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마태16,13-20)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나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있는지 성찰하고, 아드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의 연장으로 쓰임 받음에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뜬소문에 뭐라 하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좋은 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얘기를 더 즐깁니다. 소위 ‘신상털기’도 합니다. 속마음은 감추고 남의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신이 나서 의견들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것은 남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질문을 하며 제자들의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른 사람들 얘기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대로 너희의 행동이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단숨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는 말씀은 ‘네가 공부했던 교육이나 문화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해야 은총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예수님을 고백할 은총을 저에게 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베드로의 즉각적인 응답을 인정하시며,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시몬에게 주신 ‘베드로’라는 새 이름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가 방금 드러낸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이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 곧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베드로의 믿음 위에서,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으신 그 믿음 위에서 전진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시몬은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서 반석이 됩니다. 시몬의 능력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말하지 않고,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우라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이어 이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각자는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신앙이 녹아든 대답, 삶이 녹아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당신은 00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 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습니다. 글씨를 쓰시는 분도, 무엇을 쓸지 생각하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저 그분 손에 들린 작은 도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쓰시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 생활 초기에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 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사 안에서 거양성체 때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자비 베푸소서. 용서하소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연장으로 써 주소서.” 합니다.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저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쓰고 안 쓰고는 그분 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이 감싸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품고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여정에도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여는 한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모두가 나를 버린다 해도 주님을 차지하면 행복합니다. 나의 주님을 바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면, 내가 하느님의 백성이며 교회이고, 하늘의 열쇠를 받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하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이고 그 주교들의 협력자가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사목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이 성사를 고백성사라 하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 ‘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해 주는 것보다 그 용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사제의 음성을 통해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회개하며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하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는 단순히 인간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을 불러 특별한 소명을 줍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22,22-23).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 그리고 그 외 아드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바실리 폴레노프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00년경, 캔버스에 유채, 20.8x31.3cm, 볼로그다 시립미술관, 볼로그다, 러시아.
화가는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그렸다. 예수님 앞에는 제자 세 명이 앉아 있다. 아마도 세 제자 중에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제자가 베드로일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고 있다. 예수님의 신성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후에야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에야 빛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칠 때
온 존재가 *예* 합디다 ~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