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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하는 대로 하였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에게서 배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태오 1,19)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로마 4,13)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믿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 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꿈같은 얘기>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래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낫다.”는 옛말이 있듯이 꿈은 해몽을 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꿈이 사나워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꿈을 나쁘게 꾸어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꿈을 다스릴 줄 알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때로는 꿈을 통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받기도 하지만 역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을 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습니다.
정말 꿈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만한 기쁨이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결국 하느님의 역사는 그분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데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마음을 통해 결국 천사를 만나게 되었으며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당혹스러운 일 앞에서 신중한 처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의롭게 살았던 요셉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울프강 트릴리)
일상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의로움을 살지 않고 갑자기 의로운 처신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루 한 순간순간을 주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바로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오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면서도 그만한 소명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나의 길에서 그분께 협력하는 몫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부끄럽지만 ….
“믿는 이들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 라고 합니다.
오늘을 침묵으로, 그리고 믿음의 응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만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이유>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은 항상 ‘의로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의롭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 앞에 나설 힘’을 말합니다.
돈을 꿔 가서 갚지 않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갚기 전까지는 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아드님을 의로움의 옷으로 만들어 우리를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의로움이 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입었다면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려 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힘을 잃습니다.
김희아 씨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보육원에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잘못하는 다른 부모들을 평소에 심판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딸인 김희아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른 부모들을 심판한 것 때문에 더욱 자신들이 키우지 않은 딸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돈 2억 갚아”란 마지막 말을 하고 떠난 어떤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돈을 꿔 가서 자취를 감췄다가 형이 죽기 직전이라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왔던 것인데, 형은 마지막 힘을 주어 “내 돈 2억 갚아”란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죗값으로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꾸어준 돈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받아내려 한다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희생시켜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내 양심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나설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 힘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내가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 앞에 설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에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막내아들 벤야민이 이스라엘 재상이 된 요셉의 은잔을 훔친 것이 발각되자 벤야민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갇히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청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제야 그들이 요셉을 만날 힘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기나 기생충과 관계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은 주는 만큼 내어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요셉은 어떻게 의로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의로운 사람은 이웃의 죄까지도 나의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이 짓는 죄들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세상 모든 죄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죄는 모두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들입니다.
‘프리쳐’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지옥이 재미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지옥은 잊고 싶은 과거의 잘못들을 매일 똑같이 되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유진이라는 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그 충격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유진은 하느님은 더 놀라운 기적을 준비해 놓으셨고 그것을 보려면 살아야 한다고 위로해줍니다.
트레이시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이 하려던 쓸데없는 짓을 그만둡니다.
이때 트레이시는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오랫동안 트레이시를 좋아했던 유진은 트레이시에게 키스합니다.
트레이시는 유진까지 자신에게 그러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여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유진도 그렇게 합니다.
둘 다 죽지는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유진도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힘을 가진 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참다못한 목사님이 “그럼 지옥에나 가버려라!” 하니 지옥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이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유진이 지옥에 오자 이 홀로그램 시스템에 문제가 생깁니다.
간수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 손들어 봐”라고 말합니다.
지옥에 있는 대다수는 손을 번쩍 들며 자신들은 진짜 지옥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들지 않습니다.
자신만큼 지옥에 합당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치고 결코 자신이 지옥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 안에서 죄를 찾아낼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동과 생각과 욕구로 살아갑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해서 간음이 아니라 음탕한 욕구로 여인을 바라보아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이 존재합니다.
이 욕구와 반대되는 사랑이 들어올 때, 내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내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과 반대가 되는 죄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들이 다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든 크든 세상 모든 사람이 짓는 죄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사랑하려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바로 사랑도 욕구이고 모든 죄의 근원도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거울 앞에 서면 자신 안의 악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만약 행위만 가지고 따지자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로 보자면 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면 나에게 짓는 죄에 대해서도 내가 미움까지 가지 않을 무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잡는 유도탄이 있다면 비행기는 그 유도탄을 교란하는 교란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판단이 될라치면 그 미움은 마치 유도탄처럼 나에게 날아옵니다.
만약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교란탄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을 결국엔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임신하고 온 마리아의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지려 했습니다.
요셉이 그냥 파혼하면 임신시켜 놓고 살기 싫어 파혼시키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이 판단되면 유도탄이 날아온다고 생각하고 빨리 내 안에서 그와 같은 죄를 찾아내어 교란탄으로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의로움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란탄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려는 의지로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흠모했던 요셉 성인>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안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 성인은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충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의인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이후 마리아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당혹해하는 부모에게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굿간 탄생, 이집트로의 피신, 소년 예수님의 돌출 발언,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마리아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고행길이었습니다.
때로 고독하고, 때로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그만 주저앉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리아 옆에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요셉 성인이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생활'을 해나가던 요셉 성인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것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도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마리아를 향한 강한 부성애와 보호본능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통속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인 사랑, 헌신적인 신적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 가정의 위대한 배경 - 성 요셉>
오늘 3월 19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에 앞서 사순시기이자 3월 성 요셉 성월에 맞이하는 참 좋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가정의 위대한 가장이자 배경인 성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여기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예전 불암산을 보며 쓴 “산처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 수도원처럼 수호자 성 요셉을 배경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요 우리 성교회입니다.
그대로 산 배경의 덕을 닮은 성 요셉입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에 34년째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것이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입니다.
‘하늘과 산’ 지금도 역시 여전히 즐겨 애송하는, 그동안 강론 때 참 많이 인용했던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과 산, 그대로 하느님과 성 요셉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니 성 요셉뿐 아니라 하느님과 믿는 이들 모두와의 이상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배경이 좋아야 합니다.
날로 배경이신 주님과 깊어가는 관계를 통해 배경이신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성 가정의 위대한 배경인 성 요셉이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를 많이 닮았는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 요셉의 덕을 살펴 봅니다.
첫째, 성 요셉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성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사랑 관계의 성 요셉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같이 넓고 깊은 품의 자비로운 배경의 가장 성 요셉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의 처지를 깊이 배려한 참으로 깊고 넓은 성 요셉의 자비로운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마리아의 안위에 대한 걱정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이런 자비로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요셉은 내심 파혼하기로 작정하고 밤샘 기도에 돌입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주님과 요셉의 은밀한 대화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수님 역시 매일 하루의 일과가 끝났을 때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내밀한 친교 시간을 가졌고, 중대한 일을 앞뒀을 때 역시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졌고 아버지의 뜻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응답을 받는 성 요셉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대로 성 요셉에게는 주님의 감로수(甘露水) 같은 말씀의 응답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의 사람, 요셉을 신뢰한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이처럼 하느님의 신뢰를 받는 성 요셉같은 사람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성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순종의 겸손,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가 순종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과 신뢰의 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인 위탁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순종의 응답이, 협력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차질없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응답이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나탄의 예언의 성취도 이런 요셉의 순종이 있었기에 비로소 예수님 탄생으로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성 요셉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가능했으며, 차질없이 구원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 요셉은 그대로 바오로가 고백하는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상하는 성 요셉의 믿음입니다.
다음 아브라함 대신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대로 희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을 그대로 닮은 성 요셉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희망이 없는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희망하며 ‘희망의 여정’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요셉 대축일 미사 은총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 우리 모두 자비의 사람,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침 산책 때 마다 즐겨 부르는 ‘바다’ 노래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저어 가요.”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앞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고 온통 절망 뿐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그냥 스러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안 보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희망이 절벽'인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가장 큰 위기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가장 강력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닥까지 내려 간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고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 희망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그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두려울 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바닥을 차고 올라올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동네친구들과 냇가에서 멱감으며 깊은 곳 바위에서 다이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깊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중도에 발버둥치며 올라오다가 엄청 물을 많이 먹고 혼난 적이 있어 물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바닥을 치고 더 쉽게 올라올 수 있었을 것을 괜한 두려움에 억지로 발버둥치다가 더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삶의 진리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추락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지 않을만큼 견딜 힘을 주신다.
더 큰 기쁨과 축복을 위해 작은 추락은 마땅히 견디어내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올라가고 있나요?
그럼 힘차게 비상하십시오.
내려가고 있나요?
세상 바닥을 더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모두가 축복입니다.
오르막도 축복이고 내리막도 축복입니다.
올라감도 축복이고 내려감은 더 큰 축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에 대해 경탄하며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사실 희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 희망과 가능성이 예측된 상태에서는 믿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요셉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탄하며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요?"
나와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고 언약한 그 아리따운 나의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베어 왔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나요?
절망의 늪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의 꽃을 어떻게 보셨나요?
벗님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미래가 희망적입니까?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희망적입니까?
아니면 희망이 없어도 희망적입니까?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희망의 사람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 참 신앙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 신앙인입니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함께 갑니다.
신망애 삼덕은 그리스도인의 필수덕목입니다.
희망적이지 않는 사람이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 삶에 명확하고 실현 가능하며 성공까지 손에 잡힐 듯한 미래가 보장된다면 행복할까요?
아브라함과 요셉의 경우에서 보듯, 신앙은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을 때 발휘되고, 희망은 희망이 없어보이는 순간에 빛을 냅니다.
모든 것이 안전하게 보장된 상황이 인간적인 위안은 줄지언정, 영혼이 정신 바짝 차려 깨어 있지 않으면 믿음의 거품은 사그라지고 희망의 빛 또한 스러지고 마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니 믿음과 희망이 절실한 순간을 맞닥뜨렸다면 감사하십시오.
믿음과 희망 따위는 저만치 제쳐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따라가도 앞길이 창창하다면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구원은 산술적 논리와 인과 관계를 발판으로 다가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드러나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묵묵히 아무 말 없이 충직하게 성심껏 '없는 길'을 갈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좋은 일을 많이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조차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음으로써,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의 선물을 주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조 아브라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들과 캠핑을 가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해 주던 신부님이 임기가 다 되어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장비도 마련하고 예약도 하던 신부님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나서지 않았지만 예약도 하였고, 장도 보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게도 그런 역할이 주어지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되지만 막상 역할이 주어지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옆에서 신부님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동북부 엠이도 작년에 대표부부가 새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임 대표부부는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어서 동북부 엠이를 잘 이끌어 왔습니다.
신임 대표부부는 젊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으로 팬데믹 상황에서 동북부 엠이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였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택된 대통령이 주어진 역할과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사는 혼자서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신앙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축복하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튼튼하게 하였고,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였고,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낯선 땅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지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신앙의 역사도 한 사람이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분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제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던 제의였습니다.
어린 예수님께 요셉 성인은 어쩌면 높은 산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셨고, 손을 잡아 주셨고, 많은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요셉 성인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요셉은 충분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법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이제 법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은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신앙은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이제 우리들 또한 요셉 성인의 삶을 따라서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0%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2% 가능한 걱정 때문에 90%의 삶을 걱정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중세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꼽는다면 아마 ‘마녀재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에 마녀 판별법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진짜 마녀는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사실 진짜 마녀라면 인간이 어떻게 제거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무고한 사람이 마녀로 몰렸을 뿐이었습니다.
마녀 판별 중에 조금 어이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이나 늪, 운하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위에 떠 오르면 마녀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떠오르지 않는지를 계산해서 살려준 것이 아니라, 익사할 때까지 그냥 놔뒀다는 것입니다.
무고한 죽음인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결백한 사람이었다고 판정만 했습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이 잘못된 역사를 우리 삶 안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보다는 이해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단죄보다는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생명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에 대한 보고는 복음서에서 그리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리아의 약혼상태 남편이며,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였음을 전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죄를 범한 경우, 공개 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누가 이 사실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공개 재판을 받게끔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꿈’일 뿐이라고 간단히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꿈의 계시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만큼 마리아를 믿었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의 양부가 될 수 있었고, 이 땅에 구원의 빛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힘은 큽니다.
우리 역시 믿음과 사랑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아픔과 상처를 이 땅에 남겨서는 안 됩니다.
대신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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