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1. 갈라디아6:7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자연법칙임과 동시에 도덕적인 법칙이요 또 영적인 법칙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다. 마 5:에 나오는 팔복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된다. "심령 가난"이라는 씨를 뿌리면 "천국 소유"라는 엄청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반대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악마의 팔복'이라는 것을 발표한 것을 보았다. 참고로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란다.
"첫째, 교권 다툼에 여념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악마의 충성된 종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둘째, '정의'를 구실 삼아 자주 성내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멸망의 자식이 될 것이요. 셋째, 온갖 핑계를 내세워 성수주일을 안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지옥의 문지기가 될 것이요. 넷째,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마귀의 자녀가 될 것이요. 다섯째, 감사한다 하면서도 매사에 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고통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요. 여섯째, 세상 향락에 도취하여 기도할 틈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사탄의 선지자가 될 것이요. 일곱째,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면서 부귀와 영화를 탐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음부의 열쇠를 받을 것이요. 여덟째, 고아 과부 장애인을 학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벌의 은총을 받을 것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지옥에서 저희의 상이 큼이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까지 결정되어 진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말씀 하셨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후에 가서야 나타나는 결과만은 아니다. 이 땅에서도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7:17)고 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야곱에게 닥치는 이런 시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요셉을 잃은 것만 해도 눈을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한이 사무치는 일이겠는데, 이미 시므온이 애굽에서 인질로 잡혔고, 이제 다시 요셉의 하나 남은 동생 베냐민 마저 돌아올 기약 없는 길을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그래서 42:36에 보면 야곱의 외침이 있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오늘 본문 6절에도 "어찌하여 너희가....나를 괴롭게 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 모든 일이 우연하게 닥친 것이 아니라 과거에 뿌려 놓은 못된 씨앗이 나쁜 열매로 나타난 것이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자기 아버지 이삭의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던 사람이다. 그 결과로 그 아버지 이삭은 맏아들도 잃고, 둘째 아들도 보내야 하는 그런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두 눈 멀쩡하게 뜨고 10아들들에게 속아서 20여 년 이상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지금 야곱의 말대로라면 요셉도 잃고, 시므온도 잃고, 이번에는 베냐민도 잃게 될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이다.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물론 믿는 우리들을 절대로 버리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은 죄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으신다. 또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는 하지만 반드시 죄에 대해 징계를 하신다. 다윗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때문에 다윗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엄청난 것이었다.
처음에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의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레아의 소생으로 맏이인 르우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애굽에서 감옥에 인질로 갇힌 사람이 누군가? 르우벤의 친동생인 시므온이다. 요셉의 친동생을 데려온다는 약속으로 르우벤의 친동생인 시므온이 인질로 잡혔다.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먹자고 제의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유다였다. 이 유다가 저들이 현재 처한 위기에서 한 말이 무엇인가?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겠습니다."고 했다. 자신이 아이의 목숨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그 대가로 내어놓겠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심은 대로 그 열매들을 거두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마음의 생각, 입술의 말,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씨앗이다. 그러므로 항상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것이 결국은 나에게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도 열매 맺게 될 것이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까지 그것을 통하여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뿌린 씨앗에 의하여 내 자여손(子與孫)까지 그 열매를 따먹게 된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하시기 바란다.
2.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객관적으로 살펴 볼 때, 지금 요셉의 계획은 자기 부모님을 위시해서 자기 온 가문을 이 죽음의 가뭄에서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야곱도 이런 숨겨진 사실을 알 수 없었고, 야곱의 아들들도 물론 몰랐다. 그러니 온 가문에 걱정과 근심의 검은 구름이 꽉 덮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지금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은 슬퍼할 일은 아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야곱이 한 말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말이었다. 사람의 힘,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야곱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신앙적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우리 믿음 여부에 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문제는 풀려나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또 로마서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
(1)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문제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다.
야곱이 현재 전개되어진 상황에만 집착했을 때 모든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판다 되었다. "모두가 나를 해롭게 한다."고 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독사의 상처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 구리 뱀을 장대 끝에 매어 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예수 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났다. 그들은 자기들을 삼킬 듯이 몰아 닥치는 풍랑을 보면서 "이제는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이 탄 배에 예수 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예수 님을 깨우고 예수 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예수 님께서는 즉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셔서 풍랑을 멎게 하고 제자들을 건너편 항구로 무사히 인도해 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만 부둥켜안고 고민하고 걱정과 염려에 빠지지 마시기 바란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문제를 아시고, 돕기 원하시고, 넉넉히 해결하실 수 있다. 이제라도 부르기만 하면 주님은 들으시고 우리를 돕기 위해 역사 하신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다.
(2)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나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이다.
지금 이런 어려움이 단지 야곱 혼자에게만 임한 것은 아니다. 온 가족에게 임한 환난이다. 이럴 때는 서로 서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슬픔을 함께 하면 반감되고, 기쁨을 함께 하면 배가된다."고 했다.
전에 있던 교회의 장로님의 부인되시는 권사 님이 별세해서 문상을 다녀왔다. 너무 졸지에 당한 일이라 가족들의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슬픔은 역시 장로님이었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서로를 위해서 염려해 주고 위로해 주는 모습을 보았다. 어른은 자녀들을 위로해 주고, 자녀들은 어른을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마치 불행은 자기 혼자만 당한 것처럼 야단을 피우고 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 밖에 모른다면 자신도 더 괴롭고 남도 함께 괴롭히게 된다. 신앙이 성숙 하다는 것은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극복할 줄 아는데 있다. 로마서에 "슬픈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전혀 슬플 이유가 없다. 그런데 슬픔을 당한 가정에 가서 함께 눈물을 흘릴 때, 많은 말보다 오히려 더 큰 위로가 된다. 이런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말한다. 예수 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때 구원이 이루어 졌다.
(3) 우리가 극복해야할 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다.
야곱은 자녀들에게 원망을 한다. "어째서 그 사람 앞에서 베냐민이 있다는 말을 했느냐?" 그러나 이런 원망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해야할 일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왔을 때,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왜 우리를 이런 광야로 끌고 왔느냐?"고 항의했다. 나아가서는 과거 애굽에 있을 때가 훨씬 좋았다고 하면서 떠나 온 애굽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의 가나안 행군은 지연될 뿐이었다. 당면한 문제는 오늘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 남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야곱도 지금 와서 지난 일들을 따지고 그 책임을 묻고 할 여유가 없다. 그것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믿음이 없을수록 이런 현실 부정적인 이런 사고에 빠지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적어도 믿는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게 되면서부터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세속적인 사고와 방법이다.
야곱의 지난 세월은 순전히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쟁취한 세속적인 이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것이나,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나, 나중에 처가살이하면서 재산을 모은 것 등 모든 것이 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한 것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이름 "야곱" 그대로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이름을 고쳐 주셨다. "이제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노라"고 해 주셨다.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은 새 사람이 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세속적인 방법이 아니라 범사를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야곱은 아직도 세속적인 사고와 방법을 온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이것이 어찌 야곱에게만 국한 된 일겠는가? 야곱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미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지가 오래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처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회개하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바로 여기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야곱이 마침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리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이런 변화가 이루어 질 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넘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될 줄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