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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얼마나 더>
저의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마음 아파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주님께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하신 말씀도 제가 무척 마음 아파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태 23,3ㄷ-4)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벌이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저는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손가락만으로 일하는 사람이요,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 옆에 있으면 늘 일이 많아 웬만한 사람은 제게 다가오지 않는데, 그런데도 제게 다가오는 분들은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분들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저나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의 문제는 일을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문제 또는 불성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위선의 문제이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처럼 윗자리를 좋아하거나 군림하는 문제입니다.(마태 23,5-7 참조)
그러니까 저와 그들의 심각한 문제는 하는 모든 짓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 인사와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그들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있습니다.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의 문제는 위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사람들 앞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의 두 번째 문제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것의 문제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는 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저와 그들이 받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세상의 것들이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들이며, 그래서 저나 그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스승의 자리를 가로채 자신이 차지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이 하느님께 향하게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그러고는 군림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라고 하신 다음 그런데도 누가 자신을 높이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경고하심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복음에 비춰 저 자신을 성찰하였는데도 개운치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찰을 해도 반성이 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고 머리의 반성에 그쳐, 이 나이가 되었어도 그리고 하느님께 갈 날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도 여전히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더 성찰을 해야 반성이 머리에서 마음까지 갈지!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실행함으로써 행복하라>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 자를 거꾸로 하면 ‘푹’ 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만 잘났다고 하며 상대의 소리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오늘만큼은 행동함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이웃을 대하는 본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대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지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12)
결론적으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깔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하느님 공경이 위선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저도 봉사자들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할 때 저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더 아래 봉사자에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에게는 사제이기에 모두 잘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기보다는 저를 이용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사람이 저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 믿지 않습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아랫사람을 더 공경하고 높여줄 수 있는 봉사자가 되도록 인도하려고 합니다.
제일 겁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저도 제가 신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을 대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고 스승이라 불리려는 모습을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게 없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본성과 윗사람을 대하는 본성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남편을 대하는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을 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아내라면 남편에게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따르는 본성은 하나입니다.
동물원 우리 속의 곰은 매우 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곰을 본인이 키워보려 하다가 뼈만 남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사냥꾼이 자신의 마당에 있는 케이지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던 불곰에게 잡아먹힌 일이 있습니다.
4년 전 사냥 중이던 세르게이는 새끼 곰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신이 키웠습니다.
그 곰은 자신의 마당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작은 곰은 빠르게 성장을 하고 야생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곰을 자신이 키워준 덕분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곰은 성장하면서 세르게이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곰을 보호소로 보내라고 하였지만 세르게이는 충고를 무시하고 곰을 계속 데리고 다녔습니다.
곰을 길들이며 산다는 일종의 과시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르게이는 보이지 않았고 곰의 우리가 열려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와 세 마리의 개 모두 잡아먹혔습니다.
그중 한 마리의 개는 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맛을 본 곰은 또 인간을 노릴 것이기에 경찰들은 흔적을 쫓아 곰을 찾아 사살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배은망덕한 불곰의 탓일까요, 아니면 곰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신 뜻대로 커 주리라 여긴 주인의 잘못일까요?
본성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믿기 전까지, 그러니까 두 발로 걸으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는 변한 게 아닙니다.
2003년 곰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야생에 들어갔다가 곰에게 잡아먹힌 티모시 그레드웰은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겁먹으면 나는 아마 죽거나 다칠 겁니다.
이 땅에 있으려면 정신을 꽉 잡고 있어야 해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날 갈기갈기 찢을 거예요.
그러면 전 죽습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죽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날카로운 야생에서 싸우며 강해질 것이고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스터(스승)가 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는 상대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자만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상대를 내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언제나 자기 본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속으면 큰일입니다.
왜 다른 것을 잡아먹는 곰이 자신은 안 잡아먹을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요?
아무리 개가 아기들을 잘 돌봐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개와 아기 둘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개가 고기의 맛을 안다면 다시 늑대처럼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본성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그 하나의 본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볼 것이고, 그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도 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어머니가 자녀와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인간이라 믿으면 난 언제나 곰과 같은 모습입니다.
언제든 나를 키워준 주님을 먹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나의 본성은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그래서 하느님처럼 할 수 있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본성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전에 당신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관상기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단계에서도 내가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알려주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고 또 경쟁하며 살도록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께 맡기면 다 잘 될 것이라 믿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를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을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개 우리에서 5년동안 키워졌지만 20년이 지나도 본인은 개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사람과 관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너는 사람이야!”라고 보아주고 말해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사람의 본성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웃을 대하는 본성이 나의 본성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 촬영 때 4년간의 암 투병을 숨기고 활동하던 김자옥 씨가 자그레브 대성당을 들어가자마자 신자도 아닌데 눈물을 철철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당은 그저 그녀에겐 돌과 유리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김자옥 씨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 기도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돌로 지어진 건물 안에 나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의 존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웃이 그저 돌집처럼 보여도 주님의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주님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느님을 대하는 것처럼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녀에게 대하는 모습이 남편에게 대하는 모습이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이고,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주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대하는 본성을 알고 싶거든 내가 이웃을 어떤 본성으로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 같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고, ‘어린이 같은 사람들’만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마태 18,3; 19,14ㄹ).
“왜?” 라고 물으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의 순수했던 상태가 원상 복구된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은 우리에게는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훈계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그런 ‘위선자들’은 ‘어린이들’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위선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묵시 21,27ㄱ)
‘위선자들’은 ‘거짓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회당에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칠 때 앉는 자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학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치는 권한을 누구에게서, 또는 어디에서 받았을까?
원래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직무이고,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이지만(탈출 28,1-5), 율법학자라는 직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직무도 아니고, 그들은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냥 인간의 전통과 관례에 따른 직무일 뿐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가 하는 일을 ‘합법적인’ 권한과 역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권한과 직무를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강한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의 말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누가 어디에서 말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누구나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따라 하면 안 되는 행실을 하는 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실행하지 않는 말은 ‘빈말’이고, ‘죽은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 자체가 ‘빈말’이나 ‘죽은 말’이 되는 것은 아니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들 자신들에게만 ‘빈말’과 ‘죽은 말’이 됩니다.
위선자들의 행실을 따라 하는 사람들에게도 ‘빈말’과 ‘죽은 말’이 됩니다.
그런 자들에게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떻든 위선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빈말’과 ‘죽은 말’로 만드는 것은 대단히 ‘큰 죄’입니다.
‘빈말’과 ‘죽은 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위선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받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은 위선자들의 위선을 구체적으로 예를 든 말씀들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4-7)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위선, 교만, 허영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 자들이고,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만 신경 쓰는 자들이고, 잘난 체 하고, 우쭐거리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마태 23,8-10)
이 말씀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해석은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말씀’ 자체의 힘과 권위는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 자체를 비판하면서 주님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오늘날의 일부 성서학자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12)
우리는 이 말씀의 표현이 아니라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을 섬기는’ 종이 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남을 섬기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섬김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사랑을 나누는 나라입니다.
‘높이다. 낮추다. 높아지다. 낮아지다.’ 라는 말은 ‘같아지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은 선택이다 - 섬김의 선택, 섬김의 훈련>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종과 섬김의 영성이라 강조했던 적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영어에서 보다시피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선적으로 섬김의 직무, 즉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 초창기 30년 전 수도사제 생활 초창기에 있었던 벼락같은, 참 부끄러웠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러 차례 강론에 인용했던 일화입니다.
이때는 제가 40대 초반 수도원 원장으로서 주방장, 손님 접대, 피정집 관리, 일체의 면담과 고백성사 등 1인 5역으로 참 분주할 때였습니다.
한밤중 늦게 피정 신청 전화를 받았고 잠에서 깨어난 저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듯 합니다.
“수도원에 사시는 분이 왜 그렇게 불친절하느냐?”는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즉시 사과를 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즉각적인 깨달음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 즉 섬김의 직무를 지닌 이들은 세 필수 요소를 명심해야 하겠구나. 첫째, 사람이 좋아야 하고,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병원, 학교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우만 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식당이 잘되려면 주인이 친절하고 좋아야 하며 유능하여 음식 솜씨가 좋고 식당 환경이 편안하고 청결해야 할 것입니다.
병원의 경우라면 의사 역시 친절하고 실력이 있어 유능하여 잘 치료해야 하며 병원의 환경도 편안하고 쾌적해야 할 것입니다.
교사의 경우 역시 친절하고 실력이 있어 유능하여 잘 가르쳐야 하고 교실내의 환경도 편안하고 아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나 수도원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피정집을 운영하는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라면 모름지기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영적 실력이 뛰어나 유능해야 하며 수도원 피정집의 환경도 고요하고 편안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좋은 사람, 좋은 실력, 좋은 환경이 서비스업의 3대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요셉수도원은 이 세 조건을 전부 갖추었나 깊이 자성했습니다.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야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당신 수도원을 주님의 섬기는 학원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
(성규 머리말;46)
베네딕도 성인의 참 멋지고 매력적인 섬김의 영성입니다.
수도원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인 학원으로 졸업이 없이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섬김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쉽,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영성 등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섬김과 종의 영성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만인이 형제들이고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선언이자 모든 우상들을 타파하는 참 멋진 선언입니다.
스승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겸손한 섬기는 종이 될 것을 당부하는 주님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바로 겸손의 섬김으로 낮아질 때 높아지고 교만으로 높아질 때 낮아진다는 역설적 영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의 결정적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겸손으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시고 비우시어 하늘 높이 올라가시어 아버지곁에 영원히 살아 자리 잡으시니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섬김의 영원한 모범인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정의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신을 가리켜 ‘세계 총대주교’라고 칭하자 이에 반발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즉시 교황의 신원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 정의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 시몬베드로 아빠스님이 취임 시 자신을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 명명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책임자는 물론 모두가 주님의 심부름꾼이자 종으로 생각하여 섬김의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도 섬김의 권위 하나뿐이요, 참된 리더십도 섬김의 리더십 하나뿐입니다.
세속적 지배와 통치의 권위가 아니라 섬김의 권위가 참권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국의 좋은 대통령이라면 지배와 통치의 '왕'이 아니라 참으로 모두를 충실히 섬기는 종, 공복(公僕)이요 충복(忠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처신, 즉 겸손한 섬김의 사랑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소돔의 지도자들은 물로 백성들에게 경청과 섬김의 구체적 실천 내용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하여라.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모든 국가, 사회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참 멋지고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새삼 섬김과 종의 영성과 자세야 말로 복음의 핵심이자, 온인류의 보편적 본질적 영성이자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한 섬김은 바로 참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한가운데 섬김의 모범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으며 거창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선택이며 훈련입니다.
바로 평범한 일상 가까운데서부터 주님을 닮아 부단히 섬김의 삶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 할 때 구원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과 종의 영성을 충실히 살게 하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50,23ㄴ)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주님은 공동체적 모범 답안에 수정을 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마태 23,3)
지도자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를 구성원들에게 모범적으로 제시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군중은 지도자에게서 삶의 모범 답안을 찾고 싶어하지요.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권한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의 지식과 가르침을 행동과 구분하시지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3)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나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열심한 이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제 행동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이지요.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 23,8)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간과한 진리입니다.
모든 이가 형제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감응하고 손을 내밀지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형제 간에도 선후가 있듯이 형제적 공동체 안에도 기본 질서를 위한 위계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위계는 세속적 권력 구조와는 정반대의 질서를 추구하지요.
높은 자리의 형제일수록 더 낮아져야 하고 모든 이를 섬기는 종의 소명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을 형제의 어깨에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는 이기적인 야심가에 불과할 뿐, 엄밀히 말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제1독서에서 듣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 고모라의 백성들아"
(이사 1,10)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너무 무겁고 그 원성이 너무 커서 유황과 불로 아브라함 때 진즉에 멸망한 도시들입니다(창세 18,16-29 참조).
그런데 기원전 740년대 쯤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소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독서 대목에서 중략된 부분에는 주님께 제사를 드릴 때 겉으로는 예를 갖추면서 그 속은 위선과 허세, 착취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을 꾸중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소돔의 지도자, 고모라의 백성이라 부르신 것을 보면 그 죄의 악취가 얼마나 역겹고 혐오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놓쳤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돌이키길 바라시는 걸까요?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6)
사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혀 생소하고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찌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안에 다 들어 있는 말씀들이니까요.
듣기는 하되 다만 실행하지 않은 일들이고, 가르치기는 하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무의미하고 하찮은 덕목이 되어버린 말씀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사야 시대의 하느님의 탄식과 신약의 예수님 탄식이 한 목소리로 울립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여, 율법의 내용을 자기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 취사 선택하고, 그런 자신을 모범 답안처럼 내세우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움이 강하게 묻어납니다.
실제로 말한 바와 실행이 온전히 일치하는 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곧 '완성'이니까요.
그러니 사실 사람에게 언행일치라는 덕목은 아무리 애를 써도 늘 부끄러운 미완의 과제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언행이 완벽히 일치하시는 하느님처럼 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가령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떠버리 위선자가 되지 않기, 실행하지 않는 바에 대해서 침묵을 택하기, 비난과 불평 멈추기, 타인의 짐을 덜어 주고 숨어서 선행하기,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앞다투어 섬기기, 가난한 이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 편에 서기, 약자의 목소리가 되어 주기...
이는 어떤 제사보다, 어떤 예물보다 주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값진 선물입니다.
벗님이 그동안 잘 해온 실천들이 있으실 테니 너무 욕심 내지 마시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만 더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마침 지역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연민과 참여의 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말로만 이러니저러니 하지 말고 우리 각자의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기도와 희생, 나눔을 통해 이 사순절이 주님의 형제로서 보폭을 맞추는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 작은 것 딱 하나씩만 더 해봅시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구청에 있을 때입니다.
직원이 출산을 앞두고 육아휴직을 신청했습니다.
다행히 임시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을 구할 수 있었고, 직원은 출산과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 직원의 육아휴직은 들어보았지만 남편의 육아휴직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좋은생각 2월호에서 남편의 육아휴직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회사의 동료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복직해서 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아내와 아들과 1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함께 여행을 다녀왔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서 병간호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인터넷 블러그에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남편이 아이와 함께 읽은 동화책이 281권이었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지낸 이야기를 기록한 육아일기가 516편, 조용한 새벽을 틈타서 혼자 읽은 책 383권의 독서일기까지 1,180개의 추억을 글로 남겼다고 합니다.
가정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게임에 몰두하고, 기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적인 뒷받침은 하지만, 아이와 함께 정서적으로 지내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1년간 육아휴직을 낸 남편의 결단을 존경합니다.
그 시간 온전히 가족을 위해서 헌신한 남편의 행동을 존경합니다.
저도 사제생활 27년을 지내면서 1년간 안식년을 신청했습니다.
3개월은 제주도에서 중견사제 연수를 했습니다.
2개월은 미국에 있는 동창 신부 성당에서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틈틈이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돌로미테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북유럽으로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1년간의 안식년이 물 흐르듯이 지나갔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육아휴직을 신청했던 남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했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는 못 했습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했지만 책 읽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27년 사제생활을 돌아볼 성찰의 시간도 적었습니다.
피정과 기도의 시간도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본 받을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제 방에 공기청정기가 있습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옆에 두고 작동시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 주위의 공기가 제일 깨끗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공기청정기가 있는 방에서 공기 오염도가 가장 높은 곳은 공기청정기 옆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기청정기는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여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장치이지요.
따라서 오염된 공기가 어디로 모일까요?
공기청정기 옆으로 모이고, 그래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장소가 되기에 공기청정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 재물 때문에 가족이 갈라져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불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모으겠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도 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공기청정기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할 수 있는 것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 좋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계도권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의 행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는 것, 옷단에 술을 길게 달고 다니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열성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허영의 표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건성을 보이고, 사람들의 신뢰심을 얻기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이 하느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한 형제이며, 하느님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쳐 인도해 주시는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12)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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