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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봐라."
한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그의 아버지 하명이 그를 불러앉혔다.
"…언제까지 이렇게 세월을 허비할 생각인게냐."
"허비라뇨."
"경성에서…"
"난봉꾼으로 유명하죠, 제가."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정도는 잘 아는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서로에게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을 만큼
팽팽히 맞서는 그들이었다. 고집으로도 경성에서 우위를 가리기 힘든 것은 물론이요,
그들 부자사이엔 늘 긴장과 적대감만이 흘렀다.
"동경으로 다시 돌아가."
"동경은 제 무대가 아니예요."
한은 일본유학을 마치고(아니, 중도 포기라는 말이 옳을지도) 돌아왔을때 하명의 얼굴이 생각났다.
벌개진 얼굴로 다시 돌아가라면서 집에서 내쫓듯 하셨었다.
동경에서도 소문난 유명한 바람둥이라는 것을 알고는 노발대발 하셨던 거다.
하라는 공부는 아니고, 국제적으로 연애사업을 벌여주시는 작은아들에게 실망을 하는 건 당연했다.
어렸을적부터 총명했던터라 하명이 한에게 거는 기대가 상당했으니 실망도 큰 것이 당연했다.
그러고는 포기한 듯, 한을 경성에 머물도록 허락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딱 1년만에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 듯 했다.
동경에서의 유학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한에게는 맞지 않았던 공부들, 적잖은 차별….
어쨌거나 동경으로 간 뒤 뼈저리게 느낀건, 그의 몸속엔 여전히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거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진 못하더라도, 일본에 대한 충성을 다하며 그들의 앞잡이가 될 순 없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유학을 지속할 수 없어 일찌감치 공부따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경성에 와서 1년만에 온 경성을 그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 것도 그 탓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제와 조선의 끊을 수 없는 악연…, 그 속에서 본인은 누구보다 자유롭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으로 충분하잖아요."
한의 형인 현종은 재산가이자, 대지주인 류하명의 덕택에
서울의 고위급 일본인 자제를 위해 세워진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동경유학을 떠난뒤에 '종로경찰서' 순사부장이 되었다.
하명은 한 또한 제 형처럼 친일 행위를 해서라도 이 어려운 현실상황을
극복하길 원했다. 하지만 한은, 일본의 지배야 그렇다하더라도,
조국의 해방은 돕지 못할 망정, 친일행위를 하면서 목숨을 보존하고싶지는 않았다.
'배울만큼 배웠다'는 자들이 하나둘씩 친일에 앞장서는 상황이 꼴 보기 싫었던거다.
그래서 도중 유학을 포기하고, 1년만에 경성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가 되어버린거다.
이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으니까.
적어도 경성바닥에서 '류 한' 만큼은 조국의 현실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싶었으니까.
"이 녀석이!"
"경성이 좋습니다, 전. 동경엔 돌아가지 않을겁니다, 절대로."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해도…."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신건 아버지십니다."
친일행위를 하면서 말이죠, 차마 그 말까지는 입에 담지 못했다.
어쨌거나, 누구에게건 자랑스러울 수 없는 제 처지를 한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치 않았지만, 하명은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비하할 수는 없었다. 혈연이라는 것이 그랬다.
"흠! 입조심 하거라."
하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도 하명에게서 더이상 기대할 게 없었다.
"나 좀 보자, 류 한."
곁에서 지켜보던 현종이 한을 불렀고, 한은 현종의 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로 네가 집엘 다 들어왔나 싶었는데, 또 아버지께 그런 식으로 굴어야 겠냐."
현종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동생에 대한 반가움 따위는 없는 듯 했다.
한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듯, 목소리에서부터 차가움이 넘쳤고, 한에게로 고정된 시선은 싸늘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란 아들 답지 않은 한의 태도가 거슬렸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한번 거역한 적 없이 곧이곧대로 따랐다.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아들이 현종이었다. 하지만 늘, 하명의 눈 밖이었던 건 한이 아니라 현종이었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한번도 거역해본 적 없는 형, 그렇게해서라도 아버지에게 늘 인정받고 싶어하는
형을 한은 이해할 수 없었고, 형의 그런 태도를 결코 좋게 보진 않는건 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이 현종의 삶의 방식이라면, 굳이 뭐라고 할 순 없었다.
류 한의 인생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납득가지 않는 것일수도있으니.
"네가 동경으로 다시 가는게 어떠냐?"
"…동경으로 가서? 형처럼 일본놈의 앞잡이나…"
"입 조심하라고 일렀을텐데."
현종이 한의 말 허리를 자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현종이 눈쌀을 찌푸리는 걸 보며 한이 입을 닫아버렸다. 입씨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네 행동이 아버지와 나를 어떠한 곤경에 빠트리게 될지 생각한다면, 행동 똑바로 하는게 좋을거야."
"형이랑 아버지를 위해 살고 싶은 맘 없어.
그랬다면 진작 마음 고쳐먹고 다시 동경으로 갔을거야."
한은 끝까지 자신을 질책하는 듯한 형을 노려보는 두 눈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할 수 있다면 한은 그런 꼬리표를 떼버리고 싶었다.
종로경찰서 순사부장 류현종의 동생이자,
대지주, 재산가인 친일파, 류하명의 아들이라는 그런 꾜리표를….
"그렇다면 너랑 더이상 할 얘기 같은거 없다. 나가."
싸늘한 형의 말에도 이제 마음의 상처따윈 받지 않을 만큼 냉담해진 한은
조용히 방문을 닫은 채, 하명에겐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집을 나서버렸다.
*
"어이."
집 밖으로 나오는 은호를 기다리던 한이 그녀를 불렀다.
은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제 집앞에 서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집은 어떻게 알고…."
"친구사이였다니까, 네 오라버니랑."
은호는 '맞다' 하는 얼굴로 한을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보자마자 용건을 꺼내는 은호를 보며 '넌 애가 뭐 이러냐' 라고 쏘아대듯 말하더니,
은호가 '할말 없으면 그만 꺼지세요!'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말을 꺼냈다.
"편지 쓸줄 알아?"
"…글을 잘은 모르지만, 편지 한통 쓸 능력은 됩니다."
은호가 곧,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를 바라보며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이제껏 은철에게 배운 글 실력이면 편지 한통은 쓸수 있을거다.
오빠가 사라지고 혼자 독학을 해야했던 터라 한국어실력이 많이 늘었는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지만.
"따라와."
"어…어딜요?"
"아, 양음료라도 한잔 하면서 찬찬히 편지를 써보자고. 파티가 7시니, 이제 겨우 한시간 남았군."
전통찻집도 있는데 꼭 '카페'라는 델 고집하는 그를 얄밉게 흘기며 은호가 자리에 앉았다.
"자, 편지를 써봐."
은호가 한이 내민 종이를 펴고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이봐. 이런 근대문물은 어디서 난거야?
흰저고리에 검은치마에다가 만년필이라니…, 이거 꽤 비싸보이는데? 네가 산건 아닐테고?"
"선물받았어요!"
"누가 이런걸 줘?"
한의 손에 들린 만년필을 도로 빼앗으며 은호가 손에 꼭 쥐었다.
"누군지 알아서 뭐하려구요?"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은호의 귓가에 아직도 '쉿-'이란 한마디가 머물러있는 듯이.
"뭐하는 놈팽이야? 경성최고 모던보이만 갖고있는 만년필을 갖고있는게…."
"잘난척은! 그쪽처럼 모던보이랍시고 한심하게 세월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투사이니 관심끄세요, 그냥!"
은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한을 노려봤다. 어따대고 비교라는 듯이!
말끝마다 모던보이, 경성최고라느니…, 질리지도 않을 자기자랑이 이어질세라 은호가 질색하며 미리 싹을 잘랐다.
"편지 안쓸거야? 시간없다고."
만년필을 들어 쓰려던 찰나, 은호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누구한테 쓰라는겁니까?"
누구더러 쓰라는건지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쓰라고만 하다니!
"나한테."
"…뭡니까?"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라는 물음이었다. 은호의 미간이 좁혀지며, 곧 눈빛이 살벌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를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입으로 전할 말을 굳이 편지로 쓸 것 없지 않은가.
"아, 연애편지 같은거 말야."
연애편지…,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은호에게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말과도 같았달까.
연애편지라고는 써본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게 당연했다.
얼마전 수경이 받았다는 연애편지를 호기심에 한번 읽어본 적이 다였다.
낯간지러운 말들로 세줄을 읽기전에 때려치웠었다.
"아무나 이 귀한 몸하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게 아니라고, 아가씨.
그러니 있을때 잘하는게 좋을걸…네 매력은, 호기심까지 합쳐서 고작 일주일을 못넘길테니."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보며, '대체 이게 무슨 수작이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은호를 보며,
한이 그녀의 손에 다시 만년필을 쥐어주었다.
"뭐해, 안쓰구."
"내가 왜 그런걸 그쪽한테 써야하는겁니까?"
"애가 말 귀를 못 알아듣네. 아무거나 쓰고싶은 말 써! 그래, '연애' 빼고 그냥 편지 쓰라고, 편지!"
"쓸 이유가 없잖습니까."
"있어. 한글실력이 얼마나 되나 보려는거니까 아무거나 막 적어도 돼."
"제 한글실력은 알아서 뭐하게요?"
"내 기억에 네 머리가 아주 무식하다는…"
한이 자신을 노려보는 은호를 보며 말을 멈췄다.
어렸을 적, 그 꼬마의 눈빛이 이렇게 빛났었지.
은호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한을 쏘아보며 그의 말을 차단시켰다.
"야, 솔직히 사실아니냐? 너 어렸을 적에 은철이가 너 공부못한다고 엄청 걱정했…."
은호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나서야 한이 말을 멈췄고
은호는 오기로 펜을 쥐고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
연필이 부러지지 않은게 놀라울 정도였다.
[제발 정신을 똑바로 차리세요. 한심하게 이게 뭐하는 지십니까.
그 아까운 재능을 써키고 시프신게 아니라면, 좀 제대로 살아보시라구요.]
종이를 빼앗아들고 한자 한자 읽어내려갔다. 한이 양손에 각각 종이와 만년필을 들어 머리위로 들었다.
손이 닿을리가 없다. 그의 큰 키를 은호가 감당해 낼 수 있을리 만무했다.
한이 '으하하' 크게도 웃었다. 그녀의 말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 했다.
편지의 내용또한 훈계투로 잔뜩 훈계하는 내용만을 줄줄이 써놓은거다.
그리고 중간중간 맞춤법 틀린 글자가 눈에 띄었고, 생각만큼 단정한 글씨체가 아니라 삐뚤삐뚤 그 자체였다.
한이 양손에 각각 종이와 만년필을 들어 머리위로 들었다.
손이 닿을리가 없다. 그의 큰 키를 은호가 감당해 낼 수 있을리 만무했다.
"글 실력이 형편없네, 형편없어."
"그래요! 내 글 실력 형편없습니다, 됐어요?"
"그걸 자랑이라고 떠벌리는거냐? 오빠는 애국애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수재였는데,
동생이라는게 글 공부도 안하고…. 무슨 이래가지고 독립투사가 되겠다는거야?"
어제까지는 독립투쟁에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듯이 나오는 은호를 보며
참 똑부러지며, 당돌한 아가씨라고 생각됐다면, 오늘보니 글 실력이 영 꽝이었던 거다.
"열심히 하고있으니까 걱정끊으세요."
은호가 말을 마치고 만년필을 빼앗았고, 한이 주머니에서 고급 만년필 한자루를 꺼내 손에 쥐더니
멋진 글씨로 편지의 뒷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당신의 조각같은 얼굴과 멋진 몸매는 제 마음을 모두 앗아가 버렸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이리도 멋있으신가요. 당신의 눈망울에 나만이 담겨지기를 소망해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힐 듯 알 수 없는 감정이 제 마음속을 소용돌이 쳤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그리할런지요. 나의 그대여! 오~ 영원히...그대와...함께 하고싶어요.]
다 적었는지 그가 종이를 손에 들고 은호의 눈 앞에 흔들었다.
은호는 종이를 빼앗아 들고 한 줄 한줄 읽어내려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얼굴은 붉어져가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제 입으로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운 말들만 늘어놓을 수가 있는것인가.
류 한은 늘 은호의 상식 밖이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글빨을 가진 내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지 않아?"
아니, 이런 글빨로 또 어떤 여자들을 울렸을까만 생각날 뿐이었다. 은호가 그를 얄밉게 흘겼다.
"안되겠어. 독립투사가 되려면 우리말은 기본이야. 앞으로 네 글공부, 내가 책임져주지."
한이 뭔가 선심쓰는 듯 말하자 은호는 꼴불견이라는 듯 그를 쏘아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에게 도움을 구해 한글 공부를 하고 싶진 않다.
"차라리 독학이 낫겠어요."
"야! 이래뵈도 내가 어렸을때 경성 최고 수재였어!"
"뻥도 야무지십니다, 아주! 최고 수재는 우리 오빠예요."
"그래 인정! 은철이 다음으로 경성 최고 수재였어. 됐냐?"
"그것도 못믿겠어요!"
경성최고 모던보이에 경성최고 수재라?
겸손이 미덕이라는 것도 모르나, 새침한 얼굴로 가려는 은호의 손목을 탁, 한이 붙잡았다.
"이게 다 널 위해서야.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을 맞고싶거든, 우리의 혼과 정신이 깃든 우리 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
난 우리나라의 혼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을 지킬 생각도 없는 놈이라 한글을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넌 다르잖아. 진짜 한글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그러니까 그걸 가르쳐주겠다는거야."
꽤나 진지했다. 분명 미자도 그랬다. 류 한은 자신의 능력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심하고, 방탕하게만 사는 줄 알았더니, 자신이 가진 한글 능력을 은호에게 가르쳐주겠단다.
그런 마음을 먹을 정도라면, 은호가 아는 것 처럼 그가 '한심하고 무능력한 자'는 분명 아닌 것이다.
"좀 튕기지 말고. 너 내가 잘해준다고 이러는것 같은데, 나도 성깔있는사람이야.
제발 '네-' 이럴 순 없는거냐?"
"네! 됐죠?"
한은 한방 얻어맞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도 없었다.
"사실 오늘 은철이한테 부칠 편지나 써보라고 하려던 참이었었는데…."
"오라버니요?"
"그래, 근데 네 글실력이 워낙 형편이 없어서 은철이가 그 글을 읽고 뒤로 자빠지지나 않을까…"
"뭡니까?"
은호가 그를 째려보았다. 오라버니를 생각하는 이런 진지한 순간에도 은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니까 열심히, 제대로 글공부를 하란 말이야. 애가 매일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구, 어른한테 훈계할 줄만 알지.
꼬맹이 주제에 감히…."
"어른이요? 그리구 꼬맹이? 나이만 먹었다고 다 어른인줄 아십니까?
마음가짐, 행동, 말 한마디가 다 어른스러워야 진짜 어른이죠. 코흘리개 동네 꼬마보다도 못한…"
"야! 코흘리개 동네꼬마보다 못해?"
"네! 그렇습니다."
버럭, 한은 코흘리개 동네꼬마와 비교당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천하의 류 한에게 그토록 심한 모욕이 또 있을까.
"그 말 취소해, 당장!"
"못하겠습니다."
약이 오른듯한 한의 얼굴을 보며 은호가 입을 삐쭉거렸다.
"그나저나 파티가 곧 시작이야, 따라오라고, 좀."
한의 말에 은호는 입을 꾹 다물고 앞장서 걸었다.
"어딘지는 알고 날 끌고 가는거야?"
그 말에 은호가 우뚝, 멈춰섰다. 한이 웃으며 은호의 뒤를 쫓아가더니, 은호의 어깨에 손을 탁, 걸쳤다.
"이쪽이 아니라 저 쪽이야. 가자구."
은호는 한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고있다는 것이 불편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한은 그럴 수록 은호의 어깨를 좀 더 세게 쥐는 것이었다.
기분나빠 한껏 툴툴대며 가고있을까 한이 자전거를 손짓하며 말했다.
"타. 솔직히 나, 모던보이 류 한에게 자전거는 굴욕이지만,
네가 차를 싫어하는 듯 해서 한대 뽑았어. 최고급으로다가."
"이런데 돈쓰지말고…"
"안탈거야?"
한은 '됐네요, 그냥 걸어갈래요.' 라는 은호의 말을 묵살하며, 은호를 번쩍 앉아 자전거에 태웠다.
깜짝놀라 소리를 지르는 듯 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허리 꽉 잡아.. 얼른 ."
은호의 손을 당겨 자신의 허리춤에 감도록 한뒤, 싱긋 웃으며 한이 페달을 돌렸다.
.
.
경성에 이러한 곳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호화스러운 건물이었다.
겉보기엔 다른 건물과 그닥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내부는 미자가 운영하는 댄스홀 답게 그녀의 노력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세심한 장식과 공간활용이 눈에 띄었다. 은호는 한의 뒤를 바짝 따라 들어갔다.
"류 한, 결국 모셔왔군 그래."
어깨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은 미자가 싱긋 웃으며 은호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나는 최미자예요."
"…네. 이은호예요."
서로 모르는 사이인 척을 하려니 힘겨웠다. 이 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미자뿐일텐데
미자 마저도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나는 박은수예요."
또 다른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반갑게 웃으며 은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보니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다 여자들이었다.
흰저고리에 검은치마를 두른 사람이라고는 은호 한 명 뿐이었다.
경성 최고의 모던걸이라는 모든걸들은 모두 모아놓은 듯한 곳.
"난 이여주라고 해요. 여기 미자랑 한이랑 절친한 친구죠."
한의 한쪽팔을 잡고 늘어지며 어느새 불뚝 끼어든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그 밖에도 서너명의 여자들이 더 있었다.
"한글실력이 영 형편없더군."
한의 말에 미자가 은호를 쳐다보았고,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우리 모두 배우는 입장이니까."
미자의 상냥함에 은호가 한을 향했던 분노를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대놓고 '형편없다'고 무시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지만.
"물론, 발각이 되면 위험에 처할거라 밤에는 댄스홀로만 이용하죠."
류 한의 속셈이 불보듯 훤했다. 한글을 배우는 이런 모임의 인원이 된 것은,
독립투쟁을 위한 역량배양이니는 다 헛소리일 뿐, 정작 목적은 '댄스'였을 거다.
그런 모임에 은호 한명쯤 끼워넣는 다고 문제될 건 없으니 은호에게 한글을 가르쳐준다 했던거고.
"경성 최고의 사교클럽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은호씨."
한이 말하며 '한 곡 추시겠습니까?' 라고 말할 듯이 다가오더니,
은호를 위 아래로 한번 훑으며 '도저히 못해먹겠군' 이라고 말하는 걸 은호는 똑똑히 들어버렸다.
"그 옷차림은…좀."
한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고 미자가 웃으면서 은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방문을 열고보니 화려한 드레스에서 부터 옷들이 종류별로 정리 되어있었다.
"이거 입어봐요."
미자의 말에 은호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원피스였다. 자꾸 어색해서 거울만 쳐다보는 은호를 보며 미자가 웃었다.
은호가 한순간의 모던걸의 옷차림을 하고있다니!
게다가 높기만 하고 영 불편한 구두때문에 걸음걸이까지도 영 엉망이었다.
"이건 좀…."
"제일 수수한 옷으로 고른건데…마음에 안들어요?
그런 옷차림으로 여길 오가는건 곤란해요. 여긴 사교클럽이니까. 또 오늘은 아주 특별한 댄스파티가 있고요."
"아…."
여긴 아무래도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화려한 모던걸, 모던보이들 틈에서…뭘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저기…"
"아. 호칭! 날 언니라고 불러요. 나 한이랑 동갑이거든요. 그나저나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은호씨의 일은…"
"아, 네?"
당황해서 적잖게 얼굴이 붉어진 은호를 보며 미자가 웃었다.
은호에게선 어쩔 수 없는 수줍은 많은 소녀의 티가 났다.
"오늘 댄스파티가 은호씨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네요, 내 나름으로는 은호씨의 환영파티이기도 하거든요.
알아두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올거예요."
미자가 말하며, 은호를 거울앞에다 끌어와 앉혔다.
은호를 앉혀놓고 화장을 하는 미자의 손놀림이 빠르게 움직였고, 곧 해가 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