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초심닦기(17) / 위선환 (시인)
조금 아쉬움이 느껴지는 시인들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본인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좀 더 분명하게, 형식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인식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단순해지지 않을까 걱정돼서죠. 사실 명확해지면 단순해지잖아요. 단순해지니까 문학이 갖고 있는 다층적인 의미가 빠져나갈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문제의 제기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잘 떨어진 좋은 시가 되지 못하는 거예요. 조금 단순해 보인다 할지라도 문제를 명확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어라는 것에 대해서 시인들이 좀더 생각해주면 좋겠고요.
기본적으로 '시적인 것'은 언어의 배치를 통해서 얻어지는 언어의 효과, 어떠어떠한 효과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그 언어의 효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문학에 관심과 식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 '시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언어의 문제를 간과하고, 언어 외적인 부가의미를 시의 본질로 말하는 경우가 많죠. 물론 이 부가의미도 언어의 효과가 만든 것이긴 하지만, 시가 원래 출발하는 기저 의미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의 그동안의 역사적 상황들 때문에 그런 부가의미와 관련된 요소들을 시에 들여왔을 때 이를 시적이라고 말해왔던 것 같아요. 저는 시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언어라고 말하고 싶어요.
- 박상순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9년 11-12월호/ 대담
ㅇ ......차이가 있다면, 사물성(事物性)을 강화하기 위한 기법의 실험보다 언어의 기능과 구조 그리고 내 언어관을 전달하는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문학이 언어를 매재로 삼는 이상 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계속되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이제 서정도 정서나 상상의 표현에만 머무르지 말고 지적 분석과 그를 통해 얻은 인식의 세계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 윤석산 / 시집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의 '자서'에서
ㅇ 서린호텔 손소희 천경자가 입을 짝 벌리고 반가워한다. 입들이 실로 크다. 으하하하하. 즉각 무교동에서 길 건너 청진동 '왕좌'로 갔다. 천과 손의 입은 클 뿐 아니라 그 속에서 마구 말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 처음부터 폭음으로 들어갔다. 내가 "야 우리 트자!" 경자가 "좋다" 했다. 소희가 "고은이...... 어린 사람이 감히......" 내가 "야 소희야" 했다. 소희가 "은이야" 했다. 마구 낄낄거렸다. 두 여자는 이불 홑청은 흰 것이 좋다는 말도 했다. 셋이 셋 중 먼저 죽는 사람 조사 쓰기로 했다. 술맛 드럽게 좋았다.
- 고은 / 일기 / 1977년 2월 4일 / <유심> 2009년 11/12월 호
ㅇ 멋진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술적 지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예술적 지성이란 현실과 상상력 사이의 점들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가능성을 파악하고, 지성은 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가공한다.
- 스탠 데이비스의 《예술가처럼 일하라》 중에서
ㅇ 나는 내 시쓰기가 동 시대 저작자들에게 공통된 언어 또는 관습 또는 체계에서 나의 언어를 떼어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독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의 언어를 가진다. 순도 높은 자기의 언어를 가질 때 비로소 한 시인은 태어난다 : 허만하 시인의 다른 언급임). 이러한 생각은 시 쓰기를 시작한(전후의 대구에서였다) 무렵부터 몸에 밴 불손한 버릇이다. 시는 일반성.보편성에 매몰될 수 없는 가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새로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고독은 시인이 자기 일을 하는 최선의 조건인 것이다.
사유도 숨이 막힐 정도로 과격한 운동이라 말했던 것은 들뢰즈다. 나는 우리들의 전통적인 서정에 형이상학적 미학을 접목시키면 내 시가 더 풍요로워질 것이란 생각을 해왔다. 개념적 사색이 아닌 심정의 사색이 펼친 신선한 시의 영역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시는 논리의 주름을 미를 위하여 활용하기는 하지만, 사실 초논리적이다. 시는 때로 정서적 직관으로 벌거숭이 존재에 달려든다.
시적 인식은 세계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언어화하는 괴로운 작업이다. 그것은 세계 안에서 시적 체험을 가지는 일이다. 시적 인식은 딱딱하고 표정 없는 사물에,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고유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고요히 부름으로써 사물과 교신하는 언어의 사랑이다. 시적 인식은 바깥을 향하는 눈길 또는 감각기관이 수용한 감각의 총체(공감각의 적분)에서 태어난다. 시적 인식은 살아 있는 자아의 자발적 실현이다. 이 자아실현은 세계(자연)의 우위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주관이 <자아>를 넘어서 스스로 바깥이 되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와 다른 것>이 된다는 일이다.
세계와 사귀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이 시다. <시는 바깥과 안이 하나가 되는 계면에 풀잎에 맺히는 이슬처럼 태어나는 것이 틀림없다.
시쓰기는 창조행위다. 창조는 선행하는 창조에 대한 비판이며, 미지의 언어(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탐색은 위험하다. 상처입지 않은 더듬이는 없다. 시는 위로가 아니다. 상처를 예상하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선인의 텍스트는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전제인 동시에 장애가 되는 이중성으로 있다.
전통에 기대는 언어만이 고전적인 것은 아니다. 시대의 전위에 서서 고독하게 시대의 물음과 맞서서 물러서지 않는 언어 역시 고전적이다. 이 말을 나는 솔 출판사의 평론가 임우기씨와의 광안리 바닷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것 같다.
- 허만하 / 시집 '바다의 성분'에 대하여 - 시인의 말 / <현대시학>2009년 10월호
ㅇ 표현하려는 것을 문자로 여실하게 그리는 기술은 어쩌면 시인됨의 기초가 되겠으나 막상 하려 들면 결코 쉽지 않다. 시 쓰기를 단순히 멀쩡한 언어규범의 비틀기로 배웠다면 그 근처에도 가기 어렵다. 과도한 비유나 전혀 해독이 안되는 요설이 다 그렇게 배운 탓에 나온다. 新奇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게 소박하지만 성실한 묘사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연후에 비로소 골법용필(物의 골격을 붓을 다스려 도려내는 法度)이 가능하고, 그때 시다운 시를 잡아낼 수 있다.
- 오태환 / 시인작품공모 심사평/ <현대시학> 2009년 10월호
ㅇ 우리는 '진화'의 논리를 구축하려는 분투가 '서정이냐, 탈서정이냐'라는 구도뿐만 아니라 '문학의 종언'이라는 뒤늦게 도착한 메시지를 밀고 나가기 위한 동력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 또한 알아차릴 수 있다. 서정시는 전통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증명(이것이 때로는 한 논자의 언급처럼 '변명'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만)해야 하는 처지에 있으며(그것도 아니라면 서정의 가치를 다시금 재생산해야 한다), 젊은 시인들과 비평가들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미래파' 진영은 새로운 언어의 정당성을 저 고루한 서정시의 비판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 증명의 명분을 얻는다. 다시 말해 서정시 진영은 서정을 옹호하면서 그것이 고루하고 자기 위무적이며 보수적인 미학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화의 경로들을 만들어야 하고, 미래파 진영은 기왕의 시와는 '다른' 새로운 기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의 출현을 갱신과 진화의 징후에 기입해야 한다.
ㅇ 정작 중요한 것은 서정시를 과거의 것, 재래의 문법, 서정적 자아로 수렴되는 권위의 원천 등으로 규정해버럼으로써 새로움의 당위적 측면을 강조하는 진영과, 탈서정시를 소통불능, 자폐적인 세계관, 사회성의 결여라는 혐의를 덧씌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시도 아닌 것'이라는 악의적인 규정까지 동원하는 작금의 대결적 구도는 분명 과잉되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 김대성 /<서시>2009년 가을호
ㅇ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로부터 시작된다. 익숙한 것들의 반복은 창조적 상상력의 방해 요소이다. 개인화된 문법, 난해한 형식, 탈장르적 특성, 혼성모방적 사유, 환상시, 새로운 서사의 전략은 위반의 방식이야말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기 때문인 것이다. 창조적 상상력이란 낯선 것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조합하고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의 시인들에게 파편화된 서사, 환상의 화법, 비유기적이며 추상화된 언어사용은 시적 전략의 차원을 넘어 그들만의 실존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이지만 허구일 수밖에 없는 현실, 기만과 모순투성이의 삶, 끊임없이 판단을 유보해야만 하는 윤리 앞에서 시인들은 고뇌한다.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 욕망을 소비해야만 하는, 도구화되고 기계화된 세계 속에서 시인의 언어가 뿌리 내린 곳은 그 욕망의 허상을 향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가르쳐준 문법과 사유방법으로 이 세계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문법과 새로운 사유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아방가르드를 지향하는 시인들의 언어는 실험 자체가 목적이 된다.
- 강경희 / <서시> 2009년 가을호
ㅇ 서정시의 전통은 하나의 패턴을 갖고 있는데, 하나의 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과 그 줄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 즉 원심적 경향과 구심적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순환운동으로서의 흐름은 시인의 시대적 예감 혹은 그의 역사의식이나 시대적 특성에 의해 각기 나타나는데, 한국 현대시에서는 기성의 문학정신과 형식을 부정하며 전통적 서정에서 일탈하려는 시도들이 있을 때마다, 또 한편에서는 서정시로 회귀하려는 반작용이 일어났고, 그 반복과 회귀의 여정이 현대 시의 추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서정시는 길이의 측면에서 장시와 구별되고, 제시의 방식에 있어서는 배역시(bollengedichte)나 서술시(narrative poem)와 구별되고, 시정신에 있어서는 리리시즘(lyricism)을 배척하는 다양한 실험시나 목적시, 관념시와 구별된다.
ㅇ 18세기 자영농으로 전락한 사족(士族)층이었던 위백규가 창작한 '농가구장(農家九章: 향촌 사족층이 서생의 자리에서 자영농의 자리로 이전해 가는 농부화의 단계를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18세게 장흥 방촌 위씨 일문의 영농의 노래였다고 볼 수 있다: 註)과 같은 시편에서는 공동체의 구체적 생활체험과 공동체 의식이 충일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면홰난 세다래 네다래요 일읜벼난 피난 모가 곱난가 오뉴월이 언제가고 칠월이 반이로다 아마도 하나님 너희 삼길제 날 위하야 삼기샷다
- 위백규,'농가구장' 제7수
면화는 세 다래 네 다래로 듬뿍 피고, 이른 벼는 피는 이삭이 곱더라, 오뉴월이 언제 갔는지 모르게 벌써 칠월 중순이로다. 아마도 하느님이 너의(면화, 벼)를 만드실 때 바로 나를 위해 만드셨구나.
- 김병호 / <시와 사람> 2009. 가을호 / 현대시의 서정적 전통과 계보 --------------------------------------
* 위선환 시인 전남 장흥 출생 1960년에 서정주, 박두진이 선選한 용아문학상으로 등단 1970년부터 이후 30년간 시 절필하다가, 1999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 시집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탐진강』 『수평을 가리키다』 『시작하는 빛』 외, 합본시집 『나무 뒤에 기대면 어두워진다』 시 에세이집 『비늘들』 현대시작품상, 현대시학작품상, 이상화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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