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특선 영화를 보기 위하여 낮잠을 잤더니 새벽 3시 현재 잠이 안와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라면을 부수어 먹을 것인가 끓여 먹을 것인가 아니면 만두를 집어 먹을 것인가...를 말입니다. 무예동의 모든 회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는 모두 이상향을 꿈꿉니다. 이상적인 국가, 천국처럼 완전무결하고 변함이 없는 세상을. 때로는 과거로부터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것일 때도 있고 때로는 가슴 설레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는 미래의 이상향도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국가나 고사에 나오는 요순시대는 앞의 것이고 유대교, 기독교에서 믿는 천년왕국이나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믿는 완전한 유물론 사회는 뒤의 것일 겁니다. 과거의 이상향을 재현하려면 역사를 거꾸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미래의 이상향을 성취하려면 역사를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진행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여행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떠나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거의 이상향이 정말로 이상적인 것인가 입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국가. 현명한 철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언뜻 좋은 뜻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공화정이나 민주정을 혐오했기 때문에 철인지배가 영원하도록 한다는 명목하에, 지금의 우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배계급, 보조계급, 노예계급은 철저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러기 위해서 노예계급은 철저하게 노동에 필요한 교육만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지배계급도 젊을 때에는 교육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기존의 관념에 반항하려는 충동을 발산할 때가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사고방식이 기존 체제에 고정된 후에야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유는 단 한가지. 플라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국가의 체제가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을 해 봅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것으로 평가받았던 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들,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그리워하여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다를지는 몰라도 분명 우리에겐 과거보다 더 나아진 것, 발전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다가올 이상향도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듭니다. 계급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마르스크의 주장은 많은 사람을 희망에 부풀게 했습니다. 근래 공산권이 붕괴된 사실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미래에 어떤 하나의 유일한 이상향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아시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는 변증적인 과정을 거쳐 결국은 공산사회로 귀착하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공산사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모든 공산적이지 않은 것들의 역사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시적인 시행착오이거나 망상일 뿐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유물론에 대한 지식이 완전해지면 없어질 모든 종교, 유물론 아닌 모든 철학, 완벽한 사회에 봉사하는 기능이 없는 예술작품들이란, 유물론자가 보기에는 아직은 완전해지지 못한 인간의 미숙한 정신이 만들어낸 실수일 뿐이고 이상향이 완성되는 날이 오면 사라질 것이라는 겁니다. 이후에는 오로지 유물론만이 유일한 지식이 될 것이며 다른 생각이란 이 완전한 세상에 사는 인민을 혼돈시키는 악惡이므로 이 역시 원천봉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 역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미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먼 미래에 유물론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우리가 깨닫고 창조한 가치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또한 얼마나 좋은 것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강요된다면 더이상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맞서 가장 열렬하게 민주주의를 옹호했던 칼 포퍼의 유명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주제입니다. 포퍼는 말합니다. 민주주의도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왜 민주주의가 소중하며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것 중에서 가장 우수한지를 말입니다. 바로 민주주의는 그 자체에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는 체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있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통해서 국가가 가는 길이 옳은지 틀린지를 구성들이 스스로 검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잘못이 있고 오류가 있다면 고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과학science의 방법론과도 같습니다. 그 어떤 권위학자의 학설도 권위 때문에 정설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발표된 학설은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 평가받습니다. 그를 옹호하는 학자는 물론이고 반대하는 학자들,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학자에 의해서 꼬치꼬치 캐물어지고 행여 눈꼽만큼이라도 논리에 오류가 없는가 뒤집니다. 과학자도 인간이기에 이런 대접 앞에서 감정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여 자신의 학설이 검증받는 것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과학자로서 추구하는 진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존심이 아니라 진리이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확정한 것도 과학에서는 잠정진리라고 부르며 나중에 언제라도 반증이 나타나면 뒤집힐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둡니다. 이것이 열린 사회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마음가짐과 제도적 장치를 가진 열린 사회와 열린 과학이 보다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과학자들의 학설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발차기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초심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세상을 원만히 사는 처세술을 잘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말입니다. 한병철씨의 책이나 류운님의 기사는 모두 무엇이 맞고 혹은 정확한지를 찾으려는 각자의 노력입니다. 그들 개인이 가진 영향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 역시 우선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검증되고 평가받을 대상이고, 그런 검증을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평가와 엄격한 검증 대신에 다른 것이 온다면 그들의 노력은 일보의 진전을 이룰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묻혀 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세상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합리와 이성으로 무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맞고 틀리고 좋고 나쁜지를 판단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마르스와 기타 인터넷 게시판의 모습을 보면 마치 무협영화에나 나올 듯한 강호인들의 가치관이 되살아나며 더 나아가 그 시절로 되돌아가자고 말하는 듯합니다. 물론 현대에도 인정받아 마땅한 전통은 있겠지만 현대적 접근태도가 어울리는 일까지도 무시한다면, 과학자들이 아무리 천체를 관측해도 문제가 없다는 말에는 귀를 막아 버린채 어느 정해진 날에 종말이 온다고 맹목적으로 믿어 버리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몸과 함께 마음을 수련한다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서 그런가요. 이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적고 목적과 수단을 헷갈려버린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혹시 저도 무언가를 택하여 배우게 되면 그렇게 되어 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첫댓글 연초부터 좋은 글 감사합니다. ^6
별말씀을. 무술의 무武자도 모르니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