 번역을 해 봤다.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인 것을, 공화는 허공에 피는 것이라고도 하고, 헛꽃이라고도 한다.
어찌하야 수고로이 잡으려고 하는가
일체가 다 그렇다.
46.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득실시비를 일시방각하라)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른 것을 일시에 놔버려라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 다 놓아버려라 일시에 방각하라.
속이 시원하다. 그동안 이리 저리 시시비비에 얽히고 섥혀서 속 썩히고 골치 썩히고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지금도 누구든지 그런 것에 많이 걸려있다.
세월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 잊고 살아서 그렇지 생각하면 또다시 머리가 띵해지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출가한 사람이나 재가인 사람이나 그 나름대로 골치썩히는 일들은 다 있기 마련이다. 그 득실시비를 일시에 방각하라.
신심명을 지은 승찬스님에게 견주어서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인생은 꿈이요 환영이요 헛꽃인데 번듯한 내가, 이렇게 지식도 있고 머리도 있고, 똑똑하고 총명한데 문둥병을 걸려서 이 고생을 한다고 하는 집착, 뭔가 출세해서 사람다워 보이겠다고 하는 애착을 가지고 아등바등 목을 매고 살았는가, 다 놓아버리라’ 라고 하는 것이다. 찾아보니 없는 것을 가지고 목을 매고 살았는데 저절로 놓아졌다. 놓은 것이 아니고 저절로 놓아지자 병도 다 낫고 속도 시원하고 마음이 환해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을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고 하더라.
성불하고 나서 비로소 성불인줄 안 사람이 승찬스님과 육조대사다.
육조 혜능대사도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는 마음이 환히 밝아졌는데 무식한 나뭇꾼이 그것이 성불인지 몰랐다. 나중에 스님들이 “그거 성불이야. 그게 견성이야” 하더란 것이다. 이렇게 횡재를 하는 소식이 있다.
47. 眼若不睡하면 諸夢自除요
(안약불수하면 제몽자제요)
눈이 만약 잠들지 아니하면 모든 꿈이 저절로 제해지며
만약에 잠을 자지 아니하면 모든 꿈이 스스로 제해진다.
잠을 자야 꿈을 꾼다. ‘꿈을 꿔야 님을 본다’는 말도 있다.잠을 안자는데 무슨 꿈을 꾸겠는가. 잠을 안자면 꿈이 저절로 제해진다.
48. 心若不異하면 萬法一如다
(심약불이하면 만법일여다)
마음이 만약 달라지지 아니하면 만법이 일여하니라
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마음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으면, 만법이 일여다. 다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차별심, 분별심, 옳다 그르다, 승이다 속이다 하는 분별심이다. 그것이 없을 것 같으면 그대로가 한결같다.천명 만명 다 모여도 그대로 한결같다.
여기 팔공산의 나무는 수억만 그루가 있는데 하나도 서로 옳다 그르다 싸우지 않는다.그대로 일여다. 만 그루의 나무가 있어도 그대로 한결 같다.똑같이 자기 역량대로 산다.
법성게에도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라’고 했다. ‘우리 삶은 본래로 현재 이대로 무궁무진한 보물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데 그 사람의 각자 그릇에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사유를 많이 해야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툭 터진 성인의 말씀을 사량분별이나 망상으로라도 자꾸 접하는 길 밖에 없다. 우리의 한계가 그것이다. 그러다가 재수 있으면 툭 터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깨달음을 기약하고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좋아하다 보면 툭터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49.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이라
(일여체현하야 올이망연이라)
일여한 체는 깊고 깊어서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일여한 소식, 한결같은 소식, 그 낱낱 자체로서 아주 현묘하다. 사람사람이 그대로 부처다 라는 말이다. 어느 누구 하나 쭉정이가 없다. 전부 알짜다.
체현이다. 그 자체로서 현묘하다.
올이망연이다. 오뚝해서 아무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이 인연을 다 잊어버린다. 일여체현하면 그렇게 된다.
50. 萬法齊觀에 歸復自然이라
(만법제관에 귀복자연이라)
만법을 가지런히 봄에 저절로 그러함에 돌아감이니라
만법에 다 생명을 불어넣어서 어느 것 하나도 부정하지 않고 가지런히 관찰한다. 똑같은 가치로서 관찰한다. 그러면 저절로 그러함에 돌아간다.
자연이라는 말은 저절로 그러함이라는 뜻이다. 자연현상이라고 해도 좋은 표현이지만, 본래 불교에서는 자연이라는 말을 ‘저절로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쓴다. 저절로 그러함에 돌아간다.
51. 泯其所以 不可方比라
(민기소이 불가방비라)
그 소이를 없애면 가히 견주어 비할 데가 없음이라
그 소이, 그 까닭을 없애버리면 비교할 것이 없다.
방비라는 말은 비교한다는 뜻이다.
52.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지동무동이요 동지무지니)
그치면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면 그침이 없나니
움직이는 것을 그쳐서 움직임이 없게 하면 동지무지다. 그침을 움직여 버리면 그침이 없다. 앉아있는 사람을 서게 하면 앉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53. 兩旣不成이니 一何有爾리요
(양기불성이니 일하유이리요)
두 가지가 이미 이루어지지 않음이라 하난들 어찌 있을 것인가
두 가지가 이미 성립되지 않거니 하나가 어찌 있겠는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것은 두 개의 짚단을 서로 의지해서 세워놓은 것과 같다. 한 단을 떼버리면 나머지 한 단도 저절로 무너진다. 일하유이,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모든 상대적인 것, 서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라고 하는 그런 관계가 다 사라진다. 요는 그런 것이 문제다.
그야말로 승찬스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대육신이 멀쩡한 사람과 사대육신이 나병으로 다 죽어가는 삶과의 비교도 여기에 해당된다.
54. 究竟이요窮極이라 不存軌則이라
(구경이요 궁극이라 부존궤칙이라)
구경이요 궁극이라 궤칙을 두지 아니함이여
구경자리나 궁극자리에는 어떤 궤칙도 없다. 구경은 최고가는 자리고 마지막자리며 궁극의 자리다. 거기에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것이 하나도 해당될 수 없다.
55. 契心平等하야 所作俱息이니라
(계심평등하야 소작구식이니라)
마음이 평등한데 계합하면 짓는 바가 다 쉬리라
마음이 평등한 것에 계합할 것 같으면 짓는 바가 함께 다 쉬게 될 것이다.
이런 주옥같은 구절들을 잘 음미해서 자기 나름대로 소화를 해서 우리 현실생활과 연관시킨다면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한시간 법문거리는 충분하다.
잘 소화를 해서 여기저기 적용을 시키는 것을 자꾸 해보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물에 딸려오듯이 자꾸 딸려온다.
56.狐疑淨盡하면 正信調直이다
(호의정진하면 정신조직이다)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이 깨끗이 다하면 바른 믿음이 조화롭고 곧음이라
의심이 깨끗하게 다 해버리면 바른 믿음이 고르고 곧을 것이다. 의심 때문에 바른 믿음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57. 一切不留라 無可記憶하면
(일체불류라 무가기억하면)
일체 머물지 아니해서 가히 기억함이 없으면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면 가히 기억할 것도 없다. 그러니 마음속에서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뭘 지워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 옳으니까 굳이 마음에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남겨 놓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58.虛明自照하면 不勞心力이라
(허명자조하면 불노심력이라)
텅 비어 밝고 스스로 비춰서 마음의 힘을 수고롭히지 아니함이라
텅 비고 텅 비면 밝다. 밝으면 저절로 환하게 비춘다. 우리 마음속에 뭔가 꽉 차 있으니까 밝지 못하고, 밝지 못하고 어두우니까 이치를 비춰 볼 줄 모른다.
그 반대가 허명자조다. 텅 비면 밝다. 밝으면 저절로 비춰보게 되어 있다.
마음 속에 이해관계가 꽉 차 있으니까. ‘이것은 나의 이해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한다. 그 때부터는 일의 해결이 벌써 틀어지기 시작한다. 전부 자기계산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을 보면 전부 자기 계산을 딱 해놓고 그 계산에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에 맞춰서 일을 처리한다.
허명자조하면 심력을 수고롭히지 않는다. 수고롭게 마음 쓸 일이 없다.허명자조하는데 뭘 마음을 쓰고 머리굴리는가. 머리 굴릴 것이 없다. 텅비어서 밝게 하고 저절로 비춰본다는 허명자조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이다.
59. 非思量處면 識情難測이라
(비사량처면 식정난측이라)
사량할 곳이 아니니라, 식정으로 측량하기 어려움이로다
사량 분별하고 망상부리고 머리 굴리고 할 곳이 아니다. 그리고 식정 측량하기가 어려운 자리다. 지극한 자리는 식정으로 어떤 마음으로써 머리 굴리고 생각하고 해서 계산이 나와 지는 것이 아니다.
60.眞如法界는 無他無自라
(진여법계는 무타무자라)
진여법계는 타인도 없고 자신도 없음이라
진여법계, 참되고 여여한 법의 자리는 너도 없고 나도 없는 자리다.
61.要急相應하면 唯言不二로다
(요금상응하면 유언불이로다)
급히 상응하기를 요할진댄 오직 둘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로다
빨리 상응하고자 할진댄 오직 둘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불이(不二)가 또한 열쇠다. 그래서 절에는 일주문에 들어가자마자 불이문이 나타난다. 불법 이치를 제대로 알려면 삼라만상 모든 것, 일체만상이 다 불이라고 하는 입장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천차만별이 있는 입장이 있고 불이라고 하는 하나인 입장이 있다.
그런데 불법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며 제일 중요한 열쇠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불이의 열쇠다. 불이라고 하는 열쇠를 일단 가져야 된다.그래서 일주문을 들어서자 불이문이 나온다. 현상은 차별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평등하다. 그러면 둘이 아니다. 남녀가 둘이 아니고 동서가 둘이 아니고 남북이 둘이 아니고 일체가 둘이 아니고 여야가 둘이 아니다. 불이라고 하는 이치는 불교 이해의 기본이다.
62.不二는皆同이다 無不包容하나니
(불이는 개동이다 무불포용하나니)
둘이 아니면 다 같아서 포용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니
불이라고 하면 다 하나가 되어서 포용하지 아니할 것이 없다. 정치를 예로 들어서 이런 글을 해석해 보면 너무 쉽다. 무불포용이다.
불이, 하나가 되면 다 동등하니까 포용하지 않을 것이 없다.
63. 十方智者 皆入此宗이라
(시방지자 개입차종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은 다 이 종지에 들어감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깨달은 사람은 이 원리원칙에 다 들어간다.
이 원칙 벗어나서 깨달은 사람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이러한 면을 아는 사람이다.
64. 宗非促延이니 一念萬年이요
(종비촉연이니 일념만년이요)
종지는 촉박하거나 오랜 것이 아님이니, 일념이 만년이요
그 종지, 그 근본 도리는 빠르고 더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념이 만년이요 만년이 일념이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이다. 일념이 만년이다.
65. 無在不在라 十方目前이로다
(무재부재라 시방목전이로다)
있고 있지 아니함이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로다
있는 것과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시방세계가 눈앞에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이 그대로 시방세계다. 눈앞에서 시방세계를 보는 것이지 눈 앞에 있는 것 빼놓고 시방세계가 어디 있는가. 이 자리가 그대로 시방세계인데 어디로 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방목전이라.
66. 極小同大 忘絶境界이다
(극소동대 망절경계이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경계가 모두 끊어지고
이런 것도 다 이치가 있는 말이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경계를 잊어버린다. 끊는다. 작은 것, 큰 것 이라고 하는 상대가 없다는 말이다.
67. 極大同小라 不見邊表라
(극대동소라 불견변표라)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변표를 볼 수 없음이라
극대동소다.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다. 그 가장자리 표면을 볼 수가 없다. 아주 작은 것이나 아주 큰 것이나 결국은 이치가 같다.
예를 들어서 몇 백 광년 몇 천 광년 몇 만 광년을 지나서 우주의 끝이다? 천만에 그 다음에 뭔가 또 있어야 된다. 팔공산 끝에는 무슨 산이 있어도 또 산이 있어야 된다. 길이 있든지 강이 있든지 또 있어야 된다. 몇 백만 광년을 지나도 그 끝에는 뭔가가 있어야 된다. 없을 수가 없다.
제일 작은 물질 단위도 전에는 쿼크라고 하다가 요즘은 힉스라고 하기도 하는데 자꾸 쪼개어 분석해 들어가도 또 분석할 것이 있다. 지금 분석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더 이상 분석을 못할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찍이 인허진(鄰虛塵)이라는 말을 썼다. 이웃 린(鄰)자 허공 허(虛)자 먼지 진(塵)자, 인허진. 허공과 거의 같다. 거의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전에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는가. 도를 통한 분이니까 물질에 대한 실상도 환히 꿰뚫어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빨리 빨리 넘어가서 그렇지 ‘극소동대 망절경계, 극대동소 불견변표’ 이런 구절은 천문학과 연관시킨다든지 물리학에서의 물질의 극소단위 같은 것과 연관시켜서 이야기하기로 하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내용이다.
68. 有卽是無요 無卽是有니
(유즉시무요 무즉시유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다.
눈이 밝고 안목이 트인 사람에게는 그런 차원이 너무나도 확연히 보인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인생을 살며 무한고초를 겪고 온갖 천신만고를 겪다보면 ‘있는 게 없는 것이고 없는 게 있는 것이다’하는 것을 경험으로 다 안다. 설명은 못해도 들으면 ‘맞아요 맞아요’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69. 若不如此면 不必須守라
(약불여차면 불필수수라)
만약 이와같지 아니하면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니라
만약 이와 같지 아니하거든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다.
70. 一卽一切요一切卽一 이다
(일즉일체요 일체즉일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법성게에 있는 말 그대로다.
71.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
(단능여시하면 하려불필가)
다만 능히 이와 같으면 어찌 마치지 못함을 염려하겠는가
다만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 마치지 못할 것을 염려할 것인가. 다만 능히 이와 같이만 된다면 무엇을 마치지 못한다고 염려하겠는가.
72.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라
(신심불이요 불이신심이라)
신심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것이 신심이니
신심명이라고 할 때 신심이라는 말은 믿음과 마음이다.
우리가 ‘신심있는 사람이다’‘신심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다. 불상 앞에서 무릎이 닳도록 천 배 만 배 하고 삼천배 하라면 삼천배 하는 것을 대개 신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소한도 신심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신심의 차원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이 믿는 것이고 마음을 믿는 것이다. 신과 심이 불이(不二)다. 믿는다는 것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둘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전부 마음이 믿는다. 또 마음을 믿는 것이다. 능과 소가 하나다. 주객이 하나다. 신심은 불이고 불이가 신심이다. 둘이 아닌 자리가 그야말로 믿는 마음이다. 이쯤의 차원에서 신심을 이해해야 된다.
73. 言語道斷하고 非去來今이다
(언어도단하고 비거래금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님이로다
언어도가 끊어졌다.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일 손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과거 미래 현재도 아니다. 시간성도 끊어지고 공간성도 끊어졌다. 언어의 길도 끊어졌다.
그냥 그대로 두고보자. 그래야 지도무난이 된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고 하는 대명제를 좀 이해할 수가 있다. 신심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언부언이다. 듣고 보니 표현을 달리할 뿐 계속 같은 소리다.
어떤 왕이 유명한 선사에게 “신심명을 해석해서 책을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선사는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큰 글씨로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이라고 쓰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각주라고 쓰고서 “호리유차면 천지현격이라”부터 마지막 구절까지를 써서 왕에게 주더라는 것이다.신심명은 앞의 네 구절이 계속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신심명의 구절구절에서 승찬스님의 출가하기 이전의 아픈 세월이 눈에 밟힌다. 참 이상하게도 승찬스님의 역사를 알고 보니까 이 한 구절 한 구절들이 더욱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신심명은 이쯤하고 조금 숨 돌려서 9시가 될 때까지 증도가를 나가겠다.
-2013년 12월 23일, 동화사 국제선원 참선당-
(한글해석은 2006년 2월 21일, 無比스님 염화실 방송법문중의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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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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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그 자리에서 듣고 있듯이^^,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혜명화 님!!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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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명화 님, 고마버라예![므흣](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8.gif)
![므흣](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8.gif)
須臾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짧은 시간이라도 돌이켜서 내 자신을 반조해 보면 앞의 경계가 텅 비어서 空한 것 보다는 오히려 수승하다.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니라~ 眞 구함을 쓰지 말것이요, 오직 모름지기 소견(옳다 그르다 하는 그런 소견)을 쉴 지니라! ...放下着하라, 쉬어 버려라~~ _()()()_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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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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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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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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