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26] 출애굽기 31장-33장 묵상
★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23)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배신하였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지 40일도 안 되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언약을 파기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출33:1~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천사만 함께 보내고 하나님은 함께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서
길에서 그들을 진멸할까 염려한다고 하셨다.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 약속의 땅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시내산 언약에서 밝히신 것처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다(출 19:5-6).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시자
그들은 슬퍼서 한 사람도 자신을 단장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33:7-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예 장막을 옮겨버리신다.
이 회막은 광야의 성막과 다르다.
제사장들이 상주하며 제사하는 곳이 아니라
모세 홀로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다.
이곳은 다른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고 여호수아만 그 장막을 지켰다.
그러면 왜 모세가 이스라엘 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진 밖에서 만나야 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백성과 함께 하시면
백성들이 진멸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나는 회막을 이스라엘 백성의 진에서 격리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나중에 성막이 만들어지면 항상 진 가운데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진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의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짓고
모세가 그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났다.
모세의 이 행동을 알아차린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진 밖으로 나갔다.
이들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라고 쓰여있다.
그리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면 자기들의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선다.
이것은 여호와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기를
마치 친구에게 말씀하시듯이 하셨다고 쓰여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문에 서서 여호와께 예배를 하였다.
모세가 돌아가면 여호수아만 그 장막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에
올라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지 않으시고
천사만 보내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제가 주께 은총을 입었다고 하면서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달라`고 간청한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침내 여호와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고 하셨다.
가장 큰 은총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은총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은총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에게 없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친구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모세는 이 은혜를 통해서 참된 복이 무엇인지 알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함께 가시지 아니하시면
차라리 자신들을 가나안에 들여 놓지 말라고 하소연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런 간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간구이다.
그런데 이런 모세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 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신 34장).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의 아들은 어떠한가?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이 증거 한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충성됨이란 모세와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셔서
온전하고 완전한 속죄를 단번에 영원히 이루셨다(히 10:12-14).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를
완벽하게 구원하여 내셨다.
구원하여 내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마태복음 28:20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어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예수님은 친구라고 불러주셨다(요 15:14-15).
예수님은 모세보다 뛰어난 우리의 중보자요, 지도자인 것이다. 아멘.
출애굽기 33:18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착각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라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고 하는 자세가 나온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3장 20절을 보면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다고 한다.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했는가?
자세한 묘사가 없다.
출애굽기 33:21-23절을 보면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한 반석 위에 서라고 한다.
하나님의 내 영광이 지나 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 손, 등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우리가 알아들을만한 표현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앞과 뒤가 있고 등과 손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요4:24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할지니라”고 했다.
영은 사람이 볼 수 없다.
야고보서 1:17을 보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다.
이 말씀에 보면 빛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한다.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우리와 같은 형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다(요 6:46).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이 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의 뒷 모습을 목도했고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받았다.
백성들의 타락으로 멀어져 가던 하나님의 마음을
중보기도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탁월한 지도자요,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시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의 뒷 모습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영광을 항상 정면에서 보시고 함께 사신 분이시다.
모세는 죽어 백성을 떠났지만
예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멘.
- 1년 1독 성경통독 학교, 꿀송이 보약 큐티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 <2025년1월26일,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