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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길위의 인문학 우리땅걷기 원문보기 글쓴이: 신정일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역사歷史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스위스 몽불랑 답사를 가서 루체른에서 찾아간 곳이 빈사의 사자상이었다.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죽은 스위스 용병들이 이름이 한 사람 한 사람 새겨진 조각상을 보는 순간 떠오른 책이 슈테판 츠바이크가 지은 <마리 앙투와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책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다가 보면 일장춘몽一場春夢,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실감한다. ‘봄날의 하룻밤 꿈 같은 인생살이,’ ‘열흘 붉은 꽃이 없이 시드는 것이 인생’인데, 그것을 모르고 천 년 만 년 부와 권력이 지속될 줄 알고 살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수없이 보게 된다.
세계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역사의 환란, 그래서 역사를 이해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 슬픈 역사들, 그 중에서도 프랑스 마지막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은 너무도 비극적이고 슬프기 그지없다. 그 비극적인 생을 슈테판 츠바이크가 지은 <마리 앙투와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책에서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진실과 정치가 한 지붕 밑에서 사는 일은 드문 법이고, 선동을 목적으로 어떤 인물을 그릴 때에는 막일꾼과 같은 사람에게 정의란 별로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요틴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 어떤 비방도 불사했다. 모든 악덕, 모든 도덕적인 타락, 온갖 종류의 풍자가 각종 신문, 팸플릿, 서적을 통해서 이 ‘오스트리아의 창부’에게 전가 되었다.”
츠바이크는 평전의 <서문>을 이렇게 쓰면서 “불행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라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인용한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전 이름은 Josèphe Jeanne M.A.이었다.
독일 황제 프란츠 1세와 여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의 아홉 번째 딸로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4세에 그보다 두 살 위인 루이 16세와 결혼(1770)하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인 루이 16세의 즉위(1774) 후, 궁정의 반(反)오스트리아 세력과 대립, 궁정 의례(儀禮)의 무시 및 쾌락 추구로 인하여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정치에도 간섭, 특히 황태자 탄생(1780), 모르파 사후는 왕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하고, 튀르고ㆍ네케르 등의 자유주의 개혁을 좌절케 했다. 사치ㆍ낭비벽ㆍ하층 계급 멸시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여인 L'Autrichienne"이라는 멸시의 이름으로 불리었고, '목걸이 사건(1785~86)'에는 사실관계가 없었으나 국민의 반감을 더하게 했다. 삼부회(1789) 소집부터 반(反)혁명적 노력을 계속하고, 10월 사건(1789. 10) 이후, 파리의 튈르리궁(宮, Tuileries)에 옮긴 때부터는 미라보와 연락하여 군주제 유지에 진력, 반 사건(1791)을 일으키고, 국외 도망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파리 시민의 튈르리 침입(1792) 후, 오스트리아의 혁명에 대한 무력간섭을 요제프 2세에게 교섭하고, 개전이 되자(1792) 혁명군의 작전을 적에게 통보(通報)했다. 파리 시민의 튈르리 습격 사건(1792. 8) 후, 탕플(Temple) 옥에 이송되고, 루이 16세 처형(1793. 1. 21) 후,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지배의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汚辱)에도 잘 견디고 품위 있는 태도를 보였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이 말은 그가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는 것인데, 이 말을 한 사람은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 말했다는 이다.
세상의 온갖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서 사라져간 그가 결혼 7년 만에(1778) 장녀 마리-테레즈 샤를로트가 태어났을 때 했던 말이 있다.
“가여운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그의 비운을 예감했던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루이 16세 황제의 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사라져 가기 전 시누이이자 자기 아이들의 보호자가 된 마담 엘리자벳에게 이생에서 마지막 편지를 쓴다.
시누이, 이것이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되리라는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당신의 오빠(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과 나의 다정한 시누이,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이런 형편에 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어린 것,! 그 애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애들에게 나의 축복을 전해주십시오. 애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게 되어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맛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의무의 계율과 그 수행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나의 가르침을 아이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정과 신뢰가 그 아이들을 결합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딸은 누나로서 경험과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동생에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 주길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협조하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 이외의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나도 그 말을 되풀이합니다.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기를,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애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한테 말을 억지로 시키게 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이해하고 서로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원합니다.
당신에게 이제 나의 마지막 생각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 카톨릭의 사도적인 신앙 가운데에서 죽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신부가 계실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생동안 그래 오신 것처럼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가한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 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그리고 당신께 기구합니다. 나는 그들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해왔던 모든 적들의 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고모,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 합니다. 내겐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 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다정한 시누이,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은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종교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신부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1793년 10월 16일 새벽 4시30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이듬해 처형당함)에게 쓴 이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서명도 없이 끝을 맺은 이 편지는 그의 시누이인 엘리자벳에게 들어가지 못했다. 형리가 들어오기 이전에 간수인 볼에게 이 편지를 시누이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편지는 담당 검사에게 넘어갔다.
그 뒤 그 편지는 사라졌다가 이십여 년 뒤 꾸르뚜와라는 장사꾼의 손에 의해 루이 18세 국왕에게 전해져 아름답고 슬픈 이별의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편지를 쓴 앙투아네트는 헌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흰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잘린 뒤 손이 묶였다. 1793년 10월 16일, 11시에 수레에 태워져 콩코드 광장으로 향했다.
“오스트리아 여자가 지나간다!” “뻔뻔스러운 앙투아네트가 여기 있다!” 기요틴 처형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처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살짝 밟고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츠바이크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이 지어냈다고 믿고 있다.)”
종교의례를 강요하는 신부에게 그녀가 말했다. “내 불행이 끝나가려는 순간에 용기가 나를 저버릴 리가 없어요.” 편지 속에 쓴 것처럼 그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왕비는 도움의 손을 모두 거절하면서 기요틴의 널빤지 계단을 올라갔다.....죽어가는 사람들이 맨 마지막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알 도리가 없다.”
츠바이크가 쓴 <앙투아네트> 평전의 마지막 부분이다.
“인생의 최후에서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 속에는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하늘의 영靈과도 같은 것으로서 과거의 산봉우리 위에서 빛을 내려 보내고 있다.”
괴테가 죽은 직전에 했던 말과 같이 앙투아네트 역시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가 목이 잘려 생을 마감한 것은 12시15분, 38세, 생일을 약 2주 앞둔 날이었다.
‘심약한 남편을 휘두르며 고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프랑스를 배신하고, 사생활이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아들(당시 9살이었다.)과 근친상간을 한 여자라는 누명을 쓴.’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했다.
“국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던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가 마침내 떨어졌다.” 처형 이후 혁명재판소가 받은 축하문들 가운데 하나다.
“인형처럼 매혹적인 화사한 자태, 채색된 자기처럼 반질한 살결, 생신生新하고 푸른 눈, 활달하게 웃고 때로는 샐쭉할 줄도 아는 우아한 매너, 위엄 있는 입 언저리, 빈틈이 없는 기거의 동작, 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 출출 때의 그 황홀한 맵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마이 앙투아네트 전기>에서 묘사한 그는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했고. 부르봉 왕가 복고 시기인 1815년 1월 21일, 그녀와 루이 16세의 시신은 생 드니 성당 지하 납골소에 안치됐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황제 사이에 딸 마리-테레즈 샤를로트(1778–1851), 아들 루이 조제프(1781–1789), 아들 루이 샤를(1785-1795), 딸 소피-엘렌 베아트릭스(1786-1787) 등이 있다.
이처럼 극과 극의 생을 살았던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었던가?
“비범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비범한 운명을 추구하므로 자신의 차원을 초월하려고 하는 그의 본성에는 영웅적으로 사는 것, 혹은 니체의 말을 빌리면, 위험하게‘ 사는 것이 유기적으로 걸맞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내재한 강한 요구에 의해서 완강하게 세계에 도전한다.
천재적인 인물이라는 그의 내면적 소명이 마지막 힘의 발현을 위해서 불의 시련까지도 신비하게 갈망하므로 그의 수난에 궁극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보일 수 없다. 폭풍우가 갈매기를 가지고 놀 듯이 그의 세찬 운명은 그를 보다 강하게, 보다 높게 밀어 올린다. 반면에 평범한 성격은 본디부터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 자리 잡고 앉아 심한 긴장은 번혀 필요 없이 조용하게, 그늘 속 무풍지대에서, 따뜻한 운명의 품속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격변에 처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와 닿으면 경계하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세계사적인 수난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다, 수난이 그에게 억지로 다친다. 내면에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타고난 것 이상으로 더 위대해지라는 강요를 받는 것이다.”
츠바이크가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 장미>서문에 쓴 글이다.
가짜 뉴스가 온 세상을 도배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줄을 이어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 장미>이다.
루이 16세가 큰 딸을 출산하자 마리 앙뚜와네트에게 귀한 목걸이를 설치하자
“이 목걸이를 살 돈으로 군함을 축조하는 게 옳다.“ 고 했던 앙뚜아네트에게 그 당시 파리 시민들은 너무도 가혹했다.
삶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고, 그 여정 속에서 발견하는 조그마한 빛, 그것이 바로 희망일 것이다.
그런 희망조차 잃어버린 그 마지막 순간에 이처럼 명징한 편지를 쓰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가했던 모든 적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그에게 먼 나라에서 살고 있는 후생이 삼가 조의를 표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쇼팽의 프렐류드 4번을 들려주었으면 싶다.
문득 떠오르는 글이 니체가 <즐거운 지식>에서 한 말이다.
평야에 머물지 말아라.
너무 높게도 오르지 말라.
이 세계의 가장 좋은 경치는
중간쯤의 높이에서부터이다.”
너무 낮게도, 너무 높게도 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
2023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