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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워하면서 사랑하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다시 비유를 드시는데, 오늘은 주인과 소작인 관계에 대한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건데, 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러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작 소작인이라니 말입니다.
아들과 상속자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래서일까, 오늘 소작인들 마음이 이해가 되고, 소작인들이 일으킨 반란도 이해가 됩니다.
소작인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우리가 하느님의 상속자라고 하잖아요?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로마 8, 17)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갈라 4, 7)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소작인이라고 하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상속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고 어떤 말이 맞습니까?
주님 말씀이 맞겠지요.
소작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근본 정체성이고, 상속자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승격된 정체성이지요.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소작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상속자라는 말이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그리스도 신비체론을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관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는 것입니다.
지체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지체로서 살지 않으면 상속권은 얻을 수 없고 소작인도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처럼 살면 아들로서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사랑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고, 아버지께 드리는 사랑은 지극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비와 용서라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거역하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불순종하며 어떻게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소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지만 진정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 곧 두려움과 사랑을 합친 것이 경외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소작인의 비유로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받는 오늘, 경외하올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분명 ‘십일조’ 봉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감사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첫 조상들은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지옥인데,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조금 주다가 상대가 그것을 줘봐야 고마워할 줄 모르면 바로 주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분은 그래도 다 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출을 바치지 않고 하인들까지 죽이는 그들에게 아드님까지 주십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화 ‘해바라기’(2006)는 그냥 단순히 한 명의 깡패 영화 같은데 지금까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무언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어쩌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말을 미리 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개로 이름 날렸던 오태식이 주인공입니다.
조폭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한 명을 죽이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그런 오태식에게 죽임당한 남자의 어머니 양덕자가 면회를 오고 오태식은 그녀에게 감화돼 개과천선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기 새어머니로 삼습니다.
오태식은 10년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목표를 수첩에 적으면서 출소 후 지키겠다 다짐합니다.
특별히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이상 세 가지는 새엄마 양덕자가 꼭 지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한편 오태식이 수감된 중에 마을을 차지하려던 병진이 시의원 조판수와 마을을 접수하고 오태식의 똘마니 양기와 창무도 조판수 밑에 들어갑니다.
오태식이 출소하자 그들은 모두 긴장합니다.
시의원인 조판수는 마을 일대를 재개발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양덕자가 해바라기라는 식당을 하고 있었고 오태식이 그 집에서 살게 되는데 개과천선하려는 그의 마음과 달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태식은 새엄마의 말대로 절대 싸움을 하지 않고 맞아주기만 합니다.
조판수 패거리가 양덕자의 해바라기 식당을 부수며 모녀를 위협하고 오태식이 일하는 카센터까지 가서 집단 폭행해서 사장의 팔을 부러뜨립니다.
이에 양덕자가 조판수를 찾아가 자신이 아들이 쓴 일기장 복사본을 보여주며 엄포를 놓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조판수가 양덕자 아들에게 시킨 안 좋은 일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조판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덕자의 딸 희주가 벽돌에 맞아 얼굴을 다칩니다.
그러자 결국 양덕자는 식당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오태식은 조판수를 찾아가서 함께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더는 건들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판수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라고 하며 그 대가로 태식 오른손의 힘줄을 끊으라고 시킵니다.
병진이라는 형이 그의 힘줄을 끊는 시늉만 합니다.
집도 내어주어 쇼핑몰을 짓게 하고 가장 싸움 잘하는 아들의 손목의 힘줄도 자르고 딸의 얼굴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조판수에게 여전히 양덕자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기를 시켜 양덕자를 죽입니다.
조판수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축 파티를 하고 있었고 오태식은 자신의 다짐을 깨고 조판수를 찾아갑니다.
술도 마시고 새엄마의 영정 앞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싸우지 않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10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벌을 주겠다.”
희주를 급습한 놈을 찾고 오태식은 병진에게 나가 있으라 말합니다.
병진은 태식의 힘줄을 끊지 않고 상처만 내 준 사람입니다.
그후 그곳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태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수는 자기 손목과 어머니 집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죽였으니 더는 그 집에 살 수 없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제가 어렸을 때 길거리 아이를 데려와 씻겨주고 재워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아이를 계속 키우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삼 형제가 학교 간 사이에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가버렸습니다.
이것만 해도 함께 살 수 없을 텐데, 만약 저희까지 해를 끼쳤다면 어떨까요?
아들 중 하나를 죽였다면 그래도 어머니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면 괜찮겠지만, 다 주고도 생명과 같은 존재까지 빼앗는 벌을 받으면서 자기 집에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강도에게 집을 빼앗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소출을 봉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태수는 자신을 받아 준 새어머니에게 신발을 사드렸습니다.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그렇게 그곳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려고 하면서 어머니까지 죽인다면 그건 아닙니다.
인도에서 부부가 20원 때문에 싸우다가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하느님까지 죽이는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감사의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이런 형국까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못된 소작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소출 일부를 주님께 감사히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태아가 엄마 배를 갉아 먹는다면 그 태아는 더는 그 배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에일리언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인간을 숙주로 새끼를 사람 몸에서 키웁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에일리언 새끼를 몸속에서 빼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하느님 몸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 살려면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를 가지게 된 것의 십분의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성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할 일을 했으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꾼은 일꾼입니다.
주인을 꿈꿀 수 있을지언정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 앞서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는 옛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하늘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집단적 악과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동생 요셉의 모습에 형들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고, 요셉은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는 동생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집단적 악이 결정적으로 발동됩니다.
평소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의가 동시에 표출된 것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창세기 37장 19~29절)
형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꾼 특별한 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창세기 37장 3~4절)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
(창세기 37장 7절)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였고, 큰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들끓었고, 마침내 집단적인 광기와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요셉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남의 나라 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요셉은 대제국의 제2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후에 대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긴 가족들을 살리게 되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스토리를 엮어갑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봐도 집단적인 악, 집단적인 광기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왔습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다인 대학살,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전쟁들은 집단적 악의 결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백성은 아직도 집단적 악의 난동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이에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량한 국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검찰 집단, 기레기 집단, 국민 민폐당,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남아있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창세기 37장 21~22절)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악이 더 큰 악으로 확산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일말의 양심입니다.
거대 악을 목격하고서도, 그 악으로 인해 드러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악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유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인 몫의 소출’은, 즉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내야 할 소작료는 ‘회개’와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또는 ‘회개하기가 싫어서’였습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소작인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라면 자녀답게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의무감으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소작인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루카 15,29).
아버지가 큰아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 아니라, 큰아들 자신이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만 일하면서 스스로 노예의 위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사랑으로’ 일하는 자녀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가득한 법입니다.
혹시 지금 기쁨은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마태 21,37-3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아들을 알아보고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또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재산을 차지하려고(빼앗으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요한 16,2).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믿지 않고) 죽인 것은 사실상 하느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서 거부한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메시아께서 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대답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벌을 선고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 말에서 예수님의 재판 때에 유대인들이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7,25)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만심에서 한 말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유죄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죄인들 자신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하고, 합당한 처벌을 선고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일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 21,42-43)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은 '집을 짓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서 그냥 버린 돌'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생각해서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2,36)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라는 말씀에는 “너희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하시는 경고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소출을 내는 민족’은 제대로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권도 없고, 특혜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대원칙’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살아 있는 사람이 꿈꾼다 - 하느님의 꿈>
꿈이 있습니까?
아주 절실한 물음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살아있는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짐승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또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꿈이, 고상한 꿈이 있는 사람이 진정 사람입니다.
꿈이 있어야 타락하지 않습니다.
꿈이 사람을 고귀하고 품위있게 사람답게 합니다.
그러니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합(삽)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꿈만은 늘 생생해야 합니다.
나이가 적어 젊은이가 아니라 꿈이 있어야 젊은이입니다.
꿈이 있어야 나이에 상관없이 하느님 닮아 영원한 청춘입니다.
예전부터 참 많이 제 시와 강론에 등장했던 주제가 ‘꿈’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애송 자작시 2편을 소개합니다.
“창문 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
24년전 겨울 화장실 밖 흰눈 덮인 언덕을 보며, 부활의 봄을 꿈꾸며 쓴 시입니다.
이어 21년 전 3년 후 5월초에 쓴 ‘꿈 있어야 산다’라는 시입니다.
“밖에서는 모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잎들 다 진
겨울 나무가 그렇다
그러나 보라!
살아 있지 않은가
봄되니
피어나는 꽃들
짙어져 가는 신록들
아!
꿈 있어야 산다
꿈 있어 겨울 추위 견뎠다
꿈 없으면 죽는다
꿈은 생명이다
가슴에 담았던 꿈
활짝 피어내니
꽃이요 신록이다
아름다운 생명이다.”
하느님은 꿈꾸는 분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성서나 교회의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 하늘 나라를 꿈꿨던 꿈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인공 요셉이나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은 하느님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시키려 전력투구했던 분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은 예수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하나하나를 통해 당신 꿈이 실현되어 모두가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좌절 실패한 듯 했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보여줍니다.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분명 악의 승리요 하느님의 꿈이 좌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그의 꿈을 실현시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다음 시편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하느님의 승리를, 하느님 꿈의 실현을 깨달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입을 빌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고백합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그대로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꿈이 펼쳐지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 꿈의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아갑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꿈중의 꿈은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주님 부활의 꿈입니다.
사순시기 바로 주님 부활의 봄을 꿈꾸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주님 부활을 앞당겨 꿈꾸며 기쁘게 살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당부입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지니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성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6-7절)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요셉의 시련과 수난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삶의 연속입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시샘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요셉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이야기 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느님의 개입이 참 오묘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다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이 개입했고, 마침내 맏형인 유다의 개입으로 천우신조 요셉은 목숨을 건집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살붙이가 아니냐?”
유다의 개입으로 요셉은 살아났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 넘기니 복음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좌우간 르우벤과 유다를 통해 요셉을 살려내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가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중국의 삼국지에서 사마의와 그 아들들이 궁지에서 살아났을 때 제갈량의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다”라는 탄식이 생각납니다.
즉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도 좌절됨이 없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가는 하느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꿈이 있는 사람은 삽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의 꿈이요, 주님 부활의 꿈입니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라 주어진 선물 인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분은 꿈을 많이 꾸시나요?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은 매일 5-6가지의 꿈을 꾼다네요.
다만 그것을 기억하고 하지 못하는 것 뿐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어떤 꿈을 주로 꾸세요?
주로 개꿈이 많은가요? 아니면 거룩한 꿈을 많이 꾸시나요?
어릴 적엔 참 꿈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꿈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만큼 현실적이 되어간다는 말이겠지요.
꿈은 현실보다는 이상과 관련있지요.
그래서 만약 내가 아직도 이루고픈 꿈이 많다면 나는 젊은 겁니다.
반대로 꿈이 없다면 나는 나이가 젊더라도 이미 늙은이이지요.
요셉은 꿈쟁이였습니다.
예수도 꿈쟁이였죠.
저의 사부 아씨시의 빈자 성 프란치스코도 꿈쟁이였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늘나라를 꿈꿨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그런 꿈을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실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이상주의자, 꿈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꿈을 꾸는 한 나는 살아있고 참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내가 더이상 꿈을 꾸지 않으면 나는 죽은 자와 다름없고 비관적 현실론자가 됩니다.
참 종교인은 그래서 꿈쟁이요 낙관주의자요 희망과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서 실현됩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자식들이 함께 물려받듯이 이미 잘 살든 못 살든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기뻐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답니다.
참다운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려면,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처럼 이승에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고난을 겪더라도 그 때문에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그 영광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필수과정이니까요.
오히려 고난이 없다면 그걸 문제시해야 할 겁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표시니까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마태 21,42)
오늘 특별히 짠한 마음으로 머물게 된 구절입니다.
버려진 이, 이해 받지 못하고 미움 받은 이에 의해 역사가 이어지고 새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나게 되었듯이 예수님을 통해 온 인류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걸까요?
요셉의 버림받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결국 이스라엘에게도 인류에게도 선익이 되었으니 악행으로 빌미를 제공한 요셉의 형제들이나 소작인들(로 비유된 이스라엘 기득권층)도 하느님의 뜻을 행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자칫 선과 악의 경계를 흐려 과정 안의 악을 정당화하고 하느님의 뜻을 결과주의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궁극의 선이시라 악을 심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이 악을 행하라고 부추기지 않으십니다.
선의 결핍인 악이 상처의 왜곡과 탐욕으로 인해 생긴 인간 마음 속의 틈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스며들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비극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창세기 성조들의 범죄 이야기에서부터 오늘날의 슬프고 아픈 폭력적 사건들을 통해 직접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고요.
"그럼 하느님은 뭐하시는 분이냐? 이런 인간의 폭력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거냐?"고 항변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란 최고의 선물을 주셨지요.
이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은 성인도 될 수 있고 타인을 해치는 범법자도 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더 그럴듯하게 꾸미시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거나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하느님은 인간이 상처를 왜곡하거나 탐욕에 빠져 망가뜨리고 훼손하고 짓밟은 지점에서 또다른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랬고 예수님의 경우가 그랬으며 무지와 두려움으로 한순간 무너졌던 우리 삶의 굴곡을 통해서도 그리 하셨습니다.
사순절.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께 깊은 회개의 눈물을 분향처럼 올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존재 가득 새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버려진 돌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드시는 하느님께서 요셉을 버림받은 형제, 이민족의 노예에서 민족의 구원자로, 예수님을 가장 치욕스런 형이 집행된 사형수에서 다시 살아난 하느님의 아들로 일으켜 세우셨듯이, 볼수록 또 알 수록 비천하고 수치스런 우리 죄악의 부끄러운 지점을 선과 생명의 출발점으로 바꿔주시기를 믿고 또 바랍니다.
수천 번, 수만 번 죽임을 당해도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는 순수한 신뢰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주인의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악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들 못지 않게 하느님 사랑을 못 알아들어 "제때에 소출을 바칠 줄 몰랐던" 배은망덕한 소작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마태 21,41)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도 꿈을 꿉시다.
하늘나라의 꿈을 꿉시다.
그러면 우리는 상속자가 되고,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부족하고 무지랭이같은 우리이지만 하느님의 자배로 이미 하늘나라의 상속자 되었음을 기뻐하며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지금 겪고있는 고난 때문에 아파하고 실망하지 말고 그 축복에로의 여정을 인내하며 잘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그것을 위해 결정적인 걸림돌인 소유와 질투를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쩌면 역설의 늪을 헤매며 때로는 사랑하고,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실존적 혼동과 역설 자체가 십자가요 십자가의 죽음을 부르는 근원적인 이유임을 깊이 헤아려보는 것은 어떤가.
소유는 구속을 부르고 질투는 왜곡과 소외로 되돌아오는 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의 부메랑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제1독서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질투의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요셉이 받는 총애 때문에 의기소침해졌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요셉의 행복한 처지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삶의 방향과 기준을 하느님께 두지 않고 정화되지 않는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 요셉을 시기 질투하였고, 결국 요셉은 이집트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불순한 태도와 왜곡된 사랑을 통하여 당신의 창조를 이어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 앉혀주신다.
시기 질투로 꼬이고 더렵혀진 관계를 창조의 순간으로 되돌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하느님 나라요(21,43), 그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돌보고 그들로 하여금 정의의 결실을 맺도록 하시려고 당신 백성을 지도자들(소작인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그들은 “저 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재산을 차지하자.”(21,38) 하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낸 포도원의 상속자인 예수님마저도 단죄한 다음 사형선고를 내리고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고, 나아가 하느님의 것을 탐하고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져 결국 하느님을 보지도 못하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거부당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셨다.
죽음을 부르는 질투는 이렇게 하느님이 아닌 다른 이들과 비교함에서 비롯되는 악이다.
그 악의 뿌리는 가난을 거스르는 애착이요, 소유욕이다.
애착과 탐욕과 이기심이 부르는 질투는 다른 이들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의 것임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다.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늘 아래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향기 있는 삶의 태도이다.
비교하려거든 오직 하느님하고만 비교해야 한다.
눈앞의 다른 누군가의 태도나 말씨, 감정 표현에 신경을 쓰며 분노하고 판단하고 시기 질투하는 이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방향 착오를 하고 있음을 뚜렷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주님!
더는 주인인 양 착각하고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온갖 것을 당신께 돌릴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다른 이 안에서 선(善)을 이루시는 주님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기쁨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시기와 질투의 희생이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창조’를 이어가시는 당신의 깊고 넓은 섭리의 손길과 자비를 굳게 믿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게 해주소서.
조금은 더 거룩해지기 위하여 몸과 마음으로 겪는 고통과 수고로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구원의 여정에 일치시켜 나가도록 준비시켜주소서.
‘소유 없이’(sine proprio), 그리고 왜곡된 사랑의 표현인 질투와 시기가 꿈틀거리는 죽음의 계곡 너머 참 자유와 기쁨이 기다리는 부활을 ‘지금, 여기서’ 노래하게 하소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을 조롱하는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에서 벗어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에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람페두사는 이탈리아 남단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섬은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관광지입니다.
그러나 섬은 아프리카와 가까이 있기에 난민들이 찾는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난민들은 뗏목을 타고 오기도 하고, 정원을 초과해서 배를 타고 오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섬에 오기도 전에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웃의 고통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며,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하신 질문을 상기시키고 “이 질문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 형제, 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
교황님은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서 우리 이웃의 범위를 확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이 세상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지구를 보호할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지구를 위한 기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온 세계에 계시며 가장 작은 피조물 안에 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유로 감싸 안으시며 저희에게 사랑의 힘을 부어 주시어 저희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보살피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평화로 넘쳐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저희가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소중한 이들, 이 지구의 버림받고 잊힌 이들을 구하게 하소서.
저희 삶을 치유해 주시어 저희가 이 세상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하게 하시며 오염과 파괴가 아닌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저희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경외로 가득 차 바라보며 모든 피조물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
날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오늘 독서에서 형제들은 아버지가 보낸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듯이, 형제들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동생 요셉을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형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앞의 차가 불안했습니다.
차선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았습니다.
이 차의 뒤에 ‘초보운전’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습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형제님께서 “저렇게 운전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를 추월하면서 보니 젊은 형제님께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에 미숙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면, 여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여성이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남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단순한 집중력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남성도 많습니다.
또 반대로 엄청나게 운전을 잘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 역시 고정관념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유다인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이 경작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할 일은 하지 않고 죄에 빠져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 위해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를 학대합니다.
하느님의 인내심은 사랑으로 표현되어 끝내는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못된 백성은 그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의 비유’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고 하시지요.
사람들이 업신여긴 것,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느님은 쓸모 있게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어 긴요한 자리에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못된 소작인과 같이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주인에게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으로 언제나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올바른 판단으로 주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고 있습니까?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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